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왕의 황금(King Solomon's gold)
성서 (열왕기Ⅰ 5장 3절 ; 1 Kings 5:3)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자 밧세바(Bathsheba)1)에게서 태어난 다윗(David) 왕의 아들인 솔로몬 왕(974-934 BC)2)은 야훼께 경배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성전 건축에 착수하였다. 성전 건축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신하들을 레바논(Lebanon)으로 보내서 목재를 베어오도록 하였고, 근처에 있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어오도록 한 다음에 타이레(Tyre)와 바이블로스(Bybbs)도시의 석공들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게 하였다. 마침내 7년 후에 그 성전은 완성되었다. 솔로몬은 성전 벽면과 대들보, 문지방에 순금을 입혔고,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바닥에까지도 순금을 입혔다고 한다. 열왕기Ⅰ 6장 21절에서 22절에 의하면, ‘황금 사슬은 밀실의 입구에 늘어놓은 것인데 그것 또한 순금을 입힌 것이다. 성전 전체 인테리어가 순금을 입힌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신성한 신앙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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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이 지난 이후에, 그 성전은 바빌로니아(Babylonia)인들의 침입에 의해서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헤롯(Herod) 왕이 결국 같은 장소에 두 번째 성전을 건축했지만 이 건축물 또한 후에 파괴되었다. 그렇지만 성서에서처럼 성전의 묘사가 정확하다면 솔로몬 왕은 어디에서 황금을 얻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역대기(3장 3절에서 13절까지 ; 2 Chronicles 3:3-13)에 의하면 금은 ‘파르바임(Parvaim)의 땅’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하였다. 불행히도 파르바임이라는 지역은 세워진 적이 없었던 곳이다. 어떤 학자들은 단지 이곳이 아라비아 ’동방 지역(Oriental regions)‘ 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그것이 전설로 유명한 오빌(Ophir)항구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빌(Ophir)3)은 항구도시였거나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솔로몬의 배가 거대한 양의 순금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목재, 값비싼 돈, 상아, 원숭이, 공작새들까지도 실어온 지역으로 생각되고 있다. 비록 아라비아 반도, 인도 등의 여러 지역이라고 주장되기는 하였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오빌이 남동 아라비아(Arabia)에 있는 예멘(Yemen)이거나 아마도 아프리카(Africa) 해안 근처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집트 파라오(pharaoh)들이 원숭이, 상아, 유향, 노예들을 얻기 위해 원정 탐사선을 소말리아(Somalia)로 보냈다는 사실은 오빌이 실제로 동부 아프리카의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흥미롭게도, 솔로몬 왕의 제물에 대한 전설과 아프리카 대륙과의 연관은 1885년에 리더 해가드(Rider Haggard)에 의해 ‘솔로몬 왕의 광산(King Solomon's Mines)'이라는 소설이 출판되면서 19세기에 광범위하게 다시 부활하였다.
