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41

아프리카역사

5.1 식민지 시대 1) 아프리카 분할 1870년대의 제국주의가(帝國主義家)에 들어선 유럽열강은 공업제품시장과 원료 공급원을 찾아서 아프리카를 분할해갔다. 그러나 이전까지 상인이나 선교사들의 활동에만 맡겨졌던 아프리카 개발은 국가적 사업이 되고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점거하여 19세기 말부터 20여년 동안 서구열강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획득경쟁이 최고조에 달했다. 먼저 서부아프리카에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말 신흥제국들인 독일, 벨기에, 포르트갈 등과 함께 중부, 동부, 남부아프리카에서 본격적인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식민지획득은 주로 무력에 의해 행해졌으며 간혹 정복이외에 족장이나 추장들과의 계약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말에 이미 모든 아..

아프리카역사 4

4. 전도·탐험의 시대 노예무역의 폐지와 함께 유럽 각국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미개인'으로 생각해왔던 아프리카인에게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전하고, 동시에 유럽문명을 전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대륙으로 들어갔다. 16세기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은 동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한 적은 있었으나 포르투갈인들이 축출당한 이후 17세기와 18세기에는 지속적인 선교사의 파견이 중단되었다. 17세기 중반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해 주도된 복음 전도 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원리를 재인식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선교단체들이 결성됨으로써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비인도주의적인 노예무역의 종식에 앞장섰으며 18세기 말엽 부터는 개신교 선교단체들이 출현..

아프리카역사 3

3. 노예무역시대 15세기 유럽인의 대항해시대 개막은 종래부터 있어왔던, 북아프리카로부터 사하라사막을 넘는 교역과 인도양을 통한 동아프리카의 아랍인 교역대신, 그들이 아프리카해안부와 접촉할 기회를 가져왔다. 개막 당시 유럽인의 목적은 동인도와의 향료무역(香料貿易)이었으며, 아프리카해안선은 단순히 원양향해를 위한 보급기지로서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대륙이 발견되고 그곳의 광산개발과 사탕수수·담배·인디고(염료) 등의 플렌테이션이 진전됨에 따라 노동력으로서의 아프리카인 노예의 가치가 올라가고 포르투갈·에스파냐를 비롯하여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유럽 여러 나라가 대서양노예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18세기에는 서인도제도에 대한 노예수출, 서인도제도로부터 유럽으로 열대산물의 수출, 그것을 받아들여 가..

아프리카역사 2-2

2.2 고대 아프리카 여러 왕국의 흥망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왕국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BC 10세기 무렵 이집트 남쪽에서 일어난 쿠시왕국이다. 나일강 종류의 나파타가 수도였던 이 왕국은 고대이집트왕조가 쇠퇴함을 틈타 이집트를 정보하고 제25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BC 667년에 아시리아군의 침입을 받아 남방 메로웨로 도읍을 옮기고 메로웨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인도양에 이르는 교역 루트와 제철기술로 번성했으며, 독자적인 메고웨문자를 발명했다. 그 문화는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큰 구조물을 많이 건설했다. 그러나 기원 전후에 로마군의 침략을 받고 또 BC 350년에는 교역 루트를 장악한 악숨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악숨왕국은 현재의 에티오피아의 전신으로, 아라비아반도와 강한 ..

아프리카역사 2-1

2.1. 인류의 아프리카 최근 고고학 성과에 의하면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매우 유력하게 보인다. 그 근거로서 영국의 고고학자 L.리키박사 부부가 탄자니아 북서부 올드바이계곡에서 발견한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 화석을 들 수 있다. 이 화석은 약 18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직립 보행했고 조제석기(粗製石器)를 사용했던 사람과(科)라 한다. 다시 케냐 북부에서 발굴된 화석은 약 1400만년이나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화석이 현재의 아프리카인 조상과 직접 관계가 있는지는 현 단계에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인류가 계속 살아왔다는 것은 에티오피아나 케냐 그 밖의 여러 곳에서 호모사피엔스 즉 현생인류의 조상 인골이 발견된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 즉 직립보행인인 현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

