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의 아프리카에 대한 탐험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인해 개인별로 아프리카 내부로 진출하였다. 16세기 중반 몇몇 포르투칼인의 아프리카 내부의 탐험을 제외하고는 시민단체나 회사단체를 앞세운 유럽정부들은 19세기까지 내륙으로 거의 진출하지 못했으며 단지 해안을 따라 무역을 하였다. 탐험가들은 나일강, 콩고강 그리고 니제르강 등의 진원지를 알기 위한 탐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내부에 존재하는 인종과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1795년에 뭉고 파크(Mungo Park)는 프랑스 동료인 르네 까이에(Rene Caillie)와 함께 니제르강 중류와 상류를 탐험했다. 그러나 곧 1830년 클라프톤(H.Clapperton)과 랜드(R.Lander)는 니제르 강을 카누를 타고 탐험하였으며 니제르강에 있는 거대한 삼각주를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1850년대 바쓰(H.Barth) 박사는 사하라를 종단하였고 하우자랜드(Hauseland)와 니제르강을 탐험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 1850년대와 1860년대 버턴(R.Burton), 스피크(Spek) 그리고 그랜트(J.Grant)는 나일강의 진원지를 찾는 과정에서 그레이트 호수를 탐험하였다. 같은 시기 리빙스톤(Livingston)은 루알라바강과 잠베지강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였다.
1870년대에 스탠리(H.M.Stanley)는 콩고강과 루알라바강이 같은 강임을 발견하였다. 1900년까지의 그같은 탐험들은 거대한 아프리카 내부에 관한 보다 정확한 과학적, 지리학적 정보를 유럽인들에게 제공하였다.
노예무역의 종언과 함께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은 무역의 다른 항목들에서 대단히 많은 이익을 보여주었다. 탐험의 시기 유럽인들은 내부의 문화와 무역기회, 내륙 육상루터와 강을 통한 항해 등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일차적인 탐험의 목적을 넘어선 식민지 시대로의 예견이었다.
아프리카의 쟁탈은 아프리카 영토들을 획득하려 하거나 흑은 획득하여 통치하고 있는 영토들을 라이벌 세력으로부터 지키려고 하는 유럽 강대국들간의 경쟁을 말한다. 그같은 쟁탈전은 1880년 부터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 쟁탈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프리카는 이미 세네갈에서 부터 탄자니아에 이르는 해안지역이 여러 유럽세력들의 침입에 직면해 있었다. 내륙에는 이미 선교사와 탐험가들이 많은 아프리카 문화들과 접촉하였다. 초기와는 반대로 쟁탈은 빠르고 폭발적이었다. 유럽 강대국들은 서로를 의심하여 행동하였다. 각국은 라이벌 국가가 그 대륙에서 너무 많은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강대국의 세력균형(power of balance)이 무너질까 두려워하였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텍사스 땅의 3배규모(현 자이레) 지역을 개인이 확고히 통치한 이후 경쟁적으로 강화되었으며 베를린 회의(1884-85)을 가져왔다. 그 회의에서 경쟁의 원칙들이 동의되었고 영토 쟁탈은 주로 효과적인 영토점령의 문제점들과 연관되었다. 이디오파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는 1914년까지 유럽세력 하에 놓였다.
아프리카에 대한 쟁탈은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연장되었다. 아프리카에서 1차대전은 많은 이질적인 민족들을 외국 통치하로 가져왔으며 아프리카인들이 국가건설의 과정을 진척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국주의에 의해 설립된 국경선들은 오늘날 독립국가의 국경선이 되었으며 영토쟁탈의 결과로써 각 민족들이 싸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 국경선은 많은 인종들이 그들 인종들과 갈라져 다른 국가를 이루게 됨으로써 민족을 중심으로한 국가건설은 많은 국경정쟁을 야기시켰다. 소말리아의 대소말리아운동이 그 대표적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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