라이베리아 내전 전개와 발생원인
라이베리아 약사와 내전전개과정
한반도 정도의 크기(97,754㎢)에 인구 약 3백30만명의 서부아프리카에 위치한 라이베리아가 최근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요인으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내전이 평화적으로 종식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최근 몇 일전부터 유혈 사태로 바뀌어 미국의 개입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곡물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 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의 이름을 따 몬로비아라 이름 붙였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흑인 총독 조지프 젱킨스 로버츠(Joseph Jenkins Roberts)는 1847년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국경을 확장했다.
미국의 노예 후손들이 건설한 국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밀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베리아 고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라이베리아와 방위조약을 맺어 몬로비아에 도로, 국제공항, 심해항구를 건설해주었다.
1944-71년까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윌리엄 V.S. 터브먼(Tubman)이었으며 1980년 쿠데타로 그의 후계자가 축출되면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트루휘그당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시에 내륙에 사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의 오랜 정치적 지배도 끝났다. 그리고 80년 이후 라이베리아는 계속되는 정정불안을 겪게 되었고 끝없는 내전의 상황으로 정세는 변해갔다.
내전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1980년 도우(Doe)가 이끄는 구국평의회(PRC)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1989년 테일러(Taylor)가 라이베리아국민애국전선(NPEL)을 결성하고 도우 정권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내란의 종식을 위해 나이지리아, 가나, 기니, 감비아, 시에라리온이 참여하는 서아프리카제국경제공동체(ECOWAS)가 중재를 추진하여 1990년 분쟁 당사자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2년 10월부터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1996년 4월 반정부의 라이베리아민주통일전선(ULIMO)이 정부 경찰부대 및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ECOMOG)과 전투를 개시하였다. 1996년 7월 31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 각파와 평화협의가 열려 9월까지는 무장을 해제하고, 6-9개월 이내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1997년 7월 19일 7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1985년 이후 12년 만에 실시되어 상원 26명 하원 64명 등 90명이 선출되었으며, 대통령에는 75%의 득표율을 얻은 최대 군벌 지도자인 테일러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97년 국민들의 공포심에 편승해 새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그 후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그에 대항하는 반군이 99년 봉기, 라이베리아는 다시내전에 휩싸였고 반군은 라이베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테일러를 압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S)가 중재에 나서 지난 7월 6일 오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Monrovia) 국제 공황에서 나이지리아 대통령 오바산조와 라이베리아 대통령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두 사람의 90분간 회담을 가졌다. 회담 이후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로부터 떠날 것이라는데 합의했다고 발표하였으나 테일러가 미국의 군대 파견을 계속 요구하자 내전이 다시 발발하였다. 정부군은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방위에 나섰고 반군들은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시작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20여만명이 숨졌고 13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내전 발생의 원인
그러면 이와 같은 내전이 발생하게 된 원인들은 무엇일까? 크게 경제실패로 인한 정국혼란과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처음으로 쿠데타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라이베리아의 경제 문제였다.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악화상태에 놓였다. 아프리카에서 남아공, 이디오피아와 함께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지만 경제상황은 좋지 않았다. 라이베리아 경제는 농업 및 철광석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3을 차지하지만 전체 노동인구의 2/3 이상이 이에 종사하며, 주요환금작물로는 고무·커피·카카오 등이 있다. 그러나 1차산업의 경우 가격변동율이 워낙 커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메울 수 없었으며 이는 외국으로부터 외채를 도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차관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라이베리아는 주 수입원인 고무 농장과 플랜테이션 농업이 외국기업들에게 넘어가게 되고 정작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만성적인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인당 소득도 200달러도 채 되지 못하는 아프리카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외국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고무 산업의 경우 정부 다음으로 많은 고용을 창출해내며, 고무 수출이 라이베리아 GNP의 10%를 차지한다.
1980년의 쿠데타의 경우 경제악화가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를 승리로 이끈 인민구제평의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도 경제해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 채 1985년에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1980년 쿠데타를 이끌었던 라이베리아 전군 사령관 새뮤얼 K. 도우(Doe)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6년 취임함으로써 정국불안의 요소를 그대로 안고 갔다.
