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역사적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12

africa club 2001. 10. 19. 13:48
12) '전선(戰線)' 분쟁

1980년대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양한 반대 경향들이 평화 혹은 분쟁을 만들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남부 도처와 대부분의 중부 아프리카에서는 백인 소수 집단들 사이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잠재적 긴장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최고 수단을 보증해 주었으며 대다수 민족주의자의 운동단체들과 정부들은 대립의 위협에 도달하였다.  여러 요소들이 이것을 증명하였다.  가혹하게 남아있는 이것들 중의 하나는 아파트하이드(차별정책)의 구조가 깊게 뿌리박혀 있는 남아공 정권에서 볼 수 있으며 이 노력들의 일부분으로써 이미 대규모 군사력을 계속적으로 강화시켜 왔다.  1974년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붕괴에 따라 남아공 군사지출 비용은 일차적으로 남아공 외부와의 전쟁을 목적으로 값비싼 대규모 파괴무기와 첨단무기들을 계속적으로 증가시켰다.
이 계속된 재무장은 백인들의 광범위한 무장화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때때로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관련되었으며 보어전쟁이후 흑인들의 개발을 계획하지 않았던 흑인들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새롭게 등장시켰다.  차별정책의 비타협적인 자긍심에서 남아공 정부는 차별정책의 목적들이 다른 수단들에 의해 달성되지 않았을 때에도 무력 사용의 책임이 절대적으로 확고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외부 관찰자들에 의하면, 차별정책의 자세는 계속적으로 공격적임이 나타나고 있다.
북부에 있는 흑인정권들은 그들 스스로 침략 혹은 협박아래 있음을 느꼈으며 그들은 남아공 정부가 로데지아의 백인 소수 정권의 실체를 보호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공포에 싸여있다.  동시에 1975년과 76년 앙골라의 새로운 정권 파괴를 목적으로 앙골라에 침입하여 나미비아의 안전한 독립에 대한 UN의 시도들을 정면으로 거절했다.  반작용에 대한 두번째 요소로, 탄자니아,보츠와나,잠비아의 새로운 지도자들과 모잠비크와 앙골라 지도자들 사이에 현재 진척되고 있는 공동보조의 증가에 있다.  이 전선(Front-Line) 대표들의 비공식적 다섯 대표들의 회의는 그들의 남부에 있는 국가들의 민주화를 조장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주국방에 대한 확고한 수단들을 위해 개최되었다.  평화스러운 타협에 대한 희망은 불법적인 로데지아 정권이 1976년 UN 압력에 대해 명백히 받아들인다는 것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의 결과로는 2년내에 다수당 통치에게 넘겨준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요구를 제네바에 참여한 정당들의 무의미한 회담과 로데지아 정권의 완고한 태도로 실패하였다.  반면, 대규모 게릴라전은 짐바브웨(로데지아) 독립 단체들,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연맹(ZANU) 그리고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연맹(ZAPU) 등은 동맹에는 느슨했지만 애국전선(PE: 이것은 1978년에 결성되었는데 대부분 농촌지역에 스며들었으며 농촌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등에 의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위와같이 '내부해결'은 흑인 3에 백인1의 구성원들로 구성되었던 국회에 대한 새로운 헌법 수정 제의를 몇몇 반대 아프리카인의 동맹들과 함께 백인 정권에 의해 진척되었다.  진정한 독립의 전망을 막고 있음으로써 PT에 의해 거절된 이 '내부해결'은 급속히 구식화 되었다.  잠비아 루사카에서 열린 영연방회의에서 민주적인 해결을 위한 새로운 조치들이 시도되었다.  이것들은 1979년말 런던에서 영국정부에 의해 소집된 회의 결과들을 더 진척시키는 것이었다.  두 당들 사이의 오랜 협상이후 동의안이 전쟁의 종결 뿐만 아니라 국회의 백인 소수 종결을 가져왔다.  새로운 선거의 공표로 분쟁에 참여한 모든 당들이 이에 동의하였다.  잠정적으로 영국이 2월에 있을 보통선거의 방법을 준비하기 위해 1980년초 완전한 식민통치를 다시 떠맡았으며 선거로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가 이끄는 ZANU-PT의 압도적인 다수당의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해 4월 짐바브웨 공화국을 설립하였다.
