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치
나이지리아는 북서 아프리카 해안인 기니아만에 위치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국토는 남북쪽으로는 1,050km, 동서 쪽으로는 1,130km로 되어 있고 총면적은 923,770km이다, 북쪽은 사하라 사막 아래쪽부터 시작되고 남쪽은 기니아만까지 이르고 있는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의 주변 국가로는 서쪽에 있는 나라가 베냉이고 동쪽에는 카메룬이 있으며 북에는 니제르가 있고 차드호를 끼고 차드와 접해 있다. 나이지리아는 지리적으로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남서쪽으로 흐르는 베뉴강에 의해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나이지리아는 니제르 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국명도 니제르강에서 유래된 것이다. 니제르강은 북동부 산악 지대인 시에라리온 고원에서 시작하여서 수단을 거쳐서 흐르고 있으며 강줄기가 나이지리아 북동부로 이 지면서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로코자에서 합류하게 되고 Y자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 니제르강과 베뉴강 하류에는 삼각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기름진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2.지세
나이지리아를 기후적으로 나누게 되면 북부의 고원지대는 차드의 초원지대에 속하고 있어서 숲과 풀밭이 우거진 스텝 지역이다. 북부지역에는 연평균 강수량이 500mm정도이고 우기가 짧은 편이다. 또 기니 아만 연안지대는 연 강수량이 2,000mm가 넘는 열대 우림 지역으로 야자와 카카오가 우거진 열대 우림의 밀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와 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대륙 고원으로 남쪽과 동쪽부터 북쪽과 서쪽 방향으로 원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나이지리아는 바로 그 거대한 대륙 고원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해발 600~1,200m의 높은 고원지대와 그 사이의 낮은 지대들이 침식되어진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기니아만에 면한 연안지대는 남북의 폭이 16~96km MANGROVE가 우거진 습 지대를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니제르강 하류에 넓고 비옥한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기니 아만 연안에는 야자수 숲이 있다. 북쪽에는 80~160km 폭으로 고도 300m 이하의 기복 심한 열대 우림 지대가 펼쳐져 잇고 500km에 걸쳐 드문드문한 수풀과 초원지대가 계속되고 있다.
3.기후
나이지리아의 기후는 기니아만과 사하라 사막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년이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남부와 북부의 기후가 많이 다르다. 남부 기니아만에 가까운 지역은 고온 다습하며 북쪽 사하라 사막에 가까운 지역은 사하라로부터 남하하는 열기로 고온 건조하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기온이 제일 높은 때는 2월에서 4월까지이다. 평균 기온이 제일 낮을 때는 7월에서 9월까지이다. 나이지리아에서 평균적으로 강수량이 제일 높은 때는 6월이고 강수량이 제일 낮을 때는 8월과 12월, 1월이다. 나이지리아의 연 강수량은 동서쪽이 비슷하다. 연 강수량이 남부지역은 3,500mm이고 북부지역은 500mm가 되지않는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기후는 고온이기는 하나 건조하고 약 8개월 정도 계속된다. 그리고 건기 동안에는 한 울의 물도 내리지 않는 곳도 많으며 일교차가 평균 17도를 넘을 때도 있다. 그리고 10~4월에 걸쳐서는 강한 바람과 천둥을 동반하는 사하라 사막의 뜨겁고 모래 섞인 하마 탄이라고 하는 회색의 미세한 먼지와 함께 열풍이 불어오게 된다. 이때에는 안 내부에까지도 수북이 모래와 먼지가 쌓이게 된다. 나이지리아 남부의 기후는 습기가 매우 높고 장마철이 일년 내내 계속되며 평균기온이 32도로 덥고 습한 기후이다. 남부지역은 11~3월간은 건기이고 남서쪽은 지역에 따라 5~8월간이 우기이며 남동쪽은 5~10월이 우기이다. 강수량은 1,788-4,318mm이고 기온은 2~4월이 최고이고 8월이 최저이다. 남부지역은 평균 기온은 28도~32도 이다. 콜레라,말라리아,활 열병,뇌막염 등 열대 풍토병이 많으므로 건강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은 4~10월이 우기이고 11~3월은 건기이다. 접경 지역은 6~9월이 우기이며 강우량은 북쪽으로 갈수록 감소하고 508~1,270mm정도이다. 기온은 3~6월간이 최고이고 12~1월이 최저를 기록하며 평균 13도~34도를 유지하나 계절에 따라 기온의 차가 크다. 나이지리아의 내륙지방 한 여름의 평균기온은 평균 38도이다.
4.역사
나이지리아는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기니 아만이 있고 북쪽에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한 원주민들이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예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국가이다. 유럽의 여행자들이나 지도 제작자들이 붙인 이름으로는 slave coast Niger empire 등이 있다. 나이지리아는 고대부터 아프리카의 교차로 역할을 하던 지역으로 많은 부족 국가들이 형성되어 great empires of the western Sudan의 일부를 이루고 살았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민족 구성이 다양하여 약 250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10대 부족으로는 하우사족,풀라니 족,이보족,요루바족,카누리 족,에도족,티브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부족들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르고 있다. 10대 부족 중에서도 가장 큰 3대 부족이 있는데 대표적인 부족으로는 하우사, 플라니족 , 요루바족 , 이 보족이라고 할 수 있다. 북부지역에는 주로 하우사족과 풀라니 족이 거주하고 있고 남서부 지역에는 요루바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동부 지역은 이 보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3대 종족들의 비율은 전체의 약65%이고 기타 250여 부족이 35%을 차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2,000년경 다. 조스 프라튜 지역에서 철을 사용하였고 흙으로 만든 물건들과 주거 흔적을 발견하였다. 북부 나이지리아에는 서기 7세기경부터 사하라 사막을 근거로 하여 아프리카인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하우사 풀라니 문화권이 형성되게 되었다. 남부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1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5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까지 원주민들이 생활하였고 그 후로는 카넴 보르누 왕조의 하우사족,풀라니 족,카누리 족이 북부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 했다. 일명 노크 문명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역사상 최초로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갗추게 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게 된 왕국이 바로 카넴 보르누 왕국이다. 이 왕국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부족 국가들과의 교역이었다. 카넴 보르누 왕국은 상류층들이 1086년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로부터 이슬람문화를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을 삼아서 다스리기 시작했다. 하우사족들의 영토와 차호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약 800년 동안 번성하였다. 14세기 말에 세파와 왕조에 의 다스려지던 카넴 보르누 왕국은 부라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보루 누 지역만 남게 되고 차지하고 있던 니제르강과 베뉴강 대부분을 잃어버린 체 왕국이 축 되었다. 11세기에는 나이지리아 북부지역에 하우사 자치 지구가 건설되었고 나이지리아 지역을 하우사족들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하우사 왕국은 인근의 북부 아프리카 부족 국가들과 무역을 하기 시작하였고 하우사족 들은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 전파된 이슬람교로 인하여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하우사 왕국은 이슬람교를 통치 방식을 채택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이 곳은 서부 수단 왕국에 속해 있었고 서부 수단 왕국 중에서도 송하 이와 멜라 왕국은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여서 생활하고 있었고 왕들은 무슬림이 되었다. 송하이 왕국의 모하메드 마스키나는 철저한 무슬림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왕이다. 200년 동안 북부지역의 하우사 지역은 송하이 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이 시기에 아라비아 문도 전래되었다.
