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잠비아의 카운다 대통령

africa club 2001. 11. 6. 15:51
1990년 7월 초 폭도들이 정부가 식량가격을 올린 데에 반대하여 수도에 몰려들었다. 그들의 제일 목표지는 오힐렌제로 알려진 시 일각 에 있는 자그마한 돌집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10여명의 폭도들은 철책을 떼었다.  이곳은 대통령이 지금까지도 집권을 하고 있는 당시 당년 66세의 카운다의 옛집이다. 루가사이에는 그런 집이 두 곳에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가 정부재정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식량과 기타 생활 필수품 가격을 근 2배로 올린 것이 결국 23명의 희생자를 낸 폭동의 원인이 된 것이다.
잠비아인은 한 가족이 2주간 먹을 수 있는 식량 25kg들이 한 부대에 3.5달러에서 7달러를 지불하게 되었다. 잠비아인의 평균 연 수입은 300달러이다. 여기에 흥분한 육군 중위가 잠비아 라디오 방송국을 몇 시간 점령하고 "카운다가 물러났다"고 방송을 했다. 비록 이 사건은 곧 진압이 되었지만 이는 시민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으며 "육군이 카운다 정부를 무너뜨렸다. "는 소식을 듣자 수백 명의 시민들이 시 중심으로 뛰쳐나와 환호를 올렸다. 국민들의 이러한 반응은 국민들이 정부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번 가격 인상은 경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산을 긴축하고 세계 은행이나 IMF로부터 원조를 받기 위하여 책정된 몇 가지 변화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 소동은 장기간의 일인 독재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었으며"KK는 물러가라, 일당제도 사라져라"고 절규했다.
잠비아의 독립 후 지난 30년간 카운다는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지도해온 이 지역의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독재와 일당주의가 한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시기에서부터 정권을 유지해온 사랑이다. 중앙집권이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믿어온 카운다는 최근까지도 국민경제의 90%정도는 정부에서 관할해야 한다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 나라의 부채는 1인당 1,000달러이며 이는 사하라 이남지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760만 인구의 50%가 도시 지역011 살고 있다.
카운다는 1972년 일당제를 선포하고 당 독재의 정치를 실시해왔으며 고위직들의 부패가 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즉 다이아몬드와 기타 광물의 연간 생산의 80%가 딴 나라에 밀수출되었다고 한다. 동의 국제시세가 급격히 하락되면서 국가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외채의 도입이 늘어났다.
카운다는 기독교인인 신사이며 대중 앞에서의 연설에서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으로 국민에게 인기 있는 정치가였다. 1986년 이 나라가 IMF의 권고에 의하여 긴축재정을 택하였을 때에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 당시 카운다는 외채지불을 연기하고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신 식민주의의 앞잡이라고 생각하는 IMF의 요구를 일축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카운다는 지금 당시의 IMF권고와 같은 중대한 변화를 감행해야 하는 시기에 놓여 있다.
1990년 7월 25일 카운다 대통령은 모든 정치법을 석방한다고 발표하면서 다당제 채택을 위한 국민 투표는 90년 10뭘 17일 예정에서 91년 8월 13일로 연기했다. 그 이유로는 잠비아의 수백만 국민에 대한 선고인 명단이 불분명하다는 것으로써 국민들을 사법부에 빠른 시일 내로 새 선거인 명단을 작성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90년 8월 한달 동안 실시되었던 수도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는 해제하였으나 25년이나 계속되었던 전국의 비상조치 해제 요구는 외부 세력의 침입위협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국민들은 새로운 인물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절감0하고 있기는 하지만 장비아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잠비아는 아프리카의 4대강 중 하나인 잠베지강이 있는데 독립 후 나라이름을 잠베지강의 이름을 따서 잠비아라고 했다. 독립 후 이 나라의 주요 당으로는 두 개의 당이 있었는데 1968년 카운다는 국가통합이라는 명목으로 야당을 말살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심지어 어린 시절의 친구까지도 가차없이 탄압하고 형무소로 보낸다. 카운다는 1988년 임기 5년의 제 6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3년 제 5대 선거에 비하여 득표 율이 적은 것은 현정부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잠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전망이 밝은 성공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銅)의 세계 생산량의 4분의 1일 잠비아에서 생산되고 1970년대에는 연 10억 달러의 수출을 했다. 그러나 동의 국제 시세가 하락하였고 KK가 주장하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아프리카의 사회주의는 이 나라에선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