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내항한 최초의 유럽인은 1364∼65년의 프랑스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니라는 지명이 유럽지도에 최초로 기재된 것은 1350년 무렵이었다. 사료(史料)에 의해서 확인된 최초의 항해자는 1434년에 북위 26" 의 바하도르곶(率)을 남하한 포르투갈인(人) 질에아네스라고 한다. 교황(敎皇)이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서안의 영토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포르투갈인은 항해를 계속하여 디오고캄이 71년 적도(赤道)에 도달했고, 82년에는 콩고강 하구를 발견했으며 88년 바르돌로뮤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97년에는 바스코다가마가 회망봉을 우회해서 나탈에 도달하여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였다. 1494년의 스페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각각 독점적인 세력범위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6세기의 30년대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 덴마크 등 여러 나라의 항해가가 잇달아 아프리카 서해안에 내항하여 무역기지를 개설하였다. 이 항해 가들은 처음에는 모두 금을 찾아서 내항하였으나 선적(船積)할 가치가 있는 아프리카의 <산물>은 상아(象牙)와 노예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무역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고, 아시아 항로의 보급기지를 확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밖의 여러 나라 특히 영국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리한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남북아메리카의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무역을 세계적인 통상(通商)의 일환으로서 중요시하였다. 포르투갈은 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노예무역과 그리스도교 포교를 하는 한편 해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밖의 여러 나라는 1652년에 네덜란드가 케이프 식민지를 설치하였을 뿐 전혀 영토적인 야심을 갖지는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극도로 성황을 이룬 노예무역을 위한 성새(城塞)가 많이 구축되었으나 군인이나 무역업자가 성내(城內)에 체재하였을 뿐이고 유럽인은 성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아프리카인에게 노예사냥을 시켰다. 유럽인에게 노예를 매매하면 생활할 수 있게 되자 아프리카인들은 노동을 해서 생산을 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부족 대 부족, 부락 대 부락이 서로 습격하면서 포로로 잡힌 사람을 유럽인에게 팔아 넘기는 생활을 되풀이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문화를 지탱할 수 있는 생산은 할 수 없게 되고, 남아 있던 문화적 유산마저 불태우거나 파괴되어 버렸다. 아프리카인이 호전적(好戰的)이고 미개 ·야만적인 열등인종이라는 이미지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던 노예무역의 효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대서양안의 전체뿐만 아니라 인도양까지 파급되었다. 인도양 연안이나 중앙아프리카 및 서부 아프리카의 내륙에서는 아랍 노예상인에 의한 대규모 노예사냥이 자행되었다. 유럽인의 내항은 다시 유럽상품을 기니만 연안으로 가져오는 대신, 금이나 상아 등을 유럽으로 반출했기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 내륙의 대상(隊商) 루트를 통한 거래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상업에 의존해 왔던 내륙의 부족은 새로운 생활을 찾아 기니만 연안에 그 영토를 확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곳에서도 부족전쟁에 따른 파괴가 잇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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