15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북부 나이지리아 전 지역의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왕조들과 상류층의 대부분이 이슬람 교도들로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이슬람교를 이용하였다. 상류층들은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반 국민들에게 이슬람교를 이용하여 복종하게 만들었으며 각 부족간의 유대를 강화 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마지막 율법인 메카를 순례하는 것은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는데 메카 순례로 인하여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는 북부지역 뿐만이 아니라 서부지역의 요루바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요루바 지역은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가 전파된 곳이었므로 많은 기독교 신자를 갖고 있었으나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에 이슬람교도의 수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요루바족의 문화 유적들은 이집트의 유적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부 해안 지역까지는 이슬람교가 전파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열대 우림으로 숲이 울창하여 인적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이슬람교는 남동부지역에는 전파가 되지 못했다. 나이지리아 북부로 이주해서 살게 된 풀라니 족,카누리 족도 17세기 이후에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부터 전파된 이슬람교를 믿으며 왕들도 모두 이슬람 교도가 된다.카크시나와 카노는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북부 나이지리아 지역은 이집트의 트리폴리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한편 카노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카노에는 방직과 수직 그리고 가축이 유명했으며 특히 장신용 가죽이 유명하였는데 모로코의 가죽이라고 불리는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사하라 사막 위에 있는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 까지 알려지는 특산물이 되었다.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북부 아프리카의 철제 수공품, 유 제품,유럽 산 옷감 등과 물물 교환되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하여 경제적으로 카노는 발달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가 북부 아프리카와 연결될 수 있도록 교통의 발전도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보르누 서부지역에 남아서 살고 있었던 하우사족은 인접 국인 수단의 송하이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풀라니 족은 하우사족이 살고 있는 영토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대부분의 풀라니 족들은 농작이 아닌 유목생활을 하게 되었다. 풀라니 족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풀라니 대제국을 세우게 되었고 이 제국은 획일적인 중앙 집권적 통치제도를 행하여서 통치를 강화하고 질서를 확립하며 학문을 발전시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통치 질서와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학문을 발전시키고 고유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베뉴강을 경계로 하여 베뉴강 상부에는 풀라니 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니제르강 서남부지역은 루바족이 살게 되는 자연스러운 자연 환경에 의한 경계로 인하여 각자의 왕국을 발전시켜 나갔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 항해사 헨 리가 최초로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해안에 상륙하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의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때 기독교와 함께 기독교 문명,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나이지리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계기로 기니 아만을 통해서 처음에는 약 1,500명의 베냉족을 포르투갈에 노예로 잡아가게 되었다. 베냉왕국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가진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속수 무책으로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베냉 왕조는 포르투갈에 외교사절을 보내어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5세기 말부터19세기 초까지 포르투갈의 무역업자와 선교사들은 베 냉을 장악한 이래로 왈리의 일세킬리 왕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5세기 이후에 약 300년 동안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의 선두주자로 악명을 날렸으며 연간 약 1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노예무역은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서인도제도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면서 노예의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고 제국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나이지리아 수난의 역사는 계속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인들이 대거 진출해서 노예무역에 참여 하였다. 특히 영국은 16세기 중엽부터 노예무역회사를 설립하였고 17세기가 되어서는 영국 노예선 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으로 밀어닥치게 되었다. 노예무역업자들은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와 기니 만 해안 주변에 살고 잇는 여러 종족들을 잡아갔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노예 상인들은 더 많은 노예를 차지하기 위해서 앞 다투어 기니 아만으로 밀려들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영국은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노예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한편 말라리아 예방약인 기니 네가 발견되기 전까지 탐험가 망 고 피크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는 노예 해안이라는 속칭 이외에도 백인들의 묘지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노예무역금지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으나 영국 정부의 선언이 곧 노예무역의 종말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여러 나라 선박들은 대서양을 통해서 계속해서 노예를 실어 나르게 되었고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당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는 영국 함대가 항상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감시하였다. 1826년 영국 선박은 나이지리아의 보니 강을 이용해서 내륙 지방까지 속속 진출하게 되었다. 영국 선박들은 노예무역이 아닌 야자유, 상아를 거래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과 나이지리아간의 무역량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노예무역은 지속되었고 노예 공급은 아프리카의 족장들과 흑인 노예상인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으나 오래 있지 않아서 노예무역은 완전히 폐지 되었다. 노예무역이 나이지리아인 들을 비롯한 아프리카인들 에게 끼친 나쁜 영향들은 무수히 많으며 종족간의 유대감을 파괴하고 불신을 높였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재능까지도 말살시켰고 과거에 노예였었다는 심한 열등감과 피해 의 식을 지금까지도 느끼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의 유럽 사회와 아프리카 사회의 교류에도 보이지 않는 장애가 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은 노예제도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제도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인성과 야만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하고 있다. 다른 여러 나라의 민족들이 400여년동안 문화를 발전시키는 동안 나이지리아의 역사는 제자리에 머물게 되었다.한편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나이지리아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고 노예로 팔려 가게 된 지역에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브라질이나 서인도제도에서 요루바족의 문화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프니카니즘이라고 한다. 시에라에온의 수도인 프리 타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흑인 2세들은 요루바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1861년 영국은 야자유와 상아 등을 상업무역품목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라고스 지역을 합병하였고 영토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나이지리아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영국은 베를린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로부터 니제르강 일대의 권리를 인정 받게 되었다. 1893년에는 니제르강 독점권을 선포하였고 1899년에 영국과 나이지리아의 무역업자들은 죠오지 골리 의 주도로 나이지리아에 설립된 개인 회사들을 모두 통합하여 영국 정부가 특허권을 인정하는 왕립 니제르 회사를 통해서 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상인과 전통 족장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무역의 권리를 뺏게 되었고 니제르강 유역의 행정과 조약 체결 권,세금 징수관등의 권리를 행사하였고 니제르가 일대의 무역을 약 15년간 계속 독점하게 되었다. 1900년 영국 정부는 왕립 니제르 회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라가도 총독 아래에 있던 전통적인 왕족과 족장들이 왕립 니제르 회사의 역할을 담당하여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하도록 교묘하게 통치하는 이른바 간접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영국은 남부 나이지리아 보호령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을 가가 구분하여 선포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며 보호령에 감시자를 파견하였다. 프레드릭루가드는 나이지리아의 니제르강 일대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남부 해안지대인 비아푸라만 베냉만에서의 나이지리아 무역활동을 감시하였고 사법,행정,조세 권을 가진 영국 영사를 나이지리아에 파견하였으며 영사가 관할하는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고 점차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으로 보호령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비아프라만과 베냉만에서의 보호령은 남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행정을 식민지 중앙정부구조와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식민지 중앙정부구조로는 총독과 부총독,참모,지방 관료, 군인 ,경찰들로 구성하였고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는 부족장들로 구성하였다.1906년 영국은 수도인 라고스에 보호령을 선포하고 라고스 보호령과 남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을 합병하여 라고스 식민지를 통합하게 된다. 1914년에는 북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과 남부 나이지리아의 식민 보호령을 통합하여서 영국의 식민 보호령인 나이지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다음 영국 총독이 나이지리아에서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공식적인 식민지이며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이 나이지리아의 전역을 빼앗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라고스에 총독으로 있던 올드 카라바 영사와 특허권을 가진 무역회사의 도 이었다.
1922년에 영국 식민 정부는 신 헌법을 제정하고 입법 회의가 창설되었으며 나이지리아인 10명을 포함한 46명의 의 원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영국의 총독인 프레드릭 루가드에 의해 새로운 통치 방법인 이중 위임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중 위임 통치는 나이지리아인들과 나이지리아에서 살고 있는 영국인들간의 문화와 지식의 교류를 통하여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성과 평등성을 보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사린다는 취지로 나이지리아인들의 전통적인 관습과 활양식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하는 허울 좋은 제도 였다. 이중 위임 통치 방식은 나이지리아를 영국이 통치하면서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의무 수행을 위한 방법은 두가 지가 있다. 첫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발전을 위하여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통치 방식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나이지리아에서 착취를 할 때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채택한 통치 방식으로 영국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 의식을 피하고자 하는 저의가 깔려있으며 사기가 저하된 부족장들의 권위를 회복시켜서 이용하자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나이지리아 국민들에게 투자될 관리 운영비와 인건비로 충당할 세금을 걷어들이기 쉽게 하기 위해서 부족장들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영국 식민 정부는 세금 징수를 강화하기 위하여 야자유,코코아,면화,고무 등 환금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고 적극적으로 수출하도록 하였다. 영국은 간접 통치 방식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족장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효과적인 세무 방식을 도입하였다. 족장들의 권한은 모든 정책과 통치지역 내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나이지리아인들 의 의식 속에 토지란 전통적으로 부족 전체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으로 영국 식민 정부가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화정책을 통하여 부족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영국인들의 토지 소유와 거주지 확장이 억제되었고 영 정부 차원의 투자가 아니면 개인이나 단체의 투자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경제,정치와 교육 등 전반적인 사화발전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급기야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영국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높아지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민족주의 의식이 팽배하게 되었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1946년 리차드 헌법이 영국 식민 정부에 의해 공포되었고 리차드 헌법에 의해서 나이지리아에 대하여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법 대표 의회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나이지리아인들은 리차드 헌법을 반대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자치를 요구하는 대표부를 영국에 파견하였으며 리차드 헌법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1950년 맥퍼슨 헌법에 의해서 입법기관을 나이지리아인들로 구성한 입법 대표 의회를 만들고 중앙집행기관으로 내각을 만들게 되었다. 1951년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북부 나이지리아와 남부 나이지리아를 합쳐서 식민지정책을 펴 나가게 되었다. 한편 맥퍼슨 헌법에 의해 새로 구성된 내각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나이지리아 국민 평의회,급진파,북부 국민 회의 등 3개의 자치구를 확립하게 되었다.