이것들은 국민들의 관심을 성취하는 가치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곧 남부 아프리카의 평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군사적 침입의 수단으로, 새롭게 독립한 앙골라 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1975-76년의 시도가 좌절됨으로써 프레토리아 정부는 1978년 앙골라 남부를 폭격하고 침입을 재개하였다.  처음에 이것은 나미비아 전선 북부에 있는 나미비아 게릴라 - 나미비아의 남서 아프리카 인민조직(SWAPO)으로 남아공으로부터 나미비아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 의 끈질긴 추격이었다고 프레토리아가 발표함으로써 이것을 정당화하였다.  이 주장은 그것이 간단한 공격이었으나 빈번한 공격은 분명하게 학교, 병원, 통신 그리고 소규모 마을과 같은 순수 민간인들을 목표로 파괴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같은 불안정화 요소들은 남아공 군인들의 직접적 무력사용을 통해 앙골라 항구와 철도의 파괴로 이어졌으며 프레토리아는 다음으로 직접적인 전복으로 행했다.  새로운 남부 앙골라 공화국 설립시도, 즉 그 나라 일부분인 쿠안도-쿠반고(Cuando-Cubango)와 같은 주들을 분리하려는 시도, 는 앙골라 군대들에 의해 좌절되었으나 UNITA(조나서 사빔비가 지도자로 있는 단체로 1975년 이전까지는 포르투갈 군대에 의존했으나 그후 프레토리아의 지원을 받고있다)라고 알려진 무장 단체에 프레토리아 정부는 무기와 자금의 공급을 대규모로 확대하였다.  더구나 1980년 이래 사빔비는 수많은 서구세력들로부터 활동지원을 의존할 수 있었는데, 특히 앙골라 정부와 쿠바의 군사적 원조에 강한 적의심을 가지고 있는 레이건 행정부의 미국으로 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87년까지 앙골라 정부는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압력아래에 있었으나 프레토리아의 다양한 공격 형태들은 어떠한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1980년대 말의 프레토리아 정책 촉진의 사고는 나미비아의 독립을 진척시켰다.  미국의 후원하에 프레토리아는 앙골라로 부터 쿠바군의 철수가 그같은 진전이 달려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쿠바는 앙골라 정부가 철수를 요구할 때는 언제든지 그들의 군대가 철수할 수 있음을 대답하였다.  반면, 앙골라 정부는 그같은 철수가 남아공 군인들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이든지 혹은 UNITA 침입군들에 의해서던지 남아공의 공격 중단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1974-75년 포르투갈 식민지와 군사력 붕괴의 결과물들을 역전시키는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지역에서 사실상의 헤게모니를 프레토리아 以前으로 복원시키는 다양한 시도들은 1980년대 이후 모잠비크에 대항한 행동에 의해 그리고 자신들의 주권을 위한 짐바브웨의 접근을 만들었다.  다시말하면, 프레토리아의 공격들은 현재 아파트하이드에 대항하여 무쟁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모잠비크의 시설 지원을 받고 있는 남아공의 아프리카 민족의회(ANC) 주장들과 함께 정당시 하고 있다.  앙골라와 마찬가지로 한때 이 한정된 목적들은 다양한 기원의 요소들로 구성된 반대단체들의 주요 투쟁능력 강화로 급속히 착수되었으나 프렐리모(Frelimo) 정권의 정책적 실수들과 시설물 폭발 등으로 모잠비크 민족 저항단체(MNR 또한 Renemo로 알려져 있다)와 같은 남아공 지원을 받은 단체들은 1987년 기간 동안 넓은 농촌지역 통제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베이라(Beira)와 수도 마푸토(Maputo)와 같은 주요 도시들의 안보를 위협하기 조차 하였다.  앙골라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독립한 모잠비크는 그같은 상태로 계속 남아있었으나 몹시 괴롭힘을 당했으며 어떠한 물질적 진전의 가능성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8년초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의 권력의 내부균형의 변화전망은 거의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남아공이 추진하는 테러리즘에 대한 지역적인 반응에서 모잠비크 군대들은 이웃 탄자니아와 짐바브웨 국가들로 부터 군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 합동군사 노력은 많은 상실한 영토들을 되찾았으며 특히 짐바브웨의 국경과 모잠비크 베이라 항구를 연계시켜 주는 '회랑'(corridor)을 회복하였다.  르네모와 마찬 가지로 앙골라에서의 반정부 단체인 UNITA는 그것의 군사적 지위를 개선하는데 실패했으며 남동부 앙골라에 있는 마빙가(Mavinga)의 중요한 기지를 손실하였다.  UNITA의 작전은 직접적인 남아공의 공군과 육군의 지원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들은 1988년 12월에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공군과 지상에서의 강력한 쿠바군의 지원과 함께 앙골라 군대는 9천명으로 추정되는 남아공 침입군을 무력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쿠이토 카나발레(Cuito Canavale)의 전략적 중심 외부로 침략군을 패배시켰다.  패배한후, 남아공 군대는 앙골라-나미비아 국경선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부에 남아공군의 일부가 포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쿠바의 우세한 공군력 때문에 이 군대들은 구출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군사적 붕괴는 남아공이 평화를 제의하도록 만들었다.
