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남아공의 만델라 2

africa club 2001. 10. 29. 17:04
94년 5월 만델라가 남아공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같은 틀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를 위해서 이제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해결하고 아프리카의 미래도 아프리카인들 자신이 개척해야 한다는 만델라의 주장은 검은 대륙에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정통성 있는 권력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과 더불어 아프리카의 신세대 지도자로 통하는 만델라는 스스로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아프리카의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만델라가 취한 문제의 해결방법 또한 기존의 아프리카 지도자들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었다. 만델라 이전의 대다수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국내 또는 지역분쟁 해결을 위해 걸핏하면 과거의 종주국인 프랑스나 영국으로 달려가 자문을 구하고 원조를 청했던 것과는 달리 만델라는 분쟁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견해를 교환했다. 나이지리아 군사정부의 독재에 대한 국제적 비판여론을 조성한 것을 비롯해 앙골라 평화협상, 수단·레소토·스와질랜드 등 여러 국가들의 내전과 국내 갈등을 조정하는 일에 앞장섰다.
50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20년간 지속돼 온 앙골라내전의 중재를 위해서는 지난 1월 초 호세 에두아르도 도세 산토스 앙골라 대통령과 반군지도자 요나스 사빔비를 자신의 고향인 트란스케이로 초대해 회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5월의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중에는 아프리카대륙에서 중재자로서 만델라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과시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만델라가 내전중재에 나설 무렵 자이르 상황은 로랑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의 수도 킨샤사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반면 수도 킨샤사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외국인 용병을 포함해 모부투에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짐한 친위대 성격의 정부군이 수도 사수를 결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빌라반군이 수도를 향해 총공격에 나설 경우 킨샤사 장악은 시간문제였다. 모부투정부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킨샤사 시민들은 물론 대다수 자이르 국민들은 독재자 모부투에 등을 돌린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모부투 대통령은 그 당시 이미 지병인 전립선암이 심화돼 반군의 공세를 막기 위한 군사작전을 지휘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반군의 승리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킨샤사에서 반군과 정부군의 물리적 충돌이 현실화될 경우 엄청난 인명피해가 우려된다는 점이었다. 유엔 등 국제사회가 염려한 것도 바로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였다.
모부투의 명예로운 퇴진과 반군측에 대한 평화적 권력이양문제를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평생을 독재자로 살아온 모부투와 승리를 눈앞에 둔 카빌라간의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한 타협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협상중재역할을 직접 떠맡았다. 그는 공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남아공선박을 회담장소로 제공했다. 자이르의 대통령과 반군지도자로 30년 넘게 반목을 거듭해 온 모부투와 카빌라의 만남도 비로소 실현됐다.
표면상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반군지도자 카빌라는 모부투가 자신에게 즉각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모부투는 카빌라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임시과도정부를 구성, 과도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겠으며 과도정부 주도하의 선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만델라가 중재한 회담 그 자체는 실패였다. 하지만 만델라와 국제사회가 의도했던 최소한의 목표는 실현됐다. 모부투 진영은 킨샤사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포기, 망명을 택했다. 만델라의 자이르내전 중재는 결과적으로 킨샤사에서의 군사적 대결을 피하게 하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해 준 셈이었다. 아프리카대륙에서 만델라의 위상이 짧은 시간 내 급속히 제고될 수 있었던 데는 경제외교 분야에서의 활동도 큰몫을 한 것으로 지적된다. 그는 아프리카국가들의 경제적 자립능력 결여가 정치적으로 서방에 대한 예속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서방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셈이다. 따라서 만델라는 아프리카국가들의 빈곤퇴치 뿐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자립을 위해서도 경제발전이 시급하다는 판단 하에 아프리카가 더이상 선진국을 위한 자원공급지나 소비재시장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주변 국가들에 설득했다.
만델라는 또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을 위해 아프리카국가들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지역경제공동체 창설에 눈을 돌렸다.
만델라의 이같은 구상을 실천하는데 남아공의 경제력은 큰힘이 되었다. 남아공의 국민총생산(GNP)은 96년도의 경우 1천3백억달러로 전체 아프리카대륙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아프리카에서는 절대적 비중을 점하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국가들간 경제협력을 활성화할 본격적 지지를 결성을 주도하기 위해 96년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의장에 취임했다.