이 책에서, 세 명의 유럽인 영웅 -헨리 커티스 경(Sir Henry Curtis), 존 굳 대위(Captain John Good), 그리고 해설자 앨런 쿼터메인(Allan Quartermain)- 은 커티스의 동생인 조지(George)를 찾기 위해 어둠의 대륙 내부(Dark Continent)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지(George)는 솔로몬(Solomon)왕의 광산에서 잃어버린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났고 불행히도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해가드의 책은 유럽 인들과 페니키아(Phoenicians)인들이 중부 아프리카 어느 곳에 웅장한 왕국을 건설했다는 허구성을 제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아주 진귀한 보물로 가득 한 전설적인 왕국이 발견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4)
아마도 동방에 살았던 놀랄 만큼 부유한 마기(Magi)의 후예인 프리스터 존(Prester John)5)의 이야기는 처음으로 십자군 운동(11세기 후반-13세기) 기간에 생겨났다. 근원적으로는, 아주 먼 대륙에서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훌륭한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크리스트교의 성직자였다. 그 왕의 이름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고 그는 막대한 양의 은과 금 등의 재물을 가지고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 이야기는 게벨(Gebal ; 현재 레바논의 자발라(Jabala))의 주교인 허그(Hugh)가 이탈리아의 비터보(Viterbo)에 위치한 로마 교황청의 유게니우스(Eugenius) 교황을 방문했을 때인 약 1145년에 시작하였다. 허그는 신성한 땅(Holy Land)을 침략하려고 위협하고 있는 터키에 대항하여 도움을 요청하려고 교황을 방문하였다. 독일 프레이슬링(Freisling)의 오토 주교(Bishop Otto)가 이 만남에 대해 쓰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아기 예수를 방문한 ‘성직자이자 왕’이며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무슬림 왕을 패배시킨 그는 예루살렘에 진격하려고 하였으나 티그리스(Tigris) 강둑에서 중단했다고 언급했다. 1165년에 이 이야기가 다시 발전하여 프레스터 존으로부터 위조된 편지가 비잔틴의 매뉴얼 코메누스(Manuel Comnenus)황제에게 보내어 졌고 그 편지는 다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드릭 바바루스(Frederic Babarous)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그 위조범은 아주 영리하여 비숍 오토(Bishop otto)의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관련된 이야기와 신앙심 없는 터키(Turk)인들과 비교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의 두려움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언급하였다. 그는 또한 프레스터 존 왕국이 금, 은, 보석 등이 많이 있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13세기 중반에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아시아가 유럽에 다시 접근할 수 있었을 당시 프레스터 존을 발견하기 위해 이루어진 조사는 주로 그의 개입을 통해서 중국과 다시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비록 프레스터 존의 존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에 관한 전설과 소문은 중세 내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14세기에, 아시아에서 실시된 모든 조사에서 프레스터 존에 대한 존재가 밝혀지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프리카 특히, 에티오피아(Ethiopia)쪽으로 그 관심을 바꾸었다면 결과가 다를 수도 있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프레스터 존을 아프리카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이 전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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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ethsabee라고도 씀. 〈구약성서〉(Ⅱ 사무 11~12, Ⅰ열왕 1~2)에 나오는 인물. 히타이트인 우리야의 아내였다가 나중에 다윗 왕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 왕을 낳았다. 엘리암의 딸로 귀족 태생이었던 듯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던 그녀가 다윗의 유혹을 받아 임신을 하게 되자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그녀와 결혼했다. 처음 태어난 아이는 죽었으나, 후에 솔로몬을 낳았다. 다윗이 숨을 거둘 때 그녀는 예언자 나단과 계략을 꾸며 아도니야 대신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의지가 강하고 담력이 컸던 그녀는 왕의 어머니로서 막강한 지위를 누렸다.
2) (히)Shlomo. ?~? BC 10세기 중반에 활동한 다윗의 아들이자 계승자.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된다. 군사력으로 통치했고, 군사․행정․상업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스라엘 식민지들을 건설했다. 그가 벌인 대규모 토목사업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수도 예루살렘에 세운 유명한 성전이다. 그는 현인과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아가〉의 저자로 간주되며, 〈잠언〉에는 그가 쓴 것으로 간주되는 격언과 교훈이 있다.솔로몬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는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특히 Ⅰ열왕 1~11, Ⅱ역대 1~9). 〈역대기 하〉에는 전설 자료가 일부 담겨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실적이고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솔로몬의 배경은 유명할 뿐만 아니라 화려하다. 아버지 다윗은 자수성가하여 왕이 된 인물로, 강한 적들을 물리치고 유다 왕조를 세웠으며, 이집트 국경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다윗이 만난 가장 강했던 최초의 적은 필리스티아(불레셋) 사람들로서,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고 띠로(두로)와 시돈이 해상무역으로 번성하는 것을 방해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보병, 그중에서도 궁수(弓手)들을 훈련하여 말과 전차를 사용한 필리스티아 군대와 그밖의 적들을 능가했다. 그밖에도 띠로 왕 히람과 제휴하여 육상 및 해상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은 솔로몬 때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솔로몬은 상당히 큰 제국과 해상 통제 및 무역에 대단히 중요한 페니키아 동맹을 유산으로 받았다.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는 다윗과 혼인하기 전에는 히타이트족 출신 장군 우리야의 아내였다. 바쎄바는 궁정에서 벌어진 음모에서 노련한 수완을 발휘했는데, 그녀는 왕비가 되기 전에 장군의 아내에서 왕비가 되려는 목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다윗 앞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출시켰을 수도 있다. 다윗은 재위 말년에 노망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가운데 아내들 중 하낏(학깃)이 자기 아들 아도니야를 다윗의 후계자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선임 장군 요압, 제사장 에비아달, 그외 여러 대신을 자기편에 가담시켰다. 다윗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솔로몬이 형들을 제치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오직 바쎄바가 예언자 나단의 협조를 받아 이루어낸 일이었다.