복잡한 협상이 계속되었다.  남아공은 앙골라군에 포위된 잔류병들의 철수를 허용받았으며 분쟁종말의 전망이 보였다.  그러나 UNITA에 대한 작전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게 남아있다.  이 반군들은 앙골라와 나미비아 사이에 있는 전선의 긴 부분들에서 남아공에 의해 통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직 레이건 행정부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UNITA에 대한 모든 적절하고 효율적인 원조를 미국의 부시 대통령 행정부가 계속해서 제공할 의도를 가지고 있던 1989년 초에 나타났다.  이것의 착수가 앙골라 내부에서 내전을 연장시킬 의도였던지 혹은 앞으로 남아있는 '체면을 세울'작전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도로 파괴적인 군사작전은 1990년초 앙골라에서 계속되었다.  이것들은 UNITA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재정적 지원과 함께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이유를 지니면서도 지원은 계속되었다.  반면, 남아공의 UNITA에 대한 지원은 적어도 규모에 있어서는 감소되었으나 1990년대초 앙골라 정부군 공격은 마빙가의 UNITA기지의 통제를 확보하게 했다.
앙골라, 쿠바 그리고 남아공의 3자 협상(미국과 소련은 비공식적 참가)들은 또한 나미비아의 장래에 관심을 가졌다.  1988년 12월 공식적 조약체결의 조건 아래 쿠바군대들은 1989년에 시작하여 1991년까지 완료된 앙골라로 부터 단계적 철수를 하였다.  1989년 부터 효력을 가지는 유엔 안전보장 결의 435항에 대한 남아공의 동의는 남아공 군대들이 철수를 시작하고 나미비아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이끄는 것이다.  이 목표들에 대한 진척은 일반적으로 순조롭게 되었다.  1989년 10월까지 대부분의 나미비아 정치 피난민들이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11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다음달에 헌법인준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1990년 3월 나미비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정치적 불안정은 1990년대와 2000년대로 넘어서면서도 계속되고 있다.  2001년 1월 16일에는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로랑 카빌라 대통령이 그의 경호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국제사회는 이로 인해 앙골라, 짐바브웨,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 등 주변 6개국이 얽혀 복잡하게 진행돼 온 콩고 민주공화국 내전이 악화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카빌라는 1997년 32년간 장기 집권한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 전 대통령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집권했다. 반군 세력인 '콩고-자이르 해방민주세력연합' (ADFL) 의장이었던 그는 대통령에 취임해 자이르란 국명을 현재의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바꾸고 개혁을 표방했으나 그 역시 철권통치와 부패로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집권한 카빌라는 반군 시절 반 모부투 투쟁의 동지였던 투치족을 탄압함으로써 내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투치족은 카빌라의 권력 독점에 반발, 98년 콩고민주화운동(RCD) 을 결성하고 무장투쟁을 선언해 내전이 재발했다.
내전이 종족 분쟁의 성격을 띠자 르완다와 우간다 등 인접국들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둘러싼 이권 다툼이 더해지면서 더욱 복잡하게 얽혔다. 콩고 민주공화국의 다이아몬드 연간 산출량은 약 6백만캐럿으로 국제가격으로 15억달러(약 1조8천억원) 에 이른다. 카빌라는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짐바브웨. 앙골라 등에 넘겨주는 대가로 군사 지원을 받았으며 반군들의 활동 자금도 다이아몬드를 밀수출한 돈이다.
이처럼 아프리카는 매년 쿠데타 등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같은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함으로써 만성적인 가난에 직면하고 있다.  콩고 민주공화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다이아몬드, 구리, 금 등의 지하자원이 세계적인 수준이고 영토 또한 한반도의 10배가 넘지만 1인당 GNP는 300달러 미만이다.
아프리카의 쿠데타 등으로 인한 정치불안은 콩고 민주공화국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전세계 민족. 종교분쟁의 3분의1 이상이 이곳에서 벌어졌으며 현재도 아프리카 54개국의 절반 가량이 분쟁에 휩싸여 있다.
유혈분쟁이 빈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지배를 시작한 이후 자국의 편의 만을 따져 무원칙하게 영토를 분할했기 때문이다.  종족들의 생활터전을 무시한 이 경계가 독립 후 국경선으로 굳어짐에 따라 같은 종족이 여러 나라로 나누어지거나 서로 적대적인 종족들이 한 나라에서 같이 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열강들은 통치 편의를 위해 식민지배에 우호적인 부족에게 특권을 줘 적대적인 부족을 억누르게 하는 등 종족, 부족간 분리, 차별 정책을 펴 종족간의 증오심을 더욱 키웠다. 아프리카의 분쟁이 대부분 인종 학살과 보복 학살이라는 악순환에 휘말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르완다와 브룬디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이 충돌해 대량 학살로 이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케냐에서도 대통령을 배출한 카렌진족이 다른 종족을 억압해 갈등을 빚었다.
석유, 광물 등 풍부한 지하자원의 종족간 배분 문제도 유혈분쟁의 한 원인이다. 나이지리아의 종족 분쟁과 이번에 카빌라 대통령이 살해된 콩고 민주공화국 내전은 석유와 광물이 분쟁의 주요 요인이다.
그럼에도 유엔이나 미국 등 국제사회는 아프리카의 분쟁 해결에는 별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가 냉전이후 그들의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지고 경제적으로 아프리카의 역할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떠나 인도적인 입장에서 아프리카를 살펴본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