1954년에 제정된 리텔톤 헌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연방제 형식을 취하고 지방 정부와 의회는 연방 정부의 승인 아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나이지리아에 사법관도 설치하였다.1957년 런던 회의 결과에 따라서 나이지리아 동서부지역의 자치가 인정되었고 1957년 9월에는 벨레와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수상으로 지명되었다. 나이지리아는 3개의 정당을 규합하여 내각을 새롭게 구성하였고 1958년 런던 제헌회의 의 결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60년 10월 1일 나이지리아는 독일의 식민지였던 카메룬의 북부지방을 병합하여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 연방에 속한 상태로 독립 국가가 되었고 구제연합에도 가입하여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1960년에 벨레와는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다. 1963년 NCNC의 아지키웨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됨으로써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인 제1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 행정구제도는 4개 주에서 모두 12개 주로 재편성되었다. 나이지리아는 NCNC와 AG,NPG 등 3대 정당간의 다툼,긴장 무질서상태로 인해 혼란한 정국은 계속된다.
1966년에는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북부의 일부지방을 장악하고 연방 정부의 바레와 수상 및 서부, 북부지역의 수상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이론시 장군에 의해 진압된다. 한편 북부에서는 하우사족과 이 보족간에 무력 충돌이 생겨 옛 행정구인 북부지역에서만도 수천명의 이 보족이 하우사족에 의해 살해되게 되었고 수많은 이보족들이 북부지역에서 도망가게 되었다. 이론시 장군(동부 이보족 출신)은 정권을 이양 받아 군사 정권을 수립하고 헌법의 일부를 중단시키고 정당들의 활동도 금지시켰으며 이론시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권을 수립하게 되어 제1차 군사정부가 탄생되게 되었다. 문민 정부 이후에 13년 동안의 군사 통치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게 되었다.
1966년 7월 군부에서 제2차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북부지역의 소요 사태 책임을 이론시 장군에게 돌리고 쿠데타 세력들은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야쿤바 고원 중령(베뉴 프라트주 소속 부족 출신)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국민 의회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헌법을 개정하여 입법과 행정 전권을 최고 군사 평의회,연방 집행 평의회로 된 군사정부에 일임한다고 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고원정권은 특사령을 발표하여 제1차 구데타에 의해 구금되었던 주요 정치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1967년 고원 장군은 동부와 서부,북부의 각 지구간의 단결을 막을 목적으로 나이지리아 연방을 12개 주로 계속 유지하였으나 이조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67년 4월에 동부지역의 군정 장관인 오주크와 장군은 동부 나이지리아의 자문 회의의 결정에 따라 [비아프라 지역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의 연방에서 분리하게 된다.비아프라 독립을 선언한 후 나이지리아는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비아프라 독립 선언 후 연방 정부와 비아프라 자치구는 이로부터 2년 반간의 내란이 시작되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미국과 소련 등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나이지리아 내전에 개입하게 되었고 비아프라 내전은 국제 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00만인에 이르는 아사자를 내게 하는 나이지리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 되었다.
1970년 1월 오주크와 장군은 비아프라 정권을 에피옹 소장에게 이양하였고 오주크와 장군은 아이보리코스트로 망명하였다. 연방 정부군에 의해 비아프라군은 비아프라 지역을 뺏기게 되었고 비아프라 정권은 연방 정부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내전은 2년 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고원 정부는 1970년 4월에 나이지리아 내전으로 인하여 사회 전반이 침체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제2차 국가개발 4개 년 계획을 계속해서 실시하였으며 국내 개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3년 이후 나이지리아는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석유개발을 하게 되었고 수출 증가로 인해서 국가 수입이 증대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석유수입으로 인해서 경제 부흥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1975년부터 1981년 까지 계속적인 국가개발정책을 진행시키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고 경제력으로 인해서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83년 12월 말에 제 5차 군부무혈쿠데타가 일어나고 샤가리 대통령의 민간정부는 붕괴하게 된다. 군사정권은 부하리 소장을 의장으로 하고 19명으로 구성된 최고 군사회의를 설치하고 최고 통치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부하리 군사정부는 샤가리 민간정부 말기에 만연했던 정치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경제 부흥을 꾀하며 사회 모든 기관의 기반을 재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서 정책을 펴 나갔다. 부하리 정권은 노동 시장을 보호하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중장기 계획으로 대외 채무의 반환을 행하는 등 노력을 하여 국제수지의 흑자를 이룩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으나 석유의 지나친 과잉 생산으로 인하여 오히려 경기가 악화되었고 국제적인 석유가격 폭락 율로 인하여 인플레,실업률,산업계 불황이 계속되었으며 경제상황을 개선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부하리 군사 정권은 언론의 통제 등 인권 억압적인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게 일게 되었다.
