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인들에게 시간은 이차원적인 현상이다. 즉 긴 ‘과거’와 ‘현재’만이 있을 뿐 실제적으로 미래가 없다. ‘실제적인 시간’이란 현재의 시간이며 과거의 시간이다. 일단 일어난 사건은 이제는 미래를 향하지 않고 현재와 과거 속으로 전개해 나간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뒤로 움직이는 것이다. 반면에 ‘잠재적인 시간’이란 미래에 틀림없이 일어날 사건, 또는 자연현상의 불가피한 리듬 안에 있는 것을 가리키고 일어나지 않은 것, 혹은 곧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은 비시간(No-time)의 범주 안에 속한다. 미래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미래 속에 있는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며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도 그들의 마음을 미래의 사물에다 두고 있지 않고 이미 일어난 것에 두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시간의 일부를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하고 미래에 있는 것은 전혀 경험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음비티(J.S. Mbiti)의 주장처럼 아프리카인들은 대시간(Macro-Time)인 자마니(zamani ; 과거)와 소시간(Micro-Time)인 사사(sasa ; 현재)로 구분되고 미래라는 시간개념은 실제적인 시간의 너머로 생각된다. 사사라는 시간은 개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사사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스스로의 기억이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그의 사사기간이 젊은 사람보다 길다.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아도 개인의 사사보다 좀더 중요하고 크다는 것일 뿐이지 자체적으로 사사기간이 있다. 사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실존을 의식하는 시간의 영역이고 그 속에서 그들 스스로의 짧은 미래 속에, 그리고 주로 자마니라는 과거 속에다 투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는 그것 자체로의 짧은 미래와 역동적인 현재와 경험된 과거를 함께 지닌 완전한 혹은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자마니는 사사와 필연적인 관계이며 그것 자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지고 있다. 즉 사사는 ‘자마니에게 먹이를 준다.’든가 ‘자마니 안으로 사라져 들어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자마니는 어떤 것도 그것을 넘어서서 더 갈 수 없는 그러한 기간이 된다. 자마니는 시간의 무덤이고 끝이며 모든 것이 휴지 점에 부닥치는 그러한 차원이다. 따라서 자마니는 모든 현상과 사건들을 모아놓는 마지막 창고이고 모든 사물이 이전도 이후도 없는 현실 속으로 흡수되는 시간의 바다이다.
자마니는 사사가 근거하고 있는 기초이며 또한 사사는 자마니에 의해 비로소 설명될 수 있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마니는 소멸이 아니라 많은 일과 사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구전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듯이 신화와 전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역사관도 자마니를 지향하고 있지 지극히 짧은 시간안의 미래나 존재하지 않는 미래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인들의 신화와 전설은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수 없으며 인간의 역사가 사사로부터 자마니로 움직이는 리듬 속에서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역시 사건들을, 특히 사람들의 활동들에 대해, 그것들이 마쳐졌는지, 아직 진행 중인지, 혹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지 고려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마쳐지거나, 완벽히 마친 사건들이나 활동들은 다 마치지 못한 일들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아직 시작되어지지 못한 것들 보다는 훨씬 더욱 그렇다. 단순한 기술체계를 가지고 있고, 일시적인 흥미 거리가 사회 활동으로 집중되는(시계, 달력, 연대기, 그리고 자연 현상들이 아닌), 토착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과거가 미래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사회체계를 제공하는 것이 과거이고, 사회관계도 과거부터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전문화에서는, 사람들은 그들의 기본적 방향을 위해서 아직 진행 중인 어떤 것 보다는 과거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들에게는, 역사는 미래의 골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은 세계의 기원, 인류의 창조, 인간의 역사와 전통, 혹은 그들의 사회로의 전개등과 같은, 사람들의 존재의 뿌리를 짚어주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견해에 따르면, 미래는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아무런 사건도 포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종교적 혹은, 규범적인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 계절, 연령, 혹은 세대의 반복을 미래에 반영하고, 지금부터 이렇게 많은 단위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야기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 끝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인들은 ‘진보에 대한 신념’ 곧 인간의 활동 및 업적의 발전은 낮은 데서부터 보다 높은 데로 나아간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음비티의 주장은 에반스-프리차드(Evans-Pritchard)나 보해넌(Paul Bohannan)의 연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에반스-프리차드는 뉘르(Neur)족의 시간개념을 연구한 후 뉘르족은 시간을 세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인다고 설명하였다. 