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

africa club 2001. 11. 6. 15:47
리비아는 지중해 연안에 1,100마일의 해안선을 갖고 있다. 리비아가 지중해에 접해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풍요로운 자연을 갖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하지만 사실 이곳은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으로 둘러 싸여 있는 황량한 대륙이다. 나라의 90%이상이 사막이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2%에 지나지 않는다.
가느다란 해안선은 하나의 오아시스 격으로 이곳에 주민의 대부분이 살며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리비아는 석유가 나기 이전까지 영, 미에 군사 기지를 제공하는 정도의 가난 한 나라였다. 석유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국민 소득이 갑자기 늘고 막대한 , 석유자원을 물 쓰듯 하면서 세계 각처에 테러단을 보낸 카다피 정권 때문에 리비아가 더욱 세계에 알려지게 되 었다.
리비아는 특히 우리 한국인에게 더욱 인상이 깊다. 그들의 거창한 국토 개발 사업으로 우리의 노무자들이 많이 왕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1989년 7월 27일 대한 항공기가 트리폴리 공항에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를 일으켜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리비아는 과거 역사 가운데 독립 국가였던 시기가 거의 없었다 .카르타고, 로마제국, 스페인, 터어키, 이탈리아 등의 식민 통치를 거쳐 제 2차 대전 이후 다시 영, 불의 지배를 받다가 1951년에 드디어 독립을 하였다. 이 독립은 미, 영, 불, 소의 4대 강국이 UN에서 많은 토의 끝에 결의된 것이며 "이디리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디리스" 정부는 워낙 약체인데다가 리비아 내의 서방 군사기지가 이스라엘 군의 승리에 도움을 주었고 석유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외국 자본과 리비아내의 특권층 사이에 야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국민감정이 악화되어"이드리스" 왕정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자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 왕정을 축출하였다. 당시 카다피의 나이는 27세로 계급은 대위였다. 왕은 카이로로 망명하여 1983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집권한 가다피는 영, 미의 군사기지를 폐쇄하고 2만 5천명의 이태리인 등 외국인을 추방하였다.  또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2,500만 달러의 예금도 동결시켰다.
카다피의 정치체계는 애매한 것이어서 그는 경전 코란에 의하여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 3의 보편이론"에 근거한 쟈마히리야(인민공동체) 사회를 건설한다고 주장한다. 카다피 정부에는 정당도 없고 의회도 없다. 카다피는 인민의 직접 민주주의 이외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한다.
의회는 인민을 기만하는 대표기관이며 민주주의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정당에 대한 카다피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정당은 현대의 독재제도이며 독재적인 통치기구이다. 정당은 인민을 분리하고 어느 한 부분만 대표한다. 정당은 인민을 대표한다고 하면서 인민을 통치한다. 또한 인민의 대표란 실존하지 않는다. 정당은 근대의 부족제도이며 하나의 종파이다. " 그러므로 인민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에서 존재하는 것은 의사 결정기관으로서 인민 회의와 집행기관으로서의 인민 위원회가 있으면 족하다고 주장한다. 다수지배 체제란 51:49의 비율을 통해 51의 집단이 49의 집단을 지배하는 편법의 독재이며 국민의 투표는 어떤 안건에 있어서의 찬부를 묻는 것인데 그 찬과 부의 이유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독재자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카다피는 집권 이후 국토개발과 교육 사업의 일을 많이 추진했다. 강력한 의무교육의 실시로 국민의 문맹률은 90%에서 50%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카다피의 성격이 과격하고 아무리 혁명가라고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도를 넘는 일이 많았다. 어떤 때는 그의 정신상태까지 의심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상 그는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자주 유럽의 정신병원을 찾았다는 정보가 나돌고 있다.
카다피는 막대한 석유자원으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주는 사업을 하지 않았다. 고유가 시대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제국들은 리비아의 석유 값을 잡기 위하여 외채를 끌어들였다. 식량을 살수 없어 1억 5천만 명이 굶고 있는데도 이들에 대한 원조 같은 것은 염두에 없었다. 그는 오직 세계 각처의 혁명운동을 도왔으며 특히 아프리카의 중동에 있어서 많은 나라의 반 정부조직을 돕는데 돈을 많이 嶺다. 카다피는 일찍이 이집트의 낫셀이 아랍연맹공화국(UAR)을 추진했던 것과 같이 리비아를 중심한 또 다른 UAR을 구상하고 모든 아랍 국가들에 강요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다.