1985년 8월 제6차 쿠데타가 발생하여 부하리의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신 군사 정권은 전 육군 참모총장인 바방가다를 대통령 겸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고 28명의 군사 통치 위원회를 설치 통치기관으로 삼는다. 바방가다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민간 정부로 이관시키는 과도기적인 정권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방가다 정권은 부하리 정권의 지도력 상실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 부족,지도층의 권력남용,경제개혁정책 실패 등 부하리 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단정하였으며 정권 확립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경제를 재건하여 경제적 낭비를 없애고 정과 부패척결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계획보다 앞당긴 1992년에 민정 이관을 목표로 해 1987년에 [민정 이관 프로그램]을 발표하게 되었다. 부하리 정권은 부패한 문민 정권의 정치적 전통과 결별하기 위하여 공의 경험이 있는 정치가와 정치 경험이 있는 군인의 정치활동의 참여와 과거에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한편 1991년에 정치활동의 규제조치를 해제하였다. 1990년 4월에 북부지역의 군부세력 들이 부 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10시간 만에 진압되었고 쿠데타 기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며 쿠데타 가담자 69명이 모두 총살당하게 됨으로써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993년 8월에 하기로 한 민정이양계획을 바방가다 대통령은 3차례나 연기하였고 민정이관을 완료시킨 후에 퇴임하겠다고 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93년 6월 12일 양대 정당 대선을 실시하였으나 바방기다 대통령이 아비올라 후보에게 패배하자 선거 부정을 이유로 무효화 시킨다. 국내외의 강한 반발 여론과 압력에 의해 바방기다 대통령을 1993년 6월에 사임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역사에 군사정부가 민간정부에 이양한 것은 1979년 오바산죠 군사정부가 선경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샤가리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이 최초이다. 바방기다 대통령은 스스로 민간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하였으나 결국 지키지 못하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의 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1993년 1월부터 과도내각을 이어 온 쇼네 칸을 수반으로 바방기다 대통령이 물러난 후 임시국민정부가 출범하였다.1993년 11월에 아바차 국방장관이 쿠데타를 주도하여 쇼네 칸이 이끄는 임시국민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하게 된다. 기존의 행정과 입법기능을 일시에 정지시키고 정당활동도 금지시킨다. 군부가 국정 운영을 전부 장악하게 되었다. 아바차 장군은 PRC(임시통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주지사 전원을 군부 인사로 대체 하였다. 1994년 NCCC(헌법 회의 위원회)를 발족시켜 제1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하였다. 정치 일정은 제일 먼저 기초 단위인 선거인단을 선출할 예정이고 헌법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헌법 회의를 출범하며 헌법 초안을 작성하여 정부 심의를 받을 계획을 세웠다. 1993년 대선에서 승리한 아비올라는 자신이 정통성 있는 대령이라고 1994년 6월에 선언하였으나 아바차 정권에 의해 강제 구금된다. 1994년에 석유가스노조는 아비올라의 석방을 촉구하며 파업을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1995년에 나이지리아의 아비올라 군사정권은 정치활동의 금지를 해제하였고 제2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할 예정이지만 나이지리아의 헌정복귀는 아직까지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5.인구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12,628만 명이다.(92년 통계)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다.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아직 인력을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여 실업률이 높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성장률은 3.3%이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수명은 50세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인 53세보다 낮으며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평균 수명이 매우 낮은 편이다.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의 지리상 위치는 대륙 횡단의 교차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는 여러 민족과 문화를 접촉할 수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주하여서 살게 되었고 나이지리아는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전 세계에서 9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는 인력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에는 약 250개의 부족이 살고 있으며 각 부족들은 고유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10대 부족은 나이지리아의 약 250개의 부족 중에서 90%을 차지하고 있다. 즉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9/10라고 보면 된다. 10대 부족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가진 부족을 나이지리아의 3대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3대 부족들에는 하우사 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들어가게 된다. 3대 부족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65%이고 약 250개 부족은 35%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분포를 보면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교적 살기 편한 북부지역의 카노 남부지역의 라고스에 집중되어있으며 전체 인구의 약 35%가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농촌에서는 65%가 거주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인구 조사를 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몇몇 부족들이 인구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출생률이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높고 인구 조사에 정확도와 신뢰도 등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정확한 인구 추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6.민족
나이지리아는 지리적 위치가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지에 있으므로 민족과 문화와 언어가 매우 다양하다.나이지리아에는 현재 약250개의 종족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3대 부족이 있는데 하우사/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하였는데 영국이 지배하고 있을 때 나이지리아를 연방 공화제로 통치하게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3대 부 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으로 경계선을 삼아서 통치하였다. 북부지역은 하우사/풀라니족,남서부 지역은 요루바족, 남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3대 종족의 비율은 나이지리아 전체 부족의 약 65%이고 기타 250여 종족이 35%를 차지하고 있다.
3대 부족 외에 더 작게 세분하면 10대 부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근거는 언어이다. 10대 부족들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쓰고 있다. 3대 어족에 해당되는 하우사/풀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있고 그 밖에 카누리족,티브족,에도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이 있고 이들 부족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른다. 부족간에는 서로 강한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지역 안에서 잦은 충돌이 있다. 그러나 북부지역과 남서부지역, 남동부지역에는 각각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부족이 있으므로 소수 부족들은 그들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각 부족이 고유의 전통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부족에 대한 우월감이 높은 편이다. 나이지리아의 정, 사회에 안정을 찾지 못하는데 대하여 서로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정치권 대부분 사람들은 3대 부족 중에서도 최대의 부족인 하우사/풀라니족의 출신이다.하우사/풀라니족들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로서 북부지역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다. 요루바족은 나이지리아의 남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요루바족은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의 비율이 반반이다. 나이지리아에 이슬람교가 울창한 삼림지대인 지역적 요인으로 인하여 빨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이보족은 나이지리아의 동부지역에서 주로 살고 있으며 1967년 비아프라 내전의 주무대가 되었다. 동부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북부지역의 하우사 풀라니족의 이보족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게 되자 마침내 비아프라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예전부터 포루노 왕국과 풀라니 대제국, 하우사 왕국, 베냉 왕국, 오요 왕국등 각 부족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에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단결과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시절부터 나이지리아는 각 주가 부족들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가 각 부족들을 잘 화합하는 것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며 그로 인하여 정치와 경제,사회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7.언어
나이지리아의 언어는 방언을 포함하여 250여 종의 언어가 있다. 나이지리아의 공용어는 영어이고 나이지리아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로 교육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각 종족의 언어가 주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와 상거래에서는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진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고유 언어에 종족의 색채를 가미한 언어로써 상거래가 활발한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영어에서 언어를 많이 차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다.
북부지역에서는 식민통치 때부터 계속해서 하우사어가 공식,비공식 언어로 사용되어 졌다. 북부지역에서는 하우사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소수 부족들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포기하고 강제적으로 하우사어를 써야 했다. 하우사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남서부는 요루바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으로 대부분 요루바인족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는 데 이 지역은 외국인들의 출입이 빈번한 지역으로 주로 이보족의 언어가 사용되어져 왔으나 현재는 정치와 경제 변화에 따라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영어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사용하는 정통 영어가 아니고 그들의 고유언어와 혼합되어져 나이지리아화된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는 지역마다 영어의 악센트를 서로 다르게 하는 경우가 많으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이지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를 실용적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상호간에 사용하는 영어를 독자적인 표현 방법으로 쓰기도 한다. 영어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표현할 때 다른 언어보다 간단하게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지역마다 사용되어 지는 언어는 가가 다르다고 하였는데 크게 세 개의 언어군으로 나눌 수가 있다.먼저 아프로-아시아틱 언어군과 니제르-코르도 파니안 언어군,닐로-사하란 언어군으로 나누게 된다.아프로-아시아틱 언어는 차드어인대 드어는 북부지역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하우사어가 바로 여기에 속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인의 25%가 사용하는 제1의 언어군이고 나이지리아인의 10%는 아프로-아시아틱언어를 제2의 언어군으로 사용하고 있다. 둘째로 닐로-사하란어군에 포함되는 언어는 사하란어, 송하이어 자르마, 덴디어 등이 있다. 사하란어, 송하이어는 나이지리아의 다수 종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주로 북동쪽의 카누리족이 사용하고 있다.마지막으로 니제르-코르도파니안 언어군은 150여 개의 언어가 베냉어 , 콩고어, 이비비오어, 아나앙어, 티브어에 속하고 있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1%이다.또 기타 어족으로 크와어가 있는데 나이지리아에서 50여 개의 종족이 사용하고 있다.크와어족에는 요루바족과 이보족도 포함이 되어 있고 그 밖에 구르어, 만데어, 서대서양어가 있다.
