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루드이권안,1888년 10월

africa club 2001. 11. 21. 15:29
루드이권안,1888년 10월
    모파트조약이 단지 남부로데지아에서의 B.S.A.사의 33년간의 지배를 원인제공한 일개 상업회사에 부여한 이권이었기 때문에 양 주권국가간의 조약은 없었다.  문서에는 그 회사가 단지 우호선언만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금광채굴에 대한 이권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이권안의 글자 그대로에 의하면 로벵굴라가 그의 왕국내에 있고 매장되어 있는 모든 금속과 광물에 대한 완전하고 독점적인 관리를 그 회사에 부여했으며 '그들이 그 금속과 광물을 채굴하여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들'을 이라는 아주 모호한 말로 이권을 양보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댓가로 로벵굴라는 100파운드의 월급여, 1,000정의 소총과 잠베지강의 군함 또는 500파운드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이권안에 대한 로벵굴라의 해석은 백인들이 와서는 금을 채굴한 다음에 가버릴것이라는 것이었다.  타티(Tati)금광에서는 이전에 이런식의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회사 사람들과 왕과의 대화시에 회사사람들이 조장한 해석이었다.  그러나 상세한 세부사항들이 무엇이 됐든간에 로벵굴라의 그 이권안에 대한 인식과 로즈가 그 이권안을 이용하려고 의도한 것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모순이 있었다.  로벵굴라에게 있어서 그 이권안과 그가 말로한 약속들은 그의 왕국내에서 백인들의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었다.  로드에게는 그 문서에 의한 이권안만이 유효했고 그 이권안은 마타벨레랜드와 마쇼나랜드를 회사의 지배에 개방하는 열쇄였다.
    로벵굴라는 곧 남아프리카의 신문들이 그 루드 이권안이 대규모의 광산경영과 백인들의 정착에 길을 열어주었다고 추측하며 그 이권안을 단호하게 확정하려는 백인이권소유자들의 압력과 그것의 수용을 거부하는 강력한 마타벨레족 파벌사이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로즈가 칙허장을 얻기 위해 교섭하고 있는 사이 로벵굴라와의 직접적 대결이 지연되었다.  한편 그 문서에 의한 이권안은 처음에는 보류되었다가 왕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왕은 그 후에 빅토리아 여왕에게 서한과 인두나(indunas)들을 보내어 영국정부의 말단에서 그 사건들을 관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소용이 없었다.  그 회사는 1889년 10월말에 칙허장을 획득했다.  그 칙허장은 루드이권안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 칙허장은 로벵굴라가 부여한 권리들 이외에 마타벨레랜드와 마쇼나랜드에서의 어떠한 권리들도 그 회사에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으로부터의 독점권과 행정기관을 설치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B.S.A.사는 이젠 적어도 로벵굴라의 영토일부를 점령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만약 로벵굴라가 완고하게 나가는 것이 입증되면 회사의 인력충원만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광산시굴과 광산경영을 위한 길을 닦아 놓기위해서 500명의 백인군대를 이끌고 불라와요(Bulawayo)에 쳐들어가 마타벨레랜드를 공격해서 왕권을 완전히 분쇄해 버리자는 비밀협정에 로즈와 두명의 재력있는 군인인 프랭크 존슨(Frank Johnson)과 모리스 히니(Mourice Heany)사이에 이루어졌다.  로벵굴라는 당면한 대결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해서 양보했다.  왕은 제임슨에게 왕국의 남부에서 광산을 시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남부지방에서 금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에는 마쇼나랜드에서 광산을 시굴하라는 대체허용도 제임슨에게 부여하였다.
    로벵굴라의 태도변화로 인하여 원래의 계획이 중지되고 오늘날의 솔즈 베리(하라레) 부근 햄프덴(Hampden)산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무장도로건설대를 파견한다는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그 명칭이 무엇이건간에 그 도로건설대는 마타벨레랜드 본토를 지나서 로벵굴라의 세력이 계절적 공격을 할때만 확장시키는 마쇼나랜드를 통과하게 된다.  이리하여 선봉대가 1890년 7월 마쇼나랜드에 입성하여 9월에는 솔즈베리 요새에 당도했다.  비록 로벵굴라는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한 시도에서 거의 모든 외교적 수단을 다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타벨레전쟁이 이제는 임박해 있었다.  영국인들의 마쇼나랜드점령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실체의 행로를 대단히 극명하게 밝혀주었고 그는 그것에 대해 더이상 아무것도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유명한 비유를 써서 그의 곤경스러운 입장을 헬름(Helm)이라는 선교사에게 요약해서 보냈다.:
    '귀하께서는 카멜레온이 파리를 나꿔채는 것을 보았소?  카멜레온은 파리의 속을 환히 들여다 보고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처음에는 한발 그 다음에는 다음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점잖게 앞으로 나아가곤 하죠.  마침내 파리가 가장 잘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을때 카멜레온이 그의 혀를 휙 쏘면 파리는 사라집니다.  영국은 카멜레온이고 나는 그 파리입니다.'
    그리고 1893년의 사건들은 그의 두려움을 정당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