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음질리카지(Mzilikazi)

africa club 2004. 7. 18. 20:02
음질리카지(Mzilikazi ; 1790-1868)

은데벨레(Ndebele)왕국의 창시자이자 군사 지도자. 사카(Shaka) 이후에 가장 두려움을 주었던 아프리카 지도자인 음질리카지는 팔강(Vaal River) 남쪽 음페카네(mfecane)를 일으킨 원동력이었다. 1820년 초반에 음질리카지는 사카의 줄루(Zulu)군에서 잠시 동안 장교로 복무하였다. 전쟁승리 후에 음질리카지는 붙잡은 소떼를 샤카에게 헌납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크랄(kraal)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줄루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고 음질리카지는 그들의 머리장식에서 깃털을 잘랐는데 이러한 행위는 대단한 모욕이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일어날 복수를 피하기 위하여 음질리카지는 몇 백명이나 되는 그의 추종자들을 주루랜드(Zululand)로부터 북서부의 트란스발(Transvaal)로 이동 시킨다. 이곳에서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줄루 난민과 망명자들을 편입시키고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소토(Sotho)의 씨족들을 정복한다. 음질리카지의 군사적 공격은 파괴적이었다. 그의 군대는 밤에 마을을 포위하고 새벽에 신속하게 공격하여 방어벽을 무너뜨렸으며 어린 소년들과 여자를 제외하고 모두 살해하였으며 마을을 불태워버렸다. 남자들은 강제로 연령집단으로 구성된 연대( age-set regiments)인 아마부토(amabutho)로 가입시켜 군대를 만들었고 여자들은 은데벨레족의 아내로 만들었다.

음질리카지는 농업, 전쟁, 결혼 그리고 세금 등 모든 것을 통제하는 광범위한 법적 규범을 바탕으로 강한 중앙집권적 왕국을 건설하였다. 은데벨레 사회로 귀속한 난민들은 보호를 받는 대신 노동을 해야 했고 어린 남자들은 연령집단으로 구성된 아마부토에 복무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음질리카지는 군사공격을 피하고 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해 은데벨레족을 자주 이동시켰다(1827년, 1832년, 그리고 1837년). 1830년대에 은데벨레족은 매우 강력한 전투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약 6천명에서 8천명에 달했다. 1832년에 음질리카지를 추격하기 위하여 사카의 후임자인 딩가네(Dingane)가 줄루의 전군을 파견하지만 줄루군은 단지 몇 마리의 소를 가지고 돌아왔고 전투에서  3개 연대를 잃는다. 은데벨레는 1836년에 베그콥(Vegkop)의 아프리카너(Afrikaners)들을 공격하게 되는데, 6천명병력 중 약 430명을 잃었으며 수천 마리의 아프리카너들의 양, 소 그리고 소달구지를 약탈하거나 죽인다. 음질리카지는 이후 아프리카너, 그리쿠아(Griqua), 그리고 로롱(Rolong)의 동맹군의 공격과 줄루의 침공을 피해 이동한다.

음질리카지와 은데벨레는 1840년대에 약 1만 5천에서 2만 명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여 지금의 짐바브웨의 남서쪽에 위치한 불라와요Bulawayo)에 영구적인 수도를 설립한다. 이곳에서 음질리카지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선주민인 쇼나(Shona)족을 지배 정복하고 남아공에서부터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보어인(trek-Boers)의 공격을 방어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고 보호하였다(1847-1851). 그는 1852년에 아프리카너들에게 강제로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게하여 그 지역에 안전을 가져오는 듯 하였으나, 1860년대에 금이 발견됨으로서 유럽 이민자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어오자 이러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토지에 대한 권리문제로 계속해서 일어난 분쟁은 음질리카지의 아들이 로벵굴라(Lobengula)에 와서 끝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