8.종교
나이지리아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기독교가 약 30%를 차지하며 부족 고유의 토속 신앙이 10%을 차지한다.나이지리아에는 국교가 없다. 북부지역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데 하우사족이 대부분이다.한편 요루바족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각각 50%씩 이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충돌을 일으키키도 한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성의 지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편이다. 타 지역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도층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로 약 95%가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져 있고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 보아서 나이지리아에 종교적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교는 11세기 하우사 왕조 EO에 이슬람 문화와 함께 전파되었고 이때 아라비아 문자도 전래되었다. 이슬람교의 다수를 이루는 종파는 수니파이고 남서부의 이슬람교도인들은 인도에서 발생된 수니파가 아니면 이단이라고생각하는 아흐마디야파를 믿는다. 나이지리아에서 이슬람교의 주종을 이루는 수니파는 집회가 특색이 있어서 집회에 의해 구별할 수 있도록 차림새와 의식을 갖추게 된다. 기독교는 예전에 비해 급속도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선교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자수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나이지리아 주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도 신자수를 증가 시킨 요인이 되었다.나이지리아에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융합 되어 있다. 19세기에 나이지리아에 전파된 기독교는 분파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 기독교는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의 생활과 도시 생활을 반영하여 신앙의 발전을 도모하여 왔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교리, 의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토속 신앙과 융합하여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으로 토속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믿음을 바꿔 나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북서 아프리카 해안인 기니아만에 위치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국토는 남북쪽으로는 1,050km, 동서 쪽으로는 1,130km로 되어 있고 총면적은 923,770km이다, 북쪽은 사하라 사막 아래쪽부터 시작되고 남쪽은 기니아만까지 이르고 있는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의 주변 국가로는 서쪽에 있는 나라가 베냉이고 동쪽에는 카메룬이 있으며 북에는 니제르가 있고 차드호를 끼고 차드와 접해 있다. 나이지리아는 지리적으로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남서쪽으로 흐르는 베뉴강에 의해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나이지리아는 니제르 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국명도 니제르강에서 유래된 것이다. 니제르강은 북동부 산악 지대인 시에라리온 고원에서 시작하여서 수단을 거쳐서 흐르고 있으며 강줄기가 나이지리아 북동부로 이 지면서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로코자에서 합류하게 되고 Y자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 니제르강과 베뉴강 하류에는 삼각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기름진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2.지세
나이지리아를 기후적으로 나누게 되면 북부의 고원지대는 차드의 초원지대에 속하고 있어서 숲과 풀밭이 우거진 스텝 지역이다. 북부지역에는 연평균 강수량이 500mm정도이고 우기가 짧은 편이다. 또 기니 아만 연안지대는 연 강수량이 2,000mm가 넘는 열대 우림 지역으로 야자와 카카오가 우거진 열대 우림의 밀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와 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대륙 고원으로 남쪽과 동쪽부터 북쪽과 서쪽 방향으로 원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나이지리아는 바로 그 거대한 대륙 고원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해발 600~1,200m의 높은 고원지대와 그 사이의 낮은 지대들이 침식되어진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기니아만에 면한 연안지대는 남북의 폭이 16~96km MANGROVE가 우거진 습 지대를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니제르강 하류에 넓고 비옥한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기니 아만 연안에는 야자수 숲이 있다. 북쪽에는 80~160km 폭으로 고도 300m 이하의 기복 심한 열대 우림 지대가 펼쳐져 잇고 500km에 걸쳐 드문드문한 수풀과 초원지대가 계속되고 있다.
3.기후
나이지리아의 기후는 기니아만과 사하라 사막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년이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남부와 북부의 기후가 많이 다르다. 남부 기니아만에 가까운 지역은 고온 다습하며 북쪽 사하라 사막에 가까운 지역은 사하라로부터 남하하는 열기로 고온 건조하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기온이 제일 높은 때는 2월에서 4월까지이다. 평균 기온이 제일 낮을 때는 7월에서 9월까지이다. 나이지리아에서 평균적으로 강수량이 제일 높은 때는 6월이고 강수량이 제일 낮을 때는 8월과 12월, 1월이다. 나이지리아의 연 강수량은 동서쪽이 비슷하다. 연 강수량이 남부지역은 3,500mm이고 북부지역은 500mm가 되지않는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기후는 고온이기는 하나 건조하고 약 8개월 정도 계속된다. 그리고 건기 동안에는 한 울의 물도 내리지 않는 곳도 많으며 일교차가 평균 17도를 넘을 때도 있다. 그리고 10~4월에 걸쳐서는 강한 바람과 천둥을 동반하는 사하라 사막의 뜨겁고 모래 섞인 하마 탄이라고 하는 회색의 미세한 먼지와 함께 열풍이 불어오게 된다. 이때에는 안 내부에까지도 수북이 모래와 먼지가 쌓이게 된다. 나이지리아 남부의 기후는 습기가 매우 높고 장마철이 일년 내내 계속되며 평균기온이 32도로 덥고 습한 기후이다. 남부지역은 11~3월간은 건기이고 남서쪽은 지역에 따라 5~8월간이 우기이며 남동쪽은 5~10월이 우기이다. 강수량은 1,788-4,318mm이고 기온은 2~4월이 최고이고 8월이 최저이다. 남부지역은 평균 기온은 28도~32도 이다. 콜레라,말라리아,활 열병,뇌막염 등 열대 풍토병이 많으므로 건강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은 4~10월이 우기이고 11~3월은 건기이다. 접경 지역은 6~9월이 우기이며 강우량은 북쪽으로 갈수록 감소하고 508~1,270mm정도이다. 기온은 3~6월간이 최고이고 12~1월이 최저를 기록하며 평균 13도~34도를 유지하나 계절에 따라 기온의 차가 크다. 나이지리아의 내륙지방 한 여름의 평균기온은 평균 38도이다.
4.역사
나이지리아는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기니 아만이 있고 북쪽에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한 원주민들이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예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국가이다. 유럽의 여행자들이나 지도 제작자들이 붙인 이름으로는 slave coast Niger empire 등이 있다. 나이지리아는 고대부터 아프리카의 교차로 역할을 하던 지역으로 많은 부족 국가들이 형성되어 great empires of the western Sudan의 일부를 이루고 살았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민족 구성이 다양하여 약 250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10대 부족으로는 하우사족,풀라니 족,이보족,요루바족,카누리 족,에도족,티브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부족들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르고 있다. 10대 부족 중에서도 가장 큰 3대 부족이 있는데 대표적인 부족으로는 하우사, 플라니족 , 요루바족 , 이 보족이라고 할 수 있다. 북부지역에는 주로 하우사족과 풀라니 족이 거주하고 있고 남서부 지역에는 요루바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동부 지역은 이 보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3대 종족들의 비율은 전체의 약65%이고 기타 250여 부족이 35%을 차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2,000년경 다. 조스 프라튜 지역에서 철을 사용하였고 흙으로 만든 물건들과 주거 흔적을 발견하였다. 북부 나이지리아에는 서기 7세기경부터 사하라 사막을 근거로 하여 아프리카인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하우사 풀라니 문화권이 형성되게 되었다. 남부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1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5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까지 원주민들이 생활하였고 그 후로는 카넴 보르누 왕조의 하우사족,풀라니 족,카누리 족이 북부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 했다. 일명 노크 문명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역사상 최초로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갗추게 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게 된 왕국이 바로 카넴 보르누 왕국이다. 이 왕국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부족 국가들과의 교역이었다. 카넴 보르누 왕국은 상류층들이 1086년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로부터 이슬람문화를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을 삼아서 다스리기 시작했다. 하우사족들의 영토와 차호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약 800년 동안 번성하였다. 14세기 말에 세파와 왕조에 의 다스려지던 카넴 보르누 왕국은 부라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보루 누 지역만 남게 되고 차지하고 있던 니제르강과 베뉴강 대부분을 잃어버린 체 왕국이 축 되었다. 11세기에는 나이지리아 북부지역에 하우사 자치 지구가 건설되었고 나이지리아 지역을 하우사족들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하우사 왕국은 인근의 북부 아프리카 부족 국가들과 무역을 하기 시작하였고 하우사족 들은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 전파된 이슬람교로 인하여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하우사 왕국은 이슬람교를 통치 방식을 채택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이 곳은 서부 수단 왕국에 속해 있었고 서부 수단 왕국 중에서도 송하 이와 멜라 왕국은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여서 생활하고 있었고 왕들은 무슬림이 되었다. 송하이 왕국의 모하메드 마스키나는 철저한 무슬림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왕이다. 200년 동안 북부지역의 하우사 지역은 송하이 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이 시기에 아라비아 문도 전래되었다.