카다피는 가끔 소련을 비난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친소파이며 과거 10여 년간에 소련으로부터 10억불의 무기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인구가 작은 리비아는 군인보다 군장비가 더 많은 군사 대국이 된 것이다.
3,000대의 탱크를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수의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있으며 이에 소요되는 예산은 120억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리비아와 미국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리비아는 미국으로부터 식량과 기술을 필요로 하고 또 미국은 리비아에서 많은 석유를 수입했다. 그러나 1979년 리비아의 폭도들이 미국 대사관에 진입한 사건으로 미국은 결국 1982년 5월에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리비아의 석유를 수입하지 않았다. 리비아 국민의 대다수는 카다피가 말하는 혁명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포악한 카다피에게 끌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카다피는 여러 번의 저격 위기를 운 좋게 넘겼다. 1984년 여름, 주 런던 리비아 대사관앞에서 반 카다피 데모가 일어났는데 대사관 안에 있던 군인이 발사하여 영국 여자 경찰관 한 명과11명의 리비아 학생이 사망했다.
이일로 영국과 리비아도 외교가 단절되었다. 1981년 8월 리비아가 자국의 해역이라고 주장하는 시드라 항만 해상에서 미국과 리비아 공군이 일전을 겨루어 리비아의 전투기 2대가 추락되었다. 리비아는 미국을 비난하였으나 곧 자기의 공군이 선제 공격을 했다고 자인했다. 그후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으며 카다피는 미국에 암살단을 보낸다고 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이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웠다. 카다피는 테러를 무서워하는 레이건을 겁쟁이라고까지 농락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1986년 4월 레이건 대통령은 리비아를 공격하였다. 멀리 영국 기지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은 카다피의 집을 폭격하였다. 카다피는 그때 그곳에 있었으나 위기를 모면했고 아들 한 명이 죽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카다피는 5주후에 다시 TV에 나타났는데 시청자들에 의하면 그의 말은 조리가 없었고 아랍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카다피는 친 리비아 국가 지도자로부터 종래의 자세를 고치고 미국과도 가까워질 길을 택하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아직 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냉전상태에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독일에서부터 화학무기를 사들인다는 소식이 있어 미국과 독일을 긴장시킨 일이 있다.
1986년부터 기름 값이 내리면서 리비아의 수입은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리비아는 50억 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다.   한때 리비아의 국민소득은 1만 달러 였는데 지금은 6,800달러로 되어 있다. 이 금액은 아직도 큰 것이지만 국민이 어느 만큼의 혜택을 받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카다피는 실리적이지 않은 공사들을 많이 하는데 그 하나가 대 인공 강 공사이다. 깊은 내륙 면 곳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콘크리트관을 통하여 해안 도시와 농촌에 물을 끌어들여 오는 대작업 이다. 공사비만해도 250억 달러인데 이 공사에는 우리 나라 기업에서도 참가하고 있다. 공사비와 유지비의 일부를 가지고 식량을 사들일 수 있다고 비난하는 측도 있으나 아마도 카구피는 석유 자원이 고갈되었을 때를 대비한 사업인지도 모른다.
카다피는 리비아 북부 사르테 사막의 한 천막 안에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대 이태리 독립항전에서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항상 이탈리아인들의 죄상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고 한다. 국민의 대부분이 몽매한 가운데서도 카다피는 부모의 덕택으로 출생지에서 초등 학교를 나오고 이곳저곳에서 고교를 거쳐 1963년 벤가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카다피는 영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등 비교적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그는 학생시절에도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했고 육사시대에는 "자유 통일주의 장교단"물 만드는 등 유달리 정치와 혁명에 관심이 刻다.
카다피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코란을 즐겨 읽으며 국가 원수의 봉급만으로 생활하고 평복을 입으며 사치를 좋아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한다. 사실상 아프리카 제국의 지도자들의 부정축재의 스캔들을 카다피에게서는 들은 바 없다. 그는 지금도 이따금씩 유년시절을 보낸 사르테 사막에 흘로 가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낸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출세하여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자기가 태어난 시골에 가서 어릴 적에 정들었던 흙 담집에 다녀온다고 한다. 그 흙 냄새가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옛날의 추억이라고 한다. 카다피도 이런 뜻에서 자기를 길러낸 시골 사막의 모래냄새가 그를 순화시켜 준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카다피는 모든 상인을 비생산적인 존재로 보아"인민의 적"으로 취급하고 자유 무역과 자유 경제를 기피했다. 그는 생산하는 자기 소비자이며 노동자로 구성된 기업 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석유 가의 하락으로 국가 수입이 줄고 소비 물자가 품귀해지면서 정부는 시장경제, 자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