3) <구약성서〉시대에 질 좋은 금으로 유명했던 확인되지 않은 지역.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지명들에서 오빌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솔로몬 시대(BC 920경)에는 해외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금․백단(白檀)나무․상아․원숭이․ 공작 등이 그곳에서 조달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많은 지명이 오빌이라는 지역으로 제시되어왔고, 해외에 있다고 가정할 때의 주요위치는 동부 아프리카와 인도이다. 이집트의 많은 파라오들이 원숭이․상아․유향․노예를 얻기 위해 원정대를 푼트(소말리아)로 보낸 기록을 보아도 동부 아프리카 지역이 신빙성이 있다. 반대로 유대교 역사가인 요세푸스와 성 히에로니무스(제롬)는 분명히 인도를 오빌 지역으로 이해했다. 오빌의 특산물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들이 인도 언어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고, 더욱이 백단나무와 공작은 인도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반면, 적어도 현대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4) ‘콩고’라는 영화를 참고할 것
5) <두산백과> 프레스터 존 전설(Legend of Prester John).
중세에 아시아 ․아프리카 등 동방에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하였다는 중세 유럽의 전설. 12세기에 남독일 프라이징의 주교였던 오토가 지은 《연대기(年代記)》 <1145년>조에는 시리아의 한 주교의 보고를 바탕으로 하여 "네스토리우스파(派)의 그리스도교도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동쪽에 대영토를 가진 왕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서진(西進)하여 에크바타나(하마단의 구칭)를 점령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의 시초이다. 그런 다음 이 왕이 쓴 편지의 필사본이라고 하는 글이 유럽에 유포되었고, 또 왕의 사절이 도래하였다는 소문도 퍼졌다. 이것은 때마침 십자군 원정의 성과가 오르지 아니하여 유럽인들은 대항할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케레이트부(部), 즉 옛 몽골의 한 부족국가 키타이와 몽골 제국의 황실 내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도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 등이 유럽에 이 전설을 유포시킨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리하여 동방 여행을 한 가톨릭 수사(修士)와 상인들은 프레스터 존의 실체를 탐색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프란체스코회 수사 카르피니는 그는 곧 인도의 왕이라 하였고, 프란체스코회 선교사 W.von 로이즈브루크는 나이만부(部)의 족장(族長) 쿠칠루크[屈出律], 그리고 M.폴로는 케레이트부의 족장 온한(溫汗)이라고 각각 말하였으며, 또 이 전설의 왕은 칭기즈 칸이라는 설도 나왔다. 그 후 가톨릭 수도사를 중심으로 이 전설의 왕과 왕국의 실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데, 15~16세기에 이르자 그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같은 그리스도교도가 있는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같은 일련의 탐색작업은 유럽인의 아프리카 탐험의 원동력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에티오피아는 프레스터 존의 나라 라고 불리기도 한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프레스터 요한(Prester John).
Presbyter John, John the Elder라고도 함. 전설적인 동방정교회의 지도자. 중세 연대기와 전승들에서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데 희망을 준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네스토리우스파(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동방정교회의 분파)였으며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를 넘어 극동지역에서' 다스린 사제 겸 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장로 요한'의 저작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많은 전설에 등장한다.