15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북부 나이지리아 전 지역의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왕조들과 상류층의 대부분이 이슬람 교도들로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이슬람교를 이용하였다. 상류층들은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반 국민들에게 이슬람교를 이용하여 복종하게 만들었으며 각 부족간의 유대를 강화 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마지막 율법인 메카를 순례하는 것은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는데 메카 순례로 인하여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는 북부지역 뿐만이 아니라 서부지역의 요루바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요루바 지역은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가 전파된 곳이었므로 많은 기독교 신자를 갖고 있었으나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에 이슬람교도의 수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요루바족의 문화 유적들은 이집트의 유적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부 해안 지역까지는 이슬람교가 전파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열대 우림으로 숲이 울창하여 인적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이슬람교는 남동부지역에는 전파가 되지 못했다. 나이지리아 북부로 이주해서 살게 된 풀라니 족,카누리 족도 17세기 이후에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부터 전파된 이슬람교를 믿으며 왕들도 모두 이슬람 교도가 된다.카크시나와 카노는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북부 나이지리아 지역은 이집트의 트리폴리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한편 카노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카노에는 방직과 수직 그리고 가축이 유명했으며 특히 장신용 가죽이 유명하였는데 모로코의 가죽이라고 불리는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사하라 사막 위에 있는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 까지 알려지는 특산물이 되었다.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북부 아프리카의 철제 수공품, 유 제품,유럽 산 옷감 등과 물물 교환되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하여 경제적으로 카노는 발달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가 북부 아프리카와 연결될 수 있도록 교통의 발전도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보르누 서부지역에 남아서 살고 있었던 하우사족은 인접 국인 수단의 송하이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풀라니 족은 하우사족이 살고 있는 영토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대부분의 풀라니 족들은 농작이 아닌 유목생활을 하게 되었다. 풀라니 족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풀라니 대제국을 세우게 되었고 이 제국은 획일적인 중앙 집권적 통치제도를 행하여서 통치를 강화하고 질서를 확립하며 학문을 발전시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통치 질서와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학문을 발전시키고 고유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베뉴강을 경계로 하여 베뉴강 상부에는 풀라니 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니제르강 서남부지역은 루바족이 살게 되는 자연스러운 자연 환경에 의한 경계로 인하여 각자의 왕국을 발전시켜 나갔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 항해사 헨 리가 최초로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해안에 상륙하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의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때 기독교와 함께 기독교 문명,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나이지리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계기로 기니 아만을 통해서 처음에는 약 1,500명의 베냉족을 포르투갈에 노예로 잡아가게 되었다. 베냉왕국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가진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속수 무책으로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베냉 왕조는 포르투갈에 외교사절을 보내어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5세기 말부터19세기 초까지 포르투갈의 무역업자와 선교사들은 베 냉을 장악한 이래로 왈리의 일세킬리 왕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5세기 이후에 약 300년 동안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의 선두주자로 악명을 날렸으며 연간 약 1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노예무역은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서인도제도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면서 노예의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고 제국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나이지리아 수난의 역사는 계속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인들이 대거 진출해서 노예무역에 참여 하였다. 특히 영국은 16세기 중엽부터 노예무역회사를 설립하였고 17세기가 되어서는 영국 노예선 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으로 밀어닥치게 되었다. 노예무역업자들은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와 기니 만 해안 주변에 살고 잇는 여러 종족들을 잡아갔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노예 상인들은 더 많은 노예를 차지하기 위해서 앞 다투어 기니 아만으로 밀려들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영국은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노예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한편 말라리아 예방약인 기니 네가 발견되기 전까지 탐험가 망 고 피크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는 노예 해안이라는 속칭 이외에도 백인들의 묘지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노예무역금지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으나 영국 정부의 선언이 곧 노예무역의 종말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여러 나라 선박들은 대서양을 통해서 계속해서 노예를 실어 나르게 되었고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당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는 영국 함대가 항상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감시하였다. 1826년 영국 선박은 나이지리아의 보니 강을 이용해서 내륙 지방까지 속속 진출하게 되었다. 영국 선박들은 노예무역이 아닌 야자유, 상아를 거래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과 나이지리아간의 무역량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노예무역은 지속되었고 노예 공급은 아프리카의 족장들과 흑인 노예상인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으나 오래 있지 않아서 노예무역은 완전히 폐지 되었다. 노예무역이 나이지리아인 들을 비롯한 아프리카인들 에게 끼친 나쁜 영향들은 무수히 많으며 종족간의 유대감을 파괴하고 불신을 높였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재능까지도 말살시켰고 과거에 노예였었다는 심한 열등감과 피해 의 식을 지금까지도 느끼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의 유럽 사회와 아프리카 사회의 교류에도 보이지 않는 장애가 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은 노예제도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제도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인성과 야만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하고 있다. 다른 여러 나라의 민족들이 400여년동안 문화를 발전시키는 동안 나이지리아의 역사는 제자리에 머물게 되었다.한편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나이지리아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고 노예로 팔려 가게 된 지역에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브라질이나 서인도제도에서 요루바족의 문화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프니카니즘이라고 한다. 시에라에온의 수도인 프리 타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흑인 2세들은 요루바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1861년 영국은 야자유와 상아 등을 상업무역품목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라고스 지역을 합병하였고 영토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나이지리아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영국은 베를린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로부터 니제르강 일대의 권리를 인정 받게 되었다. 1893년에는 니제르강 독점권을 선포하였고 1899년에 영국과 나이지리아의 무역업자들은 죠오지 골리 의 주도로 나이지리아에 설립된 개인 회사들을 모두 통합하여 영국 정부가 특허권을 인정하는 왕립 니제르 회사를 통해서 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상인과 전통 족장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무역의 권리를 뺏게 되었고 니제르강 유역의 행정과 조약 체결 권,세금 징수관등의 권리를 행사하였고 니제르가 일대의 무역을 약 15년간 계속 독점하게 되었다. 1900년 영국 정부는 왕립 니제르 회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라가도 총독 아래에 있던 전통적인 왕족과 족장들이 왕립 니제르 회사의 역할을 담당하여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하도록 교묘하게 통치하는 이른바 간접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영국은 남부 나이지리아 보호령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을 가가 구분하여 선포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며 보호령에 감시자를 파견하였다. 프레드릭루가드는 나이지리아의 니제르강 일대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남부 해안지대인 비아푸라만 베냉만에서의 나이지리아 무역활동을 감시하였고 사법,행정,조세 권을 가진 영국 영사를 나이지리아에 파견하였으며 영사가 관할하는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고 점차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으로 보호령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비아프라만과 베냉만에서의 보호령은 남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행정을 식민지 중앙정부구조와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식민지 중앙정부구조로는 총독과 부총독,참모,지방 관료, 군인 ,경찰들로 구성하였고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는 부족장들로 구성하였다.1906년 영국은 수도인 라고스에 보호령을 선포하고 라고스 보호령과 남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을 합병하여 라고스 식민지를 통합하게 된다. 1914년에는 북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과 남부 나이지리아의 식민 보호령을 통합하여서 영국의 식민 보호령인 나이지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다음 영국 총독이 나이지리아에서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공식적인 식민지이며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이 나이지리아의 전역을 빼앗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라고스에 총독으로 있던 올드 카라바 영사와 특허권을 가진 무역회사의 도 이었다.
1922년에 영국 식민 정부는 신 헌법을 제정하고 입법 회의가 창설되었으며 나이지리아인 10명을 포함한 46명의 의 원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영국의 총독인 프레드릭 루가드에 의해 새로운 통치 방법인 이중 위임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중 위임 통치는 나이지리아인들과 나이지리아에서 살고 있는 영국인들간의 문화와 지식의 교류를 통하여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성과 평등성을 보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사린다는 취지로 나이지리아인들의 전통적인 관습과 활양식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하는 허울 좋은 제도 였다. 이중 위임 통치 방식은 나이지리아를 영국이 통치하면서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의무 수행을 위한 방법은 두가 지가 있다. 첫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발전을 위하여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통치 방식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나이지리아에서 착취를 할 때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채택한 통치 방식으로 영국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 의식을 피하고자 하는 저의가 깔려있으며 사기가 저하된 부족장들의 권위를 회복시켜서 이용하자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나이지리아 국민들에게 투자될 관리 운영비와 인건비로 충당할 세금을 걷어들이기 쉽게 하기 위해서 부족장들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영국 식민 정부는 세금 징수를 강화하기 위하여 야자유,코코아,면화,고무 등 환금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고 적극적으로 수출하도록 하였다. 영국은 간접 통치 방식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족장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효과적인 세무 방식을 도입하였다. 족장들의 권한은 모든 정책과 통치지역 내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나이지리아인들 의 의식 속에 토지란 전통적으로 부족 전체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으로 영국 식민 정부가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화정책을 통하여 부족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영국인들의 토지 소유와 거주지 확장이 억제되었고 영 정부 차원의 투자가 아니면 개인이나 단체의 투자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경제,정치와 교육 등 전반적인 사화발전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급기야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영국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높아지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민족주의 의식이 팽배하게 되었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1946년 리차드 헌법이 영국 식민 정부에 의해 공포되었고 리차드 헌법에 의해서 나이지리아에 대하여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법 대표 의회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나이지리아인들은 리차드 헌법을 반대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자치를 요구하는 대표부를 영국에 파견하였으며 리차드 헌법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1950년 맥퍼슨 헌법에 의해서 입법기관을 나이지리아인들로 구성한 입법 대표 의회를 만들고 중앙집행기관으로 내각을 만들게 되었다. 1951년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북부 나이지리아와 남부 나이지리아를 합쳐서 식민지정책을 펴 나가게 되었다. 한편 맥퍼슨 헌법에 의해 새로 구성된 내각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나이지리아 국민 평의회,급진파,북부 국민 회의 등 3개의 자치구를 확립하게 되었다.
