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남아공] 월트 시술루(Walter Sisulu)

africa club 2003. 5. 6. 10:23
현 남아공의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원로인 월트 시술루(Walter Sisulu)가 5월 5일(월요일) 사망하였다. 그는 ANC가 창당되었던 1912년에 태어나 올해 나이 91세였다.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나이지리아 시인 벤 오크리(Ben Okri)가 시술루의 90번째 생인에 바친 ‘한 아프리카인의 만가’라는 시를 인용하여 “당신, 월트는 하나님이 만들어 준 하나의 기적과 같다”라고 조문하였다.

오랫동안 백인 통치에 맞서 함께 싸워왔던 만델라 전 대통령도 조문을 했다. “월트 시술루는 헌신적인고 자기 희생적인 지도자이다”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시술루는 1929년 트란스케이 엔코보(Engcobo)에서 요하네스버거로 왔다.

그는 단지 스탠다드 4(6학년) 까지만 학업을 했고 이후는 혼자서 배웠다. 시술루는 요하네스버거에서 광산노동자가 되었으며 위험스럽고 열악한 환경에서 1마일 이상의 땅속에서 일을 했으며 침낭에서 잠을 잤다. 그의 다음 직업은 이스트 런던에서 주방 보조원이었다. 그후 그는 일주일에 18실링을 받고 요하네스버그의 제과점에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조합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임금인상을 위해 그의 동료들과 파업을 했다. 그 파업은 실패하였고 그는 해고 당했다. 시술루는 1940년 ANC에 가입했고 ANC 단체 중에서도 보다 과격한 ANC 청년연맹을 1943년에서 1944년사이에 형성하였다.

1920년대 말에 ANC 조직의 지도력은 남아공 공산당과 협력을 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분열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ANC 지도력에서 보수파들의 승리로 인해 회원들의 탈퇴와 조직의 구성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 법제화되고 본격화되자 보다 젊은 지도자들 하에 ANC는 보다 호전적인 자세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ANC 청년연맹은 시술루와 올리버 탐보(Oliver Tambo) 그리고 넬슨 만델라의 합류로 급성장하였으며 이들은 이전의 온건파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ANC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백인정권에 체계적으로 대항하게 되었다.

시술루, 탐보 그리고 만델라의 지도력하에 ANC는 비폭력 저항, 파업, 보이코트 그리고 행진 등의 캠페인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ANC는 통행권을 소지한 사람에 한해 자유롭게 이동하게 한 ‘패스법’(pass law)법에 격렬히 저항하였으며 이 시기 ANC 회원도 급속히 증가하여 1952년에는 10만명에 육박하였다.

1944년 시술루는 알버티나(Nontsikelelo Albertina)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시술루는 1949년 ANC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4년까지 그 직을 유지하였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위한 ANC 운영위에 합류하고 1953년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불복종 운동은 모든 아프리카인들이 항시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인종차별의 상징인 통행권을 불사르는 운동으로 이 사건이후 수백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체포되었다. 시술루도 체포되어 1956년에 시작된 트리선 재판(Treason Trial)에 기소되었다.

1960년 국가 긴급조치 기간 동안 그는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 그는 1962년 6번째 체포되었고 1963년에 4월 3일에도 24시간 억류되었다.
1963년 4월 19일 그는 재판에서 6년형을 언도받았으며 또한 6천란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그는 사보타지와 다른 혐의로 기소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악명 높은 로빈(Robben) 섬의 정치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1989년 10월 26년간의 감옥 살이를 끝내고 석방되었다.

그는 1991년 6월 ANC 회의에서 ANC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94년 남아공의 최초 다인종 선거에서 ANC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1992년 그는 자유를 위해 헌신적인 투쟁을 한 공로로 ANC에서 최고의 명예를 여기는 Isitwalandwe Seaparankoe 상을 수상했다.
시술루는 1994년 그의 ANC 부의장 직을 그만두고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ANC 사무실에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위해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