이 전설은 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팔레스타인)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되찾기를 바라던 십자군원정 기간(11세기말~13세기)에 생겼다. 1071년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에게 정복당했다. 1145년 시리아 게발(지금의 레바논 유바일)의 휴 주교가 이탈리아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청에 프레스터 요한에 관하여 보낸 보고에 근거를 둔 이 이야기는 독일 프라이징의 오토 주교에 의해 그의 〈연대기 Chronicon〉(1145)에 최초로 기록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유하고 권세 있던 '사제왕' 요한은 아기 예수를 방문했던 동방박사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그는 전쟁에서 페르시아 왕들을 물리쳤으며, 엑바타나에 있는 그들의 수도를 습격했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하려고 했으나 티그리스 강을 건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어 마지막 목적지에서 제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휴 주교가 전하는 그 전쟁은 1141년 페르시아 콰트완에서 벌어졌으며, 중앙 아시아에 있던 카라키타이 제국의 건국자인 몽골왕 예루 타시가 셀주크족의 이슬람교 군주인 산자르를 물리쳤던 그 전쟁이었다. 카라키타이 제국 군주의 칭호는 구르칸 또는 코르칸이었는데, 그것이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요하난, 시리아어로는 유하난으로 바뀌게 되었고 라틴어로 요한네스 또는 요한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구르칸들은 몽골의 불교도들이었지만, 그들의 많은 고위직 신하들이 네스토리우스파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선교사 빌렘 반 뢰이즈브루크가 1235년에 쓴 보고서에 따르면, 중앙 아시아인으로 마지막 구르칸의 딸인 나이만의 왕 퀴클뤽의 아내도 그리스도교도였다. 아버지의 이름이 타양 칸(중국어로 '요한 대왕'이라는 뜻)인 퀴클뤽은 1218년 대(大) 몽골의 지도자 칭기즈 칸에게 패배했다. 1221년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크레의 주교 자크 드 비트리와 이집트의 다미에타에서 십자군과 동행했던 추기경 펠라기우스는, 프레스터 요한의 아들이거나 손자인 인도의 데이비드 왕에게 이슬람교도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로마에 보고했는데, 이 왕이 바로 칭기즈 칸이었던 것 같다. 믿을 만한 정보의 부족과 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의 염원 때문에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 인물, 지리적 장소들이 한데 섞여서 프레스터 요한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알베리크 드 트루아퐁텐은 1165년에 프레스터 요한이 쓴 편지 1장이 여러 명의 유럽 지도자들, 특히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전달되었다고 기록했다. 허구적인 성격을 띤 이 편지는 라틴어로 씌어졌으며, 히브리어와 고대 슬라브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 편지가 비잔틴 황제 앞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편지의 그리스어 본문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 담긴 반(反)비잔틴적인 경향은 비잔틴 황제를 '황제'라고 부르기보다 '로마인의 통치자'라고 부른 것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 편지에서 프레스터 요한의 영토인 '인도의 3개국'은 대주교들과 소수도원장들과 왕들이 다스리는 풍요로운 자연, 경이로움, 평화의 땅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로라는 간단한 칭호를 가진 요한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교도와 싸워 예수의 거룩한 무덤을 되찾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려 한다고 선언했다. 그 편지에는 요한이 인도 미라포레에서 인도 최초의 그리스도교 전도자가 된 성 토마스의 후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레스터 요한이 보낸 사절에 대한 응답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7년 '인도의 탁월하고 위대한 왕이며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아들'인 요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편지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알렉산데르가 바르바로사와의 논쟁에서 지원을 받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13, 14세기에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을 찾아나선 조반니 다 피안델 카르피니,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 마르코 폴로와 같은 여러 부류의 선교사와 평신도 여행가들은 서양과 몽골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교섭을 가능하게 했다. 14세기 중반 이후 에티오피아는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을 탐색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레스터 요한은 이 아프리카 그리스도교 국가의 네구스(황제)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프레스터 요한은 아시아 지역, 특히 네스토리우스파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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