1954년에 제정된 리텔톤 헌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연방제 형식을 취하고 지방 정부와 의회는 연방 정부의 승인 아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나이지리아에 사법관도 설치하였다.1957년 런던 회의 결과에 따라서 나이지리아 동서부지역의 자치가 인정되었고 1957년 9월에는 벨레와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수상으로 지명되었다. 나이지리아는 3개의 정당을 규합하여 내각을 새롭게 구성하였고 1958년 런던 제헌회의 의 결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60년 10월 1일 나이지리아는 독일의 식민지였던 카메룬의 북부지방을 병합하여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 연방에 속한 상태로 독립 국가가 되었고 구제연합에도 가입하여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1960년에 벨레와는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다. 1963년 NCNC의 아지키웨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됨으로써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인 제1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 행정구제도는 4개 주에서 모두 12개 주로 재편성되었다. 나이지리아는 NCNC와 AG,NPG 등 3대 정당간의 다툼,긴장 무질서상태로 인해 혼란한 정국은 계속된다.
1966년에는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북부의 일부지방을 장악하고 연방 정부의 바레와 수상 및 서부, 북부지역의 수상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이론시 장군에 의해 진압된다. 한편 북부에서는 하우사족과 이 보족간에 무력 충돌이 생겨 옛 행정구인 북부지역에서만도 수천명의 이 보족이 하우사족에 의해 살해되게 되었고 수많은 이보족들이 북부지역에서 도망가게 되었다. 이론시 장군(동부 이보족 출신)은 정권을 이양 받아 군사 정권을 수립하고 헌법의 일부를 중단시키고 정당들의 활동도 금지시켰으며 이론시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권을 수립하게 되어 제1차 군사정부가 탄생되게 되었다. 문민 정부 이후에 13년 동안의 군사 통치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게 되었다.
1966년 7월 군부에서 제2차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북부지역의 소요 사태 책임을 이론시 장군에게 돌리고 쿠데타 세력들은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야쿤바 고원 중령(베뉴 프라트주 소속 부족 출신)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국민 의회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헌법을 개정하여 입법과 행정 전권을 최고 군사 평의회,연방 집행 평의회로 된 군사정부에 일임한다고 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고원정권은 특사령을 발표하여 제1차 구데타에 의해 구금되었던 주요 정치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1967년 고원 장군은 동부와 서부,북부의 각 지구간의 단결을 막을 목적으로 나이지리아 연방을 12개 주로 계속 유지하였으나 이조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67년 4월에 동부지역의 군정 장관인 오주크와 장군은 동부 나이지리아의 자문 회의의 결정에 따라 [비아프라 지역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의 연방에서 분리하게 된다.비아프라 독립을 선언한 후 나이지리아는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비아프라 독립 선언 후 연방 정부와 비아프라 자치구는 이로부터 2년 반간의 내란이 시작되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미국과 소련 등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나이지리아 내전에 개입하게 되었고 비아프라 내전은 국제 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00만인에 이르는 아사자를 내게 하는 나이지리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 되었다.
1970년 1월 오주크와 장군은 비아프라 정권을 에피옹 소장에게 이양하였고 오주크와 장군은 아이보리코스트로 망명하였다. 연방 정부군에 의해 비아프라군은 비아프라 지역을 뺏기게 되었고 비아프라 정권은 연방 정부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내전은 2년 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고원 정부는 1970년 4월에 나이지리아 내전으로 인하여 사회 전반이 침체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제2차 국가개발 4개 년 계획을 계속해서 실시하였으며 국내 개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3년 이후 나이지리아는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석유개발을 하게 되었고 수출 증가로 인해서 국가 수입이 증대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석유수입으로 인해서 경제 부흥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1975년부터 1981년 까지 계속적인 국가개발정책을 진행시키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고 경제력으로 인해서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83년 12월 말에 제 5차 군부무혈쿠데타가 일어나고 샤가리 대통령의 민간정부는 붕괴하게 된다. 군사정권은 부하리 소장을 의장으로 하고 19명으로 구성된 최고 군사회의를 설치하고 최고 통치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부하리 군사정부는 샤가리 민간정부 말기에 만연했던 정치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경제 부흥을 꾀하며 사회 모든 기관의 기반을 재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서 정책을 펴 나갔다. 부하리 정권은 노동 시장을 보호하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중장기 계획으로 대외 채무의 반환을 행하는 등 노력을 하여 국제수지의 흑자를 이룩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으나 석유의 지나친 과잉 생산으로 인하여 오히려 경기가 악화되었고 국제적인 석유가격 폭락 율로 인하여 인플레,실업률,산업계 불황이 계속되었으며 경제상황을 개선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부하리 군사 정권은 언론의 통제 등 인권 억압적인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게 일게 되었다.
