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역사적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11

africa club 2001. 10. 19. 13:47
11) 재(再)탄생을 위한 탐구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현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말하면, 그것은 '발전'의 총체적 개념위에 밀접히 관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사회들이나 혹은 국가들이 '저개발' 혹은 '미개발'로써 간주되는 곳은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구조내에서 오랜 기간동안 지속적인 발전의 산물들을 가져왔다.  그들은 단지 아주 다른 역사에서 나타난 아주 다른 구조들과 관련된 '저발전'과 '미개발'이 있었을 뿐이다.  다른 노선을 따라 발전하였기 때문에 - 농촌 농업으로 부터 도시 상업화 기반으로 그들의 변형을 만들기 위한, 그러므로서 발전이론의 의미에서 현대적 산업의 '도약'을 성취하고 접근하기 위해 -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의 노선을 다시 찾아야 했으며 새로운 체계의 건설과 부합되는 제도들을 착수하는 그와같은 일들이 있어야만 했다.
  많은 예들이 그같은 지적을 분명히 다루고 있다.  단지 1975년에서야 독립한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인 앙골라에서는 1960년대말 천연자원과 인프라스트럭춰의 개발에 대한 많은 새로운 투자들이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경제적 성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프리카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개발과는 거리가 먼 경제적 성장이었는데 왜냐하면, 아프리카 국민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개발에도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전없는 성장과는 약간 구별되는 앙골라에서의 진정한 발전은 새로운 사회체계에 의존해야 했으며 식민통치의 종결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 경제적 구조들의 성장을 가져오게 하였다.  새롭게 독립한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비슷했다.  약간의 정도에 따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역사적 노선을 다시 되찾았다.  이 과업들은 계속되었으며 그것의 영향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 요인 등이 있었는데 긍정적 요인으로는 새로운 제도들의 안정화를 성취하고 보다 효율적인 정치적 경제적 생활에서의 고유한 구조들을 만들기 위한 노력들에서 그리고 부정적 요인으로는 많은 혼란들과 정부의 갑작스런 변동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반전에서 오는 요인들이 있었다.
1974년 이디오피아 황제의 축출이 있은 후 아프리카 뿔지역에서는 그같은 혼란들이 급증하였다.  새로운 이디오피아 정권은 이디오피아 사회에서 광범위한 구조적 변형들을 요구하였으며 가장 중요한 전통적 토지 소유의 계급을 타파한 급진적 토지개혁을 가져오는 등 여러가지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권은 곧 그것의 문제점들에 직면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동부지역(주로 오가덴)에서의 많은 소말리아 소수민족의 자결권 요구에 대한, 그리고 북부지역(1962년 이디오피아 황제체제 안에 완전히 소속되었던)에 있는 에리트리아 대다수 국민들의 자치권 요구에 의해 제시된 불화의 주요 문제점들을 배려하는데 실패하였다.  이웃 소말리아 공화국으로 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은 무장세력인 서부 소말리아 해방전선(SWLF)의 오가덴 지역에서의 자치권 획득을 위한 전쟁이 1976-77년에 있었다.  이것은 급격히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소련무기(탱크와 공군기를 포함)와 쿠바군대의 증강이 있은 후 이디오피아 군인들이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디오피아 통제는 형식적으로 회복되었으나 게릴라전은 계속되었다.  동시에, 똑같은 방법으로, 이디오피아 군인들은 에리트리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에리트리아 회복운동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공격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룩하는데 계속적으로 실패하였으며 민간인들 뿐만 아니라 군사적 생활들에 대한 그들의 비용은 기아와 질병의 결과물들을 가져와서 아주 비싼 댓가를 치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들은 이디오피아의 군사적 점령을 계속하는데 강력한 에리트리아 저항을 가져왔다.  1983년까지 분리되어 있던 에리트리아 민족운동단체는 수년전 젊은 민족운동단체의 베트랑들에 의해 설립된 에리트리아 인민해방 전선 (EPLF) 內로의 효율적인 연합이 있었다.  이 새로운 지도자들의 세대들은 에리트리아 반식민 게릴라 투쟁들을 시작한 초기 에리트리아 해방전선(ELF, 1962년에 설립) 내의 '구식'의 에리트리아 지도력에 대한 불만 등 잠재적인 요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파벌주의와 내부 불만을 극복하기 위해 EPLF는 아프리카 인민해방군(EPLA)의 군사적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효율적인 내부 응집력을 급속히 이끌어 나갔다.
1985년과 1987년에 에리트리아 군대들의 중요 승전들이 따름에 따라 EPLA는 1988년 3월 아파베트(Afabet) 근처 도시에 있던 이디오피아 군대들을 완전히 참패시켰고 이디오피아군 1만8천명 이상을 죽이거나 생포하였으며 많은 탱크와 총들을 노획하였다.  이 승리가 있은 한달 후 EPLF는 에리트리아 전지역을 거의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나머지 주요 세도시(아스마라,케렌 그리고 마사와)와 남부의 앗사브 근접지역도 포위하고 있었다.  결국 1991년 이디오피아의 멩기스투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EPLF는 28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 격동적인 사건들은 에리트리아와 이디오피아에서 펼쳐졌으며 이웃 소말리아 공화국과 수단은 그들 스스로 분쟁활동 무대로 들어섰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결과들은 제국주의의 타협들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어떠한 실제적 해결안의 부재로 보다 비참하게 만들어졌다.  1976년 오가덴 전쟁에서 태동되어 중요 소말리아 종족 사이의 서로를 멸망시키는 분쟁에 의해 보다 확대된 소말리아의 내부 불일치는 가뭄의 결과로 더욱 악화된 국가내부에서 격렬한 전쟁을 이끌었다.  시아드 바레에 의해 주도되었던 소말리아 정부는 반군들이 권력을 빼앗아간 1990년초까지 분쟁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결과들은 미지수로 남아있다.  반면, 이웃 수단에서는 북부 이슬람과 남부의 非 이슬람인들 사이의 전쟁이 새로이 발발하였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의 요구로 재충전되어 약화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비록 국가의 재구성과 지방 자치에 대한 권력의 이전은 현재 수단에서의 평화회복과 시민의 진보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조건인 것 같다.
반대로,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조직적인 통합이 1975년 다국적 경제통합의 조약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라고스에서 조약된 이 협약은 구성원들 사이의 관세의 제거와 무역에 있어서 내부적 장애물의 제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일반관세의 고정과 그 배경하에 궁극적으로 '단일'을 위한 정책 그리고 비회원국들에 대한 상업정책을 펼치기 위한 '무대'를 만들기로 동의한 15개 서명 정부들에 의해 서부 아프리카 지역 경제 공동체(ECOWAS)를 설립하였다.  현재 ECOWAS에 포함된 16개국가들은 모리타니아, 세네갈, 감비아, 기네비소, 기네아,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말리, 부르키나 파소, 가나, 토고, 베넹, 니제르, 케이프 베르데 등으로 불령, 영령, 포르투갈령 식민지 유산을 가진 국가들로 분리되어 있다.  비록 1980년대 말까지 ECOWAS의 진정한 성취들이 특별히 중요성을 띄지는 않았지만 그 기구는 실질적 경제 통합의 합의된 서류로 남아있다.  성과들이 미사여구의 차원을 넘어서 ECOWAS의 활동이 계속되었으며 그러므로 그것의 목적을 행한 몇몇 운동들이 성취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