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font color=red>[ 아프리카 역사 II ] - 식민지배</font>

africa club 2003. 9. 25. 19:37
3. 식민지배

3.1 식민주의 시대의 개막 베를린 회의

식민주의를 진보적이고 근대화를 위한 힘이었다고 종 종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식민주의는 사실 독재적이고 또한 거의 폭압적이었던 외국의 통치였다. 모순적이게도 아프리카 대륙의 점령과 분할이 일어난 시기는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원리들이 더욱 발전하던 시기였다.
1870년 무렵에는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점령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1884년에서 1885년 사이에 열린 베를린회의(Berlin Conference)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1885년을 식민주의 시대가 개막된 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회의에서는 아프리카 쟁탈을 합법화했고, 유럽의 열강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하자고 공식적으로 비준했다. 이 조약에서는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의 주권을 주장하기 전에 그 영토를 효과적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해방자라고 칭했지만, 점령의 과정은 거의 폭력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점령은 주로 용병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들과 고용주들이 부유해지는 것 뿐이었다.

유럽과 아프리카간의 본질적인 관계는 노예무역의 폐지와 공산품 수출의 확산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은 비서구 세계와 교역을 강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아프리카와 후진국으로 알려져 있던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한 것은 주요 산업 국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 욕구 때문이었다.

유럽인들은 우세한 기술적 군사적 힘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점령할 수 있었는데, 식민화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민족주의적 경쟁과 힘의 균형, 그리고 국가의 영광을 위한 행보와 같은 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식민지를 더욱 더 원하게 되었다. 또한 제국주의 역시 주요 산업 열강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장과 천연자원의 산지를 차지하여 지배하고 싶게 만들었다. 이런 지역들은 유럽인들이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고 생각하는 곳이었다. 많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은 아프리카 제국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아시아를 소유하여 유지하고 개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3.2 아프리카의 분할

유럽의 주도적인 군사적 산업적 국가였던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가치있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의 자극을 받은 프랑스도 1870~1871년에 벌어진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프로이센의 지도 하에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역자주)에서 독일에게 잃은 알사스-로렌 지방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독일은 독일 동부 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 현재의 탄자니아-역자주), 남서 아프리카(South-West Africa: 현재의 나미비아-역자주), 토고(Togo), 카메룬(Cameroon) 등에 식민지를 세워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이 지역들을 모두 잃게 되었다. 영국의 가까운 우방이자 아프리카와 가장 긴 역사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기니아(Guinea)에서 더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의 노력으로 식민 열강이 되었는데, 1908년에 벨기에령 콩고(현재의 자이레)가 된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을 세웠다.

이탈리아는 리비아와 소말리아에 식민지를 세웠고, 스페인은 스페인령 사하라와 적도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차지했다. 식민지 시대에 주권을 유지한 아프리카 국가는 오직 두 나라 뿐이었는데, 바로 에티오피아와 라이베이라이다. 라이베이라는 1821년에 해방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세운 국가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마저도 193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지배 하에서 상당 기간 독립을 빼앗겼다.

알제리, 세네갈, 앙골라의 포르투갈인 거주지, 모잠비크, 기니아와 영국인들이 지배하는 케이프 식민지에 밀려 내륙으로 간 아프리카너(Afrikaner)들이 자신들의 독립 공화국을 세운 남아프리카공화국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대륙은 1880년대까지는 독립을 유지했었다.

식민지배시기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를 산산히 부서뜨렸다. 비록 식민 지배가 궁극적으로는 노예제 폐지를 가져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자치가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지배계층이나 일반 대중이나 똑같이 정치적 시민적 권리가 거의 없는 지배 대상으로 전락했으며, 외국인들이 경제를 주도함으로써 그들의 문화적 권위와 가치는 하락하고 손상되었다.


3.3 아프리카인의 대응

식민주의와 이에 수반된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반응은 주로 새로운 민족적, 성적, 계급적 관계를 이끌었다.

민족성은 사회적 단결을 표현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힘이 되었다. 예를 들어, 도시 지역에서는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이 생겨났다. 예전에는 흩어져 있던 자치 공동체들이 언어적 유사성을 매개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채택한 다른 예를 아프리카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의 이보(Igbo)족과 세네갈의 디올라(Diola)족이 이와 동일한 과정을 겪었다. 이보족의 정체성은 그들이 도시 지역이나 나이지리아의 다른 지역, 혹은 해외로 유학을 떠날 때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은 민족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라고스(Lagos)를 비롯한 다른 나이지리아 도시에 다양한 자발적 협력 조직과 민족동맹을 만들었고, 신분 상승을 위해 교육을 강조하였다.

식민 정책이 가부장적 권위를 강화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성의 지위는 식민 시기 동안 계속 낮아졌다. 식민 시기 이전에는, 예를 들어, 시에라리온의 멘데(Mende)족의 경우와 같이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 여성들이 추장이 된 적도 있었다. 또한 북부 로데지아(Northern Rhodesia: 현재의 잠비아-역자주)의 통가(Tonga)족에서는 부락의 지도자가 여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요루바랜드(Yorubaland)의 이야로드(Iyalode)족에서는 여성 관리가 있어서 남성 주도의 정치회의에서 여성의 관심사를 대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 지배 하에서 유럽인들의 경험에만 기초하여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백인 관리들은 항상 전적으로 남성의 전통적 권위를 통해 일을 하려 했다.
식민 지배는 식민지 이전 시대의 다른 사회 관계도 붕괴시켰다. 세네갈에서는 월로프(Wolof)국의 패배로 전사 계급이 폐지되었고, 전사들은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었던 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3.4 식민지배의 논리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지배 방법이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체제, 즉 기술적으로 진보한 소수의 외국인이 다수의 원주민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강제로 지배한 체제였다. 식민주의는 제도를 통해, 식민 지배를 하는 자신들은 우등한 쪽이고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프리카인들은 열등하다는 이론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아프리카의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배경의 대부분은 다윈(Darwin), 스펜서(Spencer), 모건(Morgan),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역사발전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국가(또는 주)의 구조와 산업적 자본주의 체제를 가진 사회가 인간이 만든 가장 진보적인 형태의 조직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인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이 낮은 수준의 문명을 점령하여 세계의 곳곳에 번영과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옳은 일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백인의 십자가"라는 문구로 표현되거나 프랑스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명의 의무"라고 표현되는 이러한 주장들은 백인종의 생물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차별적 이론을 더 강화하였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지상의 저주받은 사람들(The Wretched of the Earth)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식민주의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며 식민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원주민에 대한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묘사했다. 마치 식민지 착취의 전체주의적 특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 듯,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을 악의 전형으로 색칠해놓는다. (...) 원주민들은 윤리에 둔감하다고 여겨진다. 원주민들은 가치관의 부재를 넘어 가치관을 부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문화는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일부 경우에 있어, 이러한 전통은 아프리카인들의 후진성과 근대화되기 힘든 성질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분수를 알고 자신의 전통을 지키며 유럽인들처럼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 전통적인 아프리카인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원하고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위해 선동된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부족적 전통을 잃어버린 뿌리도 없는 문제아들로 취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