내전 발생의 두 번째 요인은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 돌아온 해방 노예의 후손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을 노예처럼 다스리며 이 땅을 지배하였다. 즉 미국에서 건너온 약 5%의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이 나머지 95%인 선주민들을 지배하는 정치적 구조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현재 라이베리아는 크게 16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 가장 큰 종족은 크펠레 족과 해안에 살고 있는 바사 족이다. 그밖에 기오 족, 크란 족, 바이 족, 그리고 이슬람교도인 말랑케 족이 있다.
1980년 쿠데타에 성공한 도(Samuel Doe)는 원주민인 크란(Krahn) 족으로 정권을 쥐었으나, 9년 후에는 다시 해방노예의 후예인 테일러가 혁명을 이끌고 도우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곧 종족으로 구성된 여러 파벌 간에 내란이 계속되었다.
내전 발생의 세 번째 요인으로서는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테일러가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 국가는 리비아와 시에라리온 반군이었다. 테일러는 리비아 카다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용해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으며 또한 시에라리온에서 불법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이를 국제 암시장에 팔아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이 다이아몬드의 불법 유통은 시에라리온에서도 내전이 계속적으로 벌어지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 특히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반군들에 대해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인근 국가들의 정정을 불안하게 만드는데 앞장섰다. 시에라리온에서는 다이아몬드 때문에 그의 반군은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음으로 시에라리온의 재판정은 그를 전쟁 범죄자로 기소하였다.
향후 전망
현재 라이베리아는 정부군과 반군들이 수도 몬로비아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군대를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파견하기를 원하며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서부아프리카 국가지도자들은 평화유지군이 배치되기 전에 테일러 대통령이 반드시 라이베리아를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 대통령은 이미 자신이 사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나이지리아로 망명을 것으로 예상) 대신 자신이 사임하기 전 먼저 평화유지군이 도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의 이와 같은 주장에 반군 단체들은 만약 테일러 대통령이 평화유지군을 기다린다면 외국 부대 주둔이 가져다 줄 안정감으로 인하여 결국 영원히 라이베리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현재 수도 몬로비아로 진군하여 정부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1천5백내지 2천명의 미군을 라이베리아에 파견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91년 소말리아 사태에서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이후 아프리카에서는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 코피안난이 밝혔듯이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만이 현 라이베리아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각된다.
라이베리아 약사와 내전전개과정
한반도 정도의 크기(97,754㎢)에 인구 약 3백30만명의 서부아프리카에 위치한 라이베리아가 최근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요인으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내전이 평화적으로 종식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최근 몇 일전부터 유혈 사태로 바뀌어 미국의 개입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곡물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 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의 이름을 따 몬로비아라 이름 붙였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흑인 총독 조지프 젱킨스 로버츠(Joseph Jenkins Roberts)는 1847년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국경을 확장했다.
미국의 노예 후손들이 건설한 국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밀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베리아 고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라이베리아와 방위조약을 맺어 몬로비아에 도로, 국제공항, 심해항구를 건설해주었다.
1944-71년까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윌리엄 V.S. 터브먼(Tubman)이었으며 1980년 쿠데타로 그의 후계자가 축출되면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트루휘그당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시에 내륙에 사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의 오랜 정치적 지배도 끝났다. 그리고 80년 이후 라이베리아는 계속되는 정정불안을 겪게 되었고 끝없는 내전의 상황으로 정세는 변해갔다.
