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운동이전의 제저항운동과의 차이점

africa club 2001. 11. 21. 15:27
마지마지운동이전의 제저항운동과의 차이점
    마지마지운동은 세가지 면에서 이전의 능동적 저항과는 상이했다.  첫째로 이전의 19세기에 있었던 거의 모든 무장저항운동들은 조직이나 방법면에서 부족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마지운동은 많은 부족들에 의한 일치단결된 노력이었다.  그 운동은 근본적으로 전통적 전투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나 부족의 전통적 규범에 의거하여 선발된 지휘계통은 응가람베에서 주물에 의해 강화되었다.  다른 여러지역으로부터 온 지방의 지도자들이 함께 소집되어 모든 백인들의 추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하여 함께 싸웠다.  사람들이 투쟁하러 갔을때에는 킨지키틸레의 주물로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받은 것으로 믿어졌던 자신들의 지방지휘관들 휘하에서 싸웠다.  마지의 효과는 상당히 심리적이었다.
    둘째로 이전의 운동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독일의 즉각 개입이 뒤따랐다.  그 운동들은 통상 독일의 선제공격의 결과로 일어났다.  마지마지운동은 독일의 개입후 오랜만에 일어났고, 아프리카인들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났다.
    셋째, 모든 무장저항운동 중 마지마지운동은 전통적 신앙과 신세계에의 약속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전사들의 죽은 조상들은 부활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킨지키틸레는 독일의 폭압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해 내기위해 보내졌다.  이러한 초자연적 사물에의 기원과 주문은 투사들 사이에서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마지운동은 선지자의 종교적 메세지에 응하여 시작되었다.  백인들의 무기에 대한 마지의 마력은 종교적 신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마지운동이 8-9월기간동안  루피지계곡으로 확산됨에 따라서 여러선지자들이 그 운동을 다시금 이끌었다.  이 사람들은 자칭 홍고의 사자들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의식을 집행해 주기 위한 물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단결과 백인들의 무기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모든 흑인들이 백인들의 통치에 대항해서 봉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메세지는 천년왕국의 메세지, 즉 마법의 악령세계와 백인통치를 없애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지마지운동의 결과
    독일인들은 또다른 마지마지 저항을 피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인들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일부 개선안을 모색했기 때문에 좀더 과단성있는 정책이 뒤이어 나왔다.  투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대지로부터 백인들을 몰아낸다는 직접적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봉기는 독일 식민행정당국으로서는 고도의 식민정책 실행을 불러일으켰고 식민지의 미래에 관한 전면적 재고를 강요했다.
    독일 식민통치의 초창기에는 제부족의 반목, 자금부족과 식민통치에 있어서의 착오등으로 인하여 진척이 더디었다.  그러나 1907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개혁과 경제개발의 평화적 시기였다. 신임총독 레헨베르크(Rechenberg:1906-12)는 아프리카인들의 이해관계가 백인들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말아야 된다고 믿었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교육과 의료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결의가 단호했고 아프리카인 농업재배자들에게 이로움을 주기위한 목적으로 열대농업에 있어서의 과학발달을 육성했다.
    1914년까지 이루어진 경제적 발달은 정부의 직접적 원조와 장려에 많이 기인했다.  교통분야에서 정부가 비록 개인회사에 의해 운영되기는 했지만 두개의 철도중 하나를 건설했고 소유했다.  게다가 독일과 독일령 동부아프리카 식민지국가들간의 정기기선운항도 독일동아프리카 해운사에 대한 67,000파운드의 정부보조금을 지불함으로써 확고히 유지하게 되었다.  농업분야에서는 식민정부가 매년 10,000파운드를 지출했던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우삼바라(Usambara) 소재 아마니(Amani) 생물학 농업연구소가 재배자들을 지원해 주었다.  다레살람의 성장도 또한 개인기업들보다는 식민행정당국의 노력에 더 기인했다.  대형공공건물들과 신항구가 정부의 주도로 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