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케냐의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 대통령

africa club 2001. 11. 6. 15:34
모이 대통령은 1924년 생이다. 케냐타 초대 대통령 밑에서 10년간 부통령을 지내다가 케냐타 대통령이 사망한 1978년 이후부터 대통령직을 맡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죠모 케냐타는 케냐의 47개의 부족 중 그 수가 가장 많은 키쿠유족의 사람이었으나 모이 대통령은 서수 부족인 카렌진족 출신이다. 부족간, 지역간의 대립과 마찰은 아프리카의 공통적 문제로서 케냐도 예외는 아니다. 공용어로서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많은 부족들이 제각기 저마다의 언어를 쓰고 있다. 하나의 국민이라는 의식보다는 부족간의 소속의식이 더 크기 때문에 다른 부족에 대한 불신과 경쟁심이 국민의 단결의식, 나아가 통일된 한 나라의 문화를 갖는데 저해요소가 된다.
과거 케냐타 대통령 시대에는 "하람베"(다함께')라는 표어로 국민의 결속을 다짐했고 현 대통령은 "니야요"라는 구호로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잠비아의 "원 네이션,원 잠비아"와 같은 의도의 슬로건이다. "니야요"는 평화사랑 단결을 뜻하며 스와힐리어로 "발자국" 이라는 뜻인데 당신의 발자국을 따른다는 즉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 된다.
대통령이 나타나는 곳에는 관중들이 일제히"니야요"를 제창한다. TV, 라디오의 뉴스 시간에는 다니엘 아랍 모이 대통령 각하로 시작되며 전신주 곳곳에 모이 대통령의 사진이 붙어 있고 이 나라 화폐에는 액수 여하를 막론하고 모이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광경은 남아공을 제외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모이 대통령은 양떼를 모는 가난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교원생활에서 정계에 들어온 실무형 대통령으로 교원출신답게 국민들에게 "과음하지 말라"눈 등의 설교를 많이 한다. 케냐타와 같은 카리스마적 이미지는 없으나 대부족인 키쿠유와 루어족의 싸움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부0족 파벌간의 알력을 잘 조성하는 노련한 정치가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독재의 욕심이 생겨나면서 여당 아프리카 민족동맹(KANU)에서 정적 오깅가 오데인가 원 부통령을 추방하고 KANU의 일당제를 입법화하고 모이 정치에 비판적인 유력인물, 간부, 대학교수, 학생들을 탄압했다. 최근에는 그도 축재를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1982년 8월1일에 모이를 축출하자는 쿠데타가 공군에서 발생했고 최근 1990년에도 불발 쿠데타가 생겨 모이의 권위는 여지없이 땅에 떨어졌다. 이 두 사건의 배경에는 부통령으로 있다가 쫓겨난 "오깅가 오데인가"의 측근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1982년 쿠데타에 반군은 라디오를 통해서 쿠데타의 성공을 발표했다.  "악당 모의는 추방되고 독재정치를 대신하는'국가 구제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우리들은 탐관오리, 부족주의, 친족주의를 없애고 자유의 확립을 목표로 한다. 헌법은 정지되었다." 등의 발표를 해 국민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같은 날 상오 11시에 이 라디오 방송국은 육군부대에 의하여 재탈환되고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129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은 육군부대에 의한 공군병사들이며 부상자 수는 시민을 포함 약 5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만일 이 쿠데타가 성공하였더라면 이 나라에는 소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동부 아프리카의 정치판도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이 사건이 불발로 끝났을 때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맨 먼저 모이 대통령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사건 후에도 모이는 여전히 민주화에 관심이 없고 총선을 통하여 다시 모이의 위세는 더 당당해졌다. 모이는 서방국가에 대한 차관 외교에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한다. 최근에는 독일로부터 4억불의 빛을 탕감했다는 소식도 있다. 또한 모이는 인도양의 항구 "몸바사"항의 기지를 미국에 빌려주고 있는데 이 미해군 기지는 소위 야당의 비판을 받고 있고 또 케냐의 인도인 존재가 늘 화근이 되어 왔다. 82년 쿠데타 사건의 한 원인도 인도인 문제가 들어 있다고 한다.
케냐의 흑인은 가난한데 인도인은 잘 살고 있다. 이들은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케냐라는 나라보다 사리사욕의 폭리만을 쫓는다는 것이 현지인의 인식이다. 1990년 1월 내가 나이로비에 있을 때 들은 일인데 인도인 상인이 300만 달러를 밀반출하려다가 당국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로 인해 인도인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은 크다.
1990년 7월 7일 발생한 케냐의 소요사건은 모이가 OAU참가자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에 발생하였는데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에도 외국에 갔을 때 추방되는 일이 많았다. 이 사건은 수도 나이로비 뿐 아니라 지방 도시에까지 비화했으나 주모자 중 2명이 현지 미 대사관에 도피했고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불발로 끝났다. 이 소요는 자신의 출신 부족인 칼렌진과 그 측근에게만 혜택을 주는 모이 정권의 독재에 맞서 날로 저하되는 국민생활의 향상을 바랜 젊은이들의 거사였다. 민주주의 바람이 아프리카에도 불고 강경 보수주의자들인 코트디브와르, 가를, 자이르, 장비아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당제를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케냐의 국민이 질시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루탄을 쏘고 일부 지역에서는 총격까지 梨다. 케냐 정부는 성명을 통해 이 같은 폭력사태는 불량배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하고 폭동진압을 위해 필요한 모든 무력을 사용하도록 경찰에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모이 대통령은 케냐가 다당제를 도입할 경우 케냐의 40여개 부족이 각각 정당을 설립, 민족분열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감금된 사랑들을 석방하라는 요구에 대하여 그 불량배들에게는 동정을 하고 그들 때문에 희생된 사랑 또는 재산의 손해를 본 사람에게는 왜 동정을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어쨌든, "아프리카의 우등생"은 하나의 허상으로 기대에 어긋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적으로 열등생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물론 케냐의 현상이 민주주의의 이상에서 볼 때 거리가 있지만 모이 대통령을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아프리카에는 모이 정도의 독재적 지도자가 많은데 사실상 케냐의 현 정권을 강권정치라고 하기에는 경미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는 언론 정치활동의 자유와 인권이 확립되지 않은 나라가 아직 많다. 부족주의가 강한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가에서 건실한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일이며 오히려 내전의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 줄리우스 니에레레의 60년대의 이론인데 세계가 다당제를 채택해가는 경향이 있고 독립 후 벌써 40년이 가까운 이들 아프리카 나라에서 아직도 부족의 갈등이 무서워 다당제를 도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명분을 읽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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