아프리카역사 2

II. 아프리카 역사 영국의 아프리카 역사가 흡킨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1960년이 (아프리카 독립의 해) 이전의 식민지시대 유럽인의 아프리카관(觀)은 아프리카를 자연이나 인간의 낙원으로 보는 (메리 아프리카) 또는 원시적이고 미개하다고 보는 (프리미티브 아프리카)의 두 극단의 (신화)로 채색되어 있었으며 그곳에 사는 아프리카인이 주체가 된 참된 의미의 역사는 쓰여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독립을 달성하고 모든 면에서 아프리카인화가 이루어져 감에 따라 역사연구 분야에서도 종래의 (신화)를 분쇄하고, 유럽인 대신 아프리카인사가가 주체적으로 역사를 쓰려는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한 경향이 확대되면서 종래의 유럽인 중심 사관의 역사가 서서히 개정되어가고 있다. 아프리카 역사는 대륙의 자연 환경의 다양성만큼 그 ..

아프리카 역사 - 서론

. 서 론 흔히 아프리카 하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기아와 질병 그리고 아주 가난한 국가들로 형성된 대륙이라는 편협된 인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아프리카 대륙은 그 지리적 중요성이나 무한한 개발의 잠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편견의 주 요인은 아프리카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지식의 부재에서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화의 '상대성'(相對性)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20세기의 현대인들도 '아프리카대륙에도 과연 역사가 있는가 아니면 조금 양보하여, 있다 하더라도 서구의 문화에 비해 얼마나 유치하고 열등한가'라는 생각을 무의식중 하게된다. 특히 아프리카역사는 그동안 서구역사학자들의 식민사관적 입장으로 바라본 인식으로 인해 아프리카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

역사적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14

14) 빈곤의 위기 금세기 말에서 살펴보면 대부분의 아프리카에 대한 일반적 전망, 무엇 보다도 사헬지역과 적도지역은 고통스럽고 처량하게 보인다. 사헬지대, 에티오피아, 수단, 챠드 그리고 말리에서 두더러진 주기적인 가뭄은 무자비한 죽음의 희생과 세계경제 침체로 부터 온 경제전망 악화로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개발'의 잘못된 정책, 제도적 안정화의 붕괴로 인한 '원조' 사용의 잘못과 어떤 효율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제도적 능력의 붕괴, 은 통치 단체들의 무책임성 혹은 군사 지도자들의 헛된 출세주의와 함께 결부되어 있다. 1984년까지 그들 자신들의 소비를 위한 식량의 1인당 생산량은 , 공식적 추정에 따르면, 1960-65년 시장에 나온 평균 생산량의 7..

역사적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13

13) 남아공에서의 문제점들 남아공 內에서의 분규의 가속화는 아파르테이트 체계의 제거에 대한 대중적 요구에 정부의 거절을 수반하였다. 1985년까지 그것은 요하네스버그와 같은 '백인' 대도시들의 교외에 있는 주요 흑인 '지역'을 흑인 거주민들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를 허용하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정부 통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한 남아공 무장 군인들과 군대들에 의한 완고한 노력들은 때때로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의 구성원들과 ANC의 무장 단체들과 같은 아프리카인 저항 단체들에게 생명의 손실을 입히는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다. 반면, 도시에서 직업과 의무들을 아파르테이트 정권에 봉사하기로 동의한 흑인들은 ..

역사적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12

12) '전선(戰線)' 분쟁 1980년대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양한 반대 경향들이 평화 혹은 분쟁을 만들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남부 도처와 대부분의 중부 아프리카에서는 백인 소수 집단들 사이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잠재적 긴장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최고 수단을 보증해 주었으며 대다수 민족주의자의 운동단체들과 정부들은 대립의 위협에 도달하였다. 여러 요소들이 이것을 증명하였다. 가혹하게 남아있는 이것들 중의 하나는 아파트하이드(차별정책)의 구조가 깊게 뿌리박혀 있는 남아공 정권에서 볼 수 있으며 이 노력들의 일부분으로써 이미 대규모 군사력을 계속적으로 강화시켜 왔다. 1974년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붕괴에 따라 남아공 군사지출 비용은 일차적으로 남아공 외부와의 전쟁을 목적으로 값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