1985년 8월 제6차 쿠데타가 발생하여 부하리의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신 군사 정권은 전 육군 참모총장인 바방가다를 대통령 겸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고 28명의 군사 통치 위원회를 설치 통치기관으로 삼는다. 바방가다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민간 정부로 이관시키는 과도기적인 정권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방가다 정권은 부하리 정권의 지도력 상실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 부족,지도층의 권력남용,경제개혁정책 실패 등 부하리 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단정하였으며 정권 확립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경제를 재건하여 경제적 낭비를 없애고 정과 부패척결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계획보다 앞당긴 1992년에 민정 이관을 목표로 해 1987년에 [민정 이관 프로그램]을 발표하게 되었다. 부하리 정권은 부패한 문민 정권의 정치적 전통과 결별하기 위하여 공의 경험이 있는 정치가와 정치 경험이 있는 군인의 정치활동의 참여와 과거에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한편 1991년에 정치활동의 규제조치를 해제하였다. 1990년 4월에 북부지역의 군부세력 들이 부 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10시간 만에 진압되었고 쿠데타 기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며 쿠데타 가담자 69명이 모두 총살당하게 됨으로써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993년 8월에 하기로 한 민정이양계획을 바방가다 대통령은 3차례나 연기하였고 민정이관을 완료시킨 후에 퇴임하겠다고 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93년 6월 12일 양대 정당 대선을 실시하였으나 바방기다 대통령이 아비올라 후보에게 패배하자 선거 부정을 이유로 무효화 시킨다. 국내외의 강한 반발 여론과 압력에 의해 바방기다 대통령을 1993년 6월에 사임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역사에 군사정부가 민간정부에 이양한 것은 1979년 오바산죠 군사정부가 선경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샤가리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이 최초이다. 바방기다 대통령은 스스로 민간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하였으나 결국 지키지 못하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의 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1993년 1월부터 과도내각을 이어 온 쇼네 칸을 수반으로 바방기다 대통령이 물러난 후 임시국민정부가 출범하였다.1993년 11월에 아바차 국방장관이 쿠데타를 주도하여 쇼네 칸이 이끄는 임시국민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하게 된다. 기존의 행정과 입법기능을 일시에 정지시키고 정당활동도 금지시킨다. 군부가 국정 운영을 전부 장악하게 되었다. 아바차 장군은 PRC(임시통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주지사 전원을 군부 인사로 대체 하였다. 1994년 NCCC(헌법 회의 위원회)를 발족시켜 제1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하였다. 정치 일정은 제일 먼저 기초 단위인 선거인단을 선출할 예정이고 헌법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헌법 회의를 출범하며 헌법 초안을 작성하여 정부 심의를 받을 계획을 세웠다. 1993년 대선에서 승리한 아비올라는 자신이 정통성 있는 대령이라고 1994년 6월에 선언하였으나 아바차 정권에 의해 강제 구금된다. 1994년에 석유가스노조는 아비올라의 석방을 촉구하며 파업을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1995년에 나이지리아의 아비올라 군사정권은 정치활동의 금지를 해제하였고 제2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할 예정이지만 나이지리아의 헌정복귀는 아직까지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5.인구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12,628만 명이다.(92년 통계)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다.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아직 인력을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여 실업률이 높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성장률은 3.3%이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수명은 50세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인 53세보다 낮으며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평균 수명이 매우 낮은 편이다.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의 지리상 위치는 대륙 횡단의 교차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는 여러 민족과 문화를 접촉할 수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주하여서 살게 되었고 나이지리아는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전 세계에서 9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는 인력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에는 약 250개의 부족이 살고 있으며 각 부족들은 고유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10대 부족은 나이지리아의 약 250개의 부족 중에서 90%을 차지하고 있다. 즉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9/10라고 보면 된다. 10대 부족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가진 부족을 나이지리아의 3대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3대 부족들에는 하우사 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들어가게 된다. 3대 부족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65%이고 약 250개 부족은 35%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분포를 보면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교적 살기 편한 북부지역의 카노 남부지역의 라고스에 집중되어있으며 전체 인구의 약 35%가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농촌에서는 65%가 거주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인구 조사를 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몇몇 부족들이 인구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출생률이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높고 인구 조사에 정확도와 신뢰도 등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정확한 인구 추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6.민족
나이지리아는 지리적 위치가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지에 있으므로 민족과 문화와 언어가 매우 다양하다.나이지리아에는 현재 약250개의 종족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3대 부족이 있는데 하우사/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하였는데 영국이 지배하고 있을 때 나이지리아를 연방 공화제로 통치하게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3대 부 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으로 경계선을 삼아서 통치하였다. 북부지역은 하우사/풀라니족,남서부 지역은 요루바족, 남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3대 종족의 비율은 나이지리아 전체 부족의 약 65%이고 기타 250여 종족이 35%를 차지하고 있다.
3대 부족 외에 더 작게 세분하면 10대 부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근거는 언어이다. 10대 부족들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쓰고 있다. 3대 어족에 해당되는 하우사/풀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있고 그 밖에 카누리족,티브족,에도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이 있고 이들 부족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른다. 부족간에는 서로 강한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지역 안에서 잦은 충돌이 있다. 그러나 북부지역과 남서부지역, 남동부지역에는 각각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부족이 있으므로 소수 부족들은 그들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각 부족이 고유의 전통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부족에 대한 우월감이 높은 편이다. 나이지리아의 정, 사회에 안정을 찾지 못하는데 대하여 서로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정치권 대부분 사람들은 3대 부족 중에서도 최대의 부족인 하우사/풀라니족의 출신이다.하우사/풀라니족들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로서 북부지역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다. 요루바족은 나이지리아의 남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요루바족은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의 비율이 반반이다. 나이지리아에 이슬람교가 울창한 삼림지대인 지역적 요인으로 인하여 빨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이보족은 나이지리아의 동부지역에서 주로 살고 있으며 1967년 비아프라 내전의 주무대가 되었다. 동부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북부지역의 하우사 풀라니족의 이보족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게 되자 마침내 비아프라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예전부터 포루노 왕국과 풀라니 대제국, 하우사 왕국, 베냉 왕국, 오요 왕국등 각 부족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에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단결과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시절부터 나이지리아는 각 주가 부족들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가 각 부족들을 잘 화합하는 것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며 그로 인하여 정치와 경제,사회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7.언어
나이지리아의 언어는 방언을 포함하여 250여 종의 언어가 있다. 나이지리아의 공용어는 영어이고 나이지리아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로 교육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각 종족의 언어가 주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와 상거래에서는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진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고유 언어에 종족의 색채를 가미한 언어로써 상거래가 활발한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영어에서 언어를 많이 차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다.
북부지역에서는 식민통치 때부터 계속해서 하우사어가 공식,비공식 언어로 사용되어 졌다. 북부지역에서는 하우사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소수 부족들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포기하고 강제적으로 하우사어를 써야 했다. 하우사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남서부는 요루바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으로 대부분 요루바인족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는 데 이 지역은 외국인들의 출입이 빈번한 지역으로 주로 이보족의 언어가 사용되어져 왔으나 현재는 정치와 경제 변화에 따라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영어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사용하는 정통 영어가 아니고 그들의 고유언어와 혼합되어져 나이지리아화된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는 지역마다 영어의 악센트를 서로 다르게 하는 경우가 많으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이지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를 실용적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상호간에 사용하는 영어를 독자적인 표현 방법으로 쓰기도 한다. 영어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표현할 때 다른 언어보다 간단하게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지역마다 사용되어 지는 언어는 가가 다르다고 하였는데 크게 세 개의 언어군으로 나눌 수가 있다.먼저 아프로-아시아틱 언어군과 니제르-코르도 파니안 언어군,닐로-사하란 언어군으로 나누게 된다.아프로-아시아틱 언어는 차드어인대 드어는 북부지역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하우사어가 바로 여기에 속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인의 25%가 사용하는 제1의 언어군이고 나이지리아인의 10%는 아프로-아시아틱언어를 제2의 언어군으로 사용하고 있다. 둘째로 닐로-사하란어군에 포함되는 언어는 사하란어, 송하이어 자르마, 덴디어 등이 있다. 사하란어, 송하이어는 나이지리아의 다수 종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주로 북동쪽의 카누리족이 사용하고 있다.마지막으로 니제르-코르도파니안 언어군은 150여 개의 언어가 베냉어 , 콩고어, 이비비오어, 아나앙어, 티브어에 속하고 있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1%이다.또 기타 어족으로 크와어가 있는데 나이지리아에서 50여 개의 종족이 사용하고 있다.크와어족에는 요루바족과 이보족도 포함이 되어 있고 그 밖에 구르어, 만데어, 서대서양어가 있다.
8.종교
나이지리아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기독교가 약 30%를 차지하며 부족 고유의 토속 신앙이 10%을 차지한다.나이지리아에는 국교가 없다. 북부지역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데 하우사족이 대부분이다.한편 요루바족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각각 50%씩 이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충돌을 일으키키도 한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성의 지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편이다. 타 지역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도층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로 약 95%가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져 있고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 보아서 나이지리아에 종교적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교는 11세기 하우사 왕조 EO에 이슬람 문화와 함께 전파되었고 이때 아라비아 문자도 전래되었다. 이슬람교의 다수를 이루는 종파는 수니파이고 남서부의 이슬람교도인들은 인도에서 발생된 수니파가 아니면 이단이라고생각하는 아흐마디야파를 믿는다. 나이지리아에서 이슬람교의 주종을 이루는 수니파는 집회가 특색이 있어서 집회에 의해 구별할 수 있도록 차림새와 의식을 갖추게 된다. 기독교는 예전에 비해 급속도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선교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자수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나이지리아 주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도 신자수를 증가 시킨 요인이 되었다.나이지리아에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융합 되어 있다. 19세기에 나이지리아에 전파된 기독교는 분파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 기독교는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의 생활과 도시 생활을 반영하여 신앙의 발전을 도모하여 왔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교리, 의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토속 신앙과 융합하여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으로 토속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믿음을 바꿔 나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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