내전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1980년 도우(Doe)가 이끄는 구국평의회(PRC)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1989년 테일러(Taylor)가 라이베리아국민애국전선(NPEL)을 결성하고 도우 정권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내란의 종식을 위해 나이지리아, 가나, 기니, 감비아, 시에라리온이 참여하는 서아프리카제국경제공동체(ECOWAS)가 중재를 추진하여 1990년 분쟁 당사자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2년 10월부터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1996년 4월 반정부의 라이베리아민주통일전선(ULIMO)이 정부 경찰부대 및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ECOMOG)과 전투를 개시하였다. 1996년 7월 31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 각파와 평화협의가 열려 9월까지는 무장을 해제하고, 6-9개월 이내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1997년 7월 19일 7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1985년 이후 12년 만에 실시되어 상원 26명 하원 64명 등 90명이 선출되었으며, 대통령에는 75%의 득표율을 얻은 최대 군벌 지도자인 테일러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97년 국민들의 공포심에 편승해 새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그 후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그에 대항하는 반군이 99년 봉기, 라이베리아는 다시내전에 휩싸였고 반군은 라이베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테일러를 압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S)가 중재에 나서 지난 7월 6일 오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Monrovia) 국제 공황에서 나이지리아 대통령 오바산조와 라이베리아 대통령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두 사람의 90분간 회담을 가졌다. 회담 이후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로부터 떠날 것이라는데 합의했다고 발표하였으나 테일러가 미국의 군대 파견을 계속 요구하자 내전이 다시 발발하였다. 정부군은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방위에 나섰고 반군들은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시작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20여만명이 숨졌고 13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내전 발생의 원인
그러면 이와 같은 내전이 발생하게 된 원인들은 무엇일까? 크게 경제실패로 인한 정국혼란과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처음으로 쿠데타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라이베리아의 경제 문제였다.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악화상태에 놓였다. 아프리카에서 남아공, 이디오피아와 함께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지만 경제상황은 좋지 않았다. 라이베리아 경제는 농업 및 철광석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3을 차지하지만 전체 노동인구의 2/3 이상이 이에 종사하며, 주요환금작물로는 고무·커피·카카오 등이 있다. 그러나 1차산업의 경우 가격변동율이 워낙 커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메울 수 없었으며 이는 외국으로부터 외채를 도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차관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라이베리아는 주 수입원인 고무 농장과 플랜테이션 농업이 외국기업들에게 넘어가게 되고 정작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만성적인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인당 소득도 200달러도 채 되지 못하는 아프리카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외국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고무 산업의 경우 정부 다음으로 많은 고용을 창출해내며, 고무 수출이 라이베리아 GNP의 10%를 차지한다.
1980년의 쿠데타의 경우 경제악화가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를 승리로 이끈 인민구제평의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도 경제해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 채 1985년에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1980년 쿠데타를 이끌었던 라이베리아 전군 사령관 새뮤얼 K. 도우(Doe)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6년 취임함으로써 정국불안의 요소를 그대로 안고 갔다.
내전 발생의 두 번째 요인은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 돌아온 해방 노예의 후손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을 노예처럼 다스리며 이 땅을 지배하였다. 즉 미국에서 건너온 약 5%의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이 나머지 95%인 선주민들을 지배하는 정치적 구조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현재 라이베리아는 크게 16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 가장 큰 종족은 크펠레 족과 해안에 살고 있는 바사 족이다. 그밖에 기오 족, 크란 족, 바이 족, 그리고 이슬람교도인 말랑케 족이 있다.
1980년 쿠데타에 성공한 도(Samuel Doe)는 원주민인 크란(Krahn) 족으로 정권을 쥐었으나, 9년 후에는 다시 해방노예의 후예인 테일러가 혁명을 이끌고 도우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곧 종족으로 구성된 여러 파벌 간에 내란이 계속되었다.
내전 발생의 세 번째 요인으로서는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테일러가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 국가는 리비아와 시에라리온 반군이었다. 테일러는 리비아 카다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용해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으며 또한 시에라리온에서 불법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이를 국제 암시장에 팔아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이 다이아몬드의 불법 유통은 시에라리온에서도 내전이 계속적으로 벌어지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 특히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반군들에 대해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인근 국가들의 정정을 불안하게 만드는데 앞장섰다. 시에라리온에서는 다이아몬드 때문에 그의 반군은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음으로 시에라리온의 재판정은 그를 전쟁 범죄자로 기소하였다.
향후 전망
현재 라이베리아는 정부군과 반군들이 수도 몬로비아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군대를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파견하기를 원하며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서부아프리카 국가지도자들은 평화유지군이 배치되기 전에 테일러 대통령이 반드시 라이베리아를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 대통령은 이미 자신이 사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나이지리아로 망명을 것으로 예상) 대신 자신이 사임하기 전 먼저 평화유지군이 도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의 이와 같은 주장에 반군 단체들은 만약 테일러 대통령이 평화유지군을 기다린다면 외국 부대 주둔이 가져다 줄 안정감으로 인하여 결국 영원히 라이베리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현재 수도 몬로비아로 진군하여 정부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1천5백내지 2천명의 미군을 라이베리아에 파견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91년 소말리아 사태에서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이후 아프리카에서는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 코피안난이 밝혔듯이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만이 현 라이베리아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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