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Majimaji) 전쟁,1905-7

africa club 2001. 11. 21. 15:25
마지마지(Majimaji) 전쟁,1905-7
    마지마지전쟁의 원인들은 3가지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폰조덴(von Soden)의 면화계획, 아랍 아키다의 도래, 특히 마툼비(Matumbi)지역, 웅긴도(Ungindo)에서의 독일인들의 일반적 성격과 행동이 그 원인이다.

     a)면화계획
    동아프리카식민지를 통치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때문에 독일통치자들은 아프리카 를 환금작물 플랜테이션의 형태로 경제개발할 것을 강조했다.  식민지는 환금작물수출로 계속 이익을 얻은 한편 독일 산업계는 동부아프리카의 독일식민지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02년 폰 조덴총독은 식민지의 남부에 면화를 재배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독은 모든 '아키다'들에게 그들 휘하의 백성들이 와서 일할 수 있는 면화지구를 만들것을 명령했다.  면화가 판매됐을때 노동자들, 아키도, 매매조합들이 이익금의 3분의 1을 얻게 된다.
    다른 모든 점에서 적당한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이 계획은 참여한 사람들이 시달려야만 했던 고난으로 인하여 손상되었다.  면화플랜테이션에서 무자비하게 관리되는 작업은 마툼비사람들의 삶을 악몽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이 선정한 토지는 부적합했으며 작물도 흉작이었고 실제적으로 아무 이익도 얻지 못했다.  연말 급료는 약속된 이익의 3분의 1에 훨씬 못미쳤다.  자라모(Zaramo)족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첫해에 일한 댓가로 각각 받은 35센트를 거부했다.  면화지대의 마툼비족, 자라모족과 여타의 농민들은 넌덜머리가나서 독일인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b)아랍아키도들의 마툼비족 영토내로의 도래
    무익한 환금작물의 강제재배는 남부탄자니아에서 광법위하게 확산된 불만점이었으나 그것만이 유일한 불만점이 아니었다.  각 지역이 지역 나름대로의 수난을 겪고 있었다.  예컨데 마툼비족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을 감시하기위해 배치해놓은 아스카리들과 아키도들을 증오했다.
    그때까지도 마툼비족은 아랍인들이 마툼비족 영토내로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음으로써 아랍인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거부하였다.  마툼비족 사람들은 아랍인들의 노예무역 유행이 자신들에게 이로움을 주는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고 노예무역을 오랜기간 동안 거부했다.  그러나 탄자니아에서의 독일통치하에서 아랍인들은 아키다로서 고용되었고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히 해안지역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마툼비 영토내의 키바타(Kibata), 츄모(Chumo), 미테자(Miteja), 킨줌비(Kinjumbi)와 사망가(Samanga)에는 아랍인 아키다들이 주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력배치의 비극은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상업적, 정치적 노력들을 수년간 좌절시킨 종족들을 다스릴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아랍 아키도들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노예로 격하시켰다.  복수심이 충천했다.  아스카리들의 후원을 받는 아랍인 아키도들의 마툼비족 영토내에서의 행위는 격력한 봉기를 위한 매우 강력한 동기를 유발하였다.
     (c)독일인들의 성격과 행동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어서 독일인들은 비정하고 타인에 대한 동정, 도덕과 존경스러움을 결여했다.  아주 경미한 구실을 달아서 새로운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백성을 공개태형이나 심지어 처형에 처했다.  그들은 지나친 폭력적 방법으로 주택세를 부과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여타부족들과 함께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불평불만 말고도, 왕긴도(Wangindo)족의 주요한 불평은 독일인 용병들과 하우스보이들이 왕긴도족 남편들에게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감을 안겨주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부인들과 동침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의 행위는 왕긴도 부족사회에서는 범죄에 해당하는 최악의 간통유형에 해당하였다.  왕긴도 부족민들은 대안이 남아있지 않음을 느꼈고 독일인들에 맞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