1년이 12개월의 단위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뉘르족은 그것들을 한 단위의 단편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어느 달에 한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숫자 기호에서 일어난 사건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시간의 단위보다 활동들이나 활동의 성과, 그리고 사회 구조와 구조적 차이들로서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
보해넌이 티브(Tiv)족으로부터 시간이란 제각기 다른 활동을 수용하는 일련의 폐쇄된 방으로 이러한 시간의 방들은 옮길 수도 섞일 수도 없다고 밝힌 내용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티브족에게 시간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현상들에 의해 다른 종류의 기간들로 분류되어진다. 하지만 그 사건들은 종종 다른 논리적인 시리즈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간의 분류를 서로 관련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티브족은 달을 시장이나 농업 활동, 혹은 계절과 연관시키지 않는다. 만약 누가 얼마나 많은 달이 1년에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10에서 18까지 매우 다양하다. 만약 누가 한 달에 있는 시장의 개수를 물으면, 그 대답은 3에서 8까지 다양하다. 또한 한 달에 있는 일의 수를 물으면, 10에서 15까지 다양하다.
아프리카의 시간 계산은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전제로 한다.- 계절, 달의 차고 기움, 그리고 해의 움직임- 그리고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사회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또한 개인과 사회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의 사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시간을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경험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즉 아프리카인 들은 다른 사건들에 비해 구체적인 사건들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한 아프리카인이 ‘그 마을은 내 막내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옮기지 않았어요.’ 혹은, ‘정부는 내가 정화의식을 한 후에, 그리고 결혼을 하기 전에 출범했다.’라고 표현한다.
‘하루’는 아프리카의 공동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맞추어 시간이 진행된다. 예를 들어 우간다의 앙코레(Ankore)족은 가축을 돌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가축을 돌보는 일에 맞추어 시간이 나누어진다. ‘달’은 ‘뜨거운 달’, ‘첫 비가 오는 달’, ‘잡초를 뽑는 달’, ‘콩을 거두어들이는 달’, ‘사냥을 하는 달’등으로 나누어 계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시간적으로 정확하게 구분되기 보다는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해’는 계절에 따른 활동들에 맞추어서 이루어진다. 모두 ‘몇일이 한해인가’라고 세기 보다는 ‘건기와 우기가 몇 번이나 지나갔는가’로 계산된다. 이 또한 정확한 날짜로 계산되면 365일을 벗어나 340일이 될 수도 있으며 360일이 될 수도 있지만 계절이나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도 느낄 수 없다.
낮과 밤의 끊임없는 리듬처럼, 그리고 달의 차고 기울음처럼 한해가 왔다가는 가곤 하는 그런 세월을 사람들은 기대하면서 살아간다. 즉 그들은 우기가 오면 다음에는 파종의 계절이 오고, 그것이 지나면 수확의 계절이 오며, 그 다음에는 건기가 오고, 그것이 지나면 다음에 다시 우기가, 그리고 그 우기의 다음에는 또 다시 파종의 계절에 오는 이 같은 영원히 지속되는 일들을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해를 지내면서 과거라고 하는 시간의 차원이 차츰 더해져 간다. 그들에게 있어 ‘무한’이라든가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다만 과거의 영역에 속해있는 어떤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시간은 양을 잴 수 없는 다른 사건들의 반복들과 세대나 연령층과 같은 사회 구조들로서 표현되기 때문에, 시간은 균일한 것, 지속적인 것, 혹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어 지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관점에서는, 지금의 하루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똑같은 하루라고 생각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