남아공 등 남부아프리카의 12개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SADC는 지난 79년 결성됐지만 만델라의 집권 이전까지는 눈에 띄는 활동을 벌이지 못해 왔다.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맡아야 할 남아공이 흑백차별정책을 시행하는 탓에 주변의 흑인정권들과 진정한 협력분위기를 조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델라가 SADC의장에 취임하면서 남부아프리카지역 국가들간의 경제협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아공과 주변 국가들을 연결하는 도로·철도망의 확장하거나 새로 건설하는 작업이 시작됐고 인근 국가들에 대한 남아공의 투자도 확대됐다.
이같은 변화에 힘입어 지난해 SADC국가들은 동남아국가들에 버금가는 평균 6. 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SADC 12개 회원국을 가리켜 「아시아의 호랑이」에 비유한 「아프리카의 사자」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오는 2004년까지는 SADC를 유럽연합(EU)과 같은 자유무역지대로 탈바꿈시킨다는 청사진도 마련됐다.
SADC를 발판으로 아프리카대륙의 경제를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만델라의 구상은 시간이 갈수록 현실성을 높여가며 공감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만델라의 위상은 경제협력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만델라 대통령이 이처럼 외교·내전중재·경제협력 분야에서 단시일 내 아프리카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부상한 원동력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아프리카인들은 만델라의 개인적 능력과 비전, 그리고 도덕성이 질문의 해답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남아공에서 3백년 넘게 지속된 흑인에 대한 차별정책을 피흘리는 혁명 대신 백인정권 지도자들과의 끈질긴 대화와 인내심이 뒷받침된 협상을 통해 성취해 낸 탁월한 정치력의 소유자다. 그의 조리있는 설득과 불굴의 신념, 국내외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진단하는 판단력은 협상테이블에서 만델라로 하여금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델라의 도덕성 또한 그를 아프리카의 다른 지도자들과 차별화시키는 주요요인으로 지적된다.
재임 중 60억~80억달러의 국가재산을 빼돌리며 정권연장에 연연했던 모부투 전 자이르 대통령 등 상당수 아프리카지도자들과 달리 만델라는 정권연장기도나 축재와는 거리가 먼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집권연장을 기도할 필요가 없는 만큼 미국프랑스 등 외세에 비굴해질 이유도 없다. 그는 지난 60년대 유럽국가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서도 수십년간 무능력하고 부패한 독재자들 때문에 실망해 온 아프리카인들에게 아프리카에서도 도덕성과 능력을 겸비한 지도자가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만델라가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지난 93년 소말리아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인명손실을 경험한 이후 아프리카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여왔다. 아프리카 종주국으로 자처해 온 프랑스 역시 경제적 이유 등으로 아프리카 주둔병력의 점진적 축소계획을 발표하는 등 아프리카에서의 군사활동을 점차 기피하려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미국 등 서방진영은 아프리카인들의 존경을 받는 만델라라는 흑인지도자의 등장을 내심 환영하고 있다. 그가 골치아픈 아프리카 문제해결의 중재자 역할을 맡아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를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대접해 준다는 입장이다.
만델라는 이처럼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로 떠오르고 있는 자신의 위상에 대해 표면상 달갑지만은 않다는 입장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 보다는 21명에 이르는 손자·손녀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델라는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라는 역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한 남아공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국내외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만일 나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온다면… 나는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자신이 아프리카의 대부라는 정치적 짐을 떠맡을 의사가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만델라의 정치적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만약 그가 아프리카의 정치적 맹주가 되려고 하는 야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라는 원래의 목표뿐 아니라 남아공의 국가적 이익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일부 관측통들은 만델라의 궁극적 목표는 남아공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고 분석한다.
현재 유엔에서 논의되고 있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개편안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세계 5대 강국만으로 구성된 안보리상임이사국을 확대 개편하는 작업이 지역안배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전향할 경우 아프리카에도 자리가 하나 배정될 가능성은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치적 선견지명이 있는 만델라가 그같은 상황에 대비하고 있으리라는 점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경제적으로 아프리카대륙의 최강국이라는 남아공의 지위와 만델라 개인의 국제적 영향력을 합해 아프리카대륙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티켓이 할당될 경우 거머쥐려 한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만델라에게 아프리카의 대부라는 지위는 이미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닌 정해진 운명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게 국제사회의 대체적 평가다. 종족분쟁과 자원쟁탈욕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내전과 국경 갈등, 요원한 경제자립이라는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 아프리카의 실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타개하려는 의지를 지닌 인물이 바로 만델라이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인권지도자에서 일약 아프리카대륙 전체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정치적 대부로 강력히 떠오르고 있는 만델라의 향후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세계인들의 관심도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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