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

africa club 2001. 11. 13. 19:59
우간다는 동부 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 케냐에 다음가는 작은 나라이다. 인구 1,760만명으로 지형상 적도가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고지인 탓에 사람살기 적합한 기후를 갖고 있다. 한국의 2배나 되는 넓이의 빅토리아 호수에 임하고 있으며 인근 다른 나라에 비하여 강우량이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의 적지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간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감탄한다. 특히 주변의 사막과 초원만을 보다가 이 나라에 들어오면 높고 낮은 기복이 교차되는 산세와 우거진 삼림 사이를 흐르는 시내들이 아름답다.
수도 캄팔라는 인구 85만의 도시인데 오랜 내전으로 지금은 황폐되었지만 도시의 위치 와 거리의 구조가 동양적이 인상을 주어 내란 전 평화시의 번영을 넉넉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일찍이 처칠이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표현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1862년 영국의 스페케가 나일강의 근원을 찾을 셈으로 이곳에 처음 왔었는데 그때 벌써 이 지역에는 부간다 왕국이 있었고 또 그 주변에 붕요로, 앙콜레, 토로 등 6개의 소왕국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유럽인이 오기 전 이미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인근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개화되었음을 말해준다. 1877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가 와서 기독교를 선교하기 시작했고 1879년에는 카톨릭 교회가 들어왔다. 그후 1897년에 이르러 우간다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영국은 각 왕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식의 간접지배 정치를 해왔다. 이때에 이들 왕국에 속하지 않은 지역은 영국 지배하의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했다.
1962년 3월 영국은 이들 왕국을 우간다 연합왕국으로 구성,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 우간다의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이 연합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전 우간다 왕국의 카바가 왕 무테사2세가, 부통령에는 붕요로 전 왕국의 나다오프, 총리에는 밀튼 오보테가 임명되었다.
후에 오보테는 무테사 대통령을 추방하고 정권을 잡았다. 대통령은 군대가 왕궁에 침입하였을 때 간신히 몸을 피하여 영국에 망명, 가난과 시름 속에서 1969년 사망하였다.  훗날 아민이 정권을 잡고 1971년 이 왕의 유해를 모국에 실어다 안장함으로써 국민의 환심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신생 독립국 우간다의 정권은 오보테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디 아민으로 이어지면서 폭력과 00학정이 난무했고 오늘의 비참한 정세에 이르게 되었다.
오보테가 정권을 잡는데는 1966년 당시 육군 사령관이었던 아민의 공이 컸다. 1967년에서 71년까지 오보테 정권은 여러 형태로 권력을 남용했다. 자기 출신 부족인 랑고인만을 군 및 기타 정부의 고위직에 기용하여 불평을 샀다. 그가 싱가포르를 방문으로 국내에 없을 때에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를 추방하고 우간다의 정권을 잡았다. 오보테는 귀국 도중 기내에서 이 뉴스를 듣고 탄자니아로 망명했다.
아민은 1925년 우간다 북부 나일강 유역에 있는 소수민족 가구와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21세에 영국군에 입대하였고 1951년에서 60년까지 헤비급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었다. 우간다의 국민들이 6년간의 오보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무렵 등장한 아민은 국민들에게 큰 기대감을 주었다.
1971년 아민은 당시의 나이 46세로 우간다의 제 2대 대통령이 되었다. 초기의 국민 환호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권하자마자 정당활동을 금지시켰고 입법, 행정, 사법과 군대를 한 손에 잡고 국군과 비밀경찰을 공포 정치의 무기로 삼았다. 아민의 사병은 그 4할이 외국인인 누비아족으로 부르는 수단인 이고 나머지 반은 자신의 고향인 서 나일지역 출신의 이슬람교도로 채웠다. 전 오보테 대통령의 출신부족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학대했다. "신이 꿈속에서 자기로 0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고 하면서 경제의 우간다화를 내걸고 1972년 8월 우간다 경제의 주권을 잡고 있던 영국적 아시아인 약 8만 명을 맨손으로 내쫓았다. 이들은 대부분 인도인이었다. 아민은 이들이 우간다의 경제발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과소 평가한 것 같았다. 그는 또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예 종주국인 영국과 구미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였으나 아민 대통령은 오히려 1973년 3월에 "영연방 수뇌회의에 참석하니 영 왕실의 특별기와 경비용 친위대를 보내라"고 호통을 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우롱하기도 하였다.
아민은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농, 상인, 관료 등 유력 집단을 서로 대립시키는 분리통치의 수법을 사용했다.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는 가차없는 고문, 비밀살해 또는 집단살해를 단행했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입회 하에 살해하였다.  당시 유명인이 갑작스레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하거나 행방이 절연해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이렇게 살해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최고 권력 기관인 "방위 평의회"회원 7명은 모두 아민의 친척이 거나 동족인데도 1977년 말에 이르러 그중 6명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잔인한 정치를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공포정치 하에서 농업, 상업은 정체되고 행정은 마비되었으며 일상 필수품이 모자라고 물가고와 극심한 인플레가 일어났다.
농민은 공영시장에 농산물을 내놓으면 이윤이 남지 않으므로 코피등의 주요산물을 밀수출한다. 우간다의 공업도 역시 주로 농산물 가공업으로 농업의 부진이 곧 공업의 정체와 연결된다. 이에 외화 수입의 9할을 정하는 코피가격의 하락과 인권문제에 따르는 미국의 제재 등으로 구미제국에 대한 수출(전 수출의 약 80%)이 떨어지자 경제는 격심한 위기 에 처했다.
군은 처음에 주거와 식품 등 물질적으로 우대를 받았다. 일반 시민들은 식빵, 소금, 설탕, 등을 얻기 위하여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군 상층에서는 케냐나 영국으로 출장가서 사치스러운 물건을 사며 즐겼다. 그러나 아민은 1973년 이후 이들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압수하고 대우나 승진도 대통령 지신의 기호에 따라 좌우하였다. 대통령 출신지역의 군인이 아니면 신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군인들은 또 다른 형태로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아민의 첩보망은 국민 속에 파고 들어가 있었으며 반란 응모가 발각되는 즉시 처형되었다.
반 아민의 기세가 전 군대에 파급되자 아민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옆 나라 탄자니아가 우간다를 침략하려한다. "는 허위보도를 흘려 우간다 군을 탄자니아 영내로 침입시켰다. 2∼3일 내에 우간다 군은 카재라 강에 접한 탄자니아 지역의 약710평방 마일을 점령하였다. 빗발 같은 세계의 여론에 따라 수일 내에 군을 철수시키기는 하였으나 탄자니아는 그 사이 약탈과 인명의 손실을 많이 보았으며 당시 탄자니아의 대통령 니에레레는 뱀들이 우글거리는 우간다의 정글을 없앤다하여 즉각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사태는 아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979년 탄자니아 정규군과 "아민 타도"로 단결한 망명 우간다인 조직인 우간다 민족해방전선에 속하는 군인 약4,000명이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관계로 수도를 방위하고 있던 리비아군 2,000명도 반 아민 세력을 막기에는 부족하여 같은 해 4월 6일 캄팔라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아민 대통령은 수도 캄팔라에서 80km지점에 있는 우간다 제2의 도시 진자에서 전용기를 이용, 리비아로 탈출했다. 이것으로써 악명 높은 검은 히틀러 아민은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1981년 2월 그는 망명중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미국의 AP통신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나는 지금 보통 사람이다. 요리도 하고 다림질도 하고 또 청소도 한다.  열두 명의 아들과 열 명의 딸이 있는데 한달 식비가 100달러이다. 나는 가난하다.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와 같이 스위스 은행에 예금해 놓은 돈도 없다. 내 아이들의 교육비를 미국 정부가 좀 마련해 줄 수는 없을까. 나의 조국 우간다에서는 13,000명의 지지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호국의 지원만 있으면 일주일 내에 우간다를 탈환할 수 있을 텐데..." 한때 종신 대통령, 육군 원수, 외무, 내무, 국방, 정보, 방송, 보건, 관광상들을 정무하며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아민 장군이 모국에서 추방되어 사우디 등 이슬람교 나라들을 방황하고 있다. 현 대통령 무세베니는 1989년 말 대통령 임기가 끝나지만 한번 더 대통령을 해야겠다는 말 한마디로 총선 없이 제 2기 대통령이 되었고 모든 각료들이 유임되었다. 그러나 유스후 후레 대통령의 잠정 정부, 고드퇘리 정부 등의 혼란기 이후 1986년 정권을 잡은 무세베니 대통령은 집권 이후 도로, 보건시설, 산업기관 등 많은 것을 개선하였고 특히 치안 상태 개선에 많은 힘을 기울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세베니 현 우간다 대통령은 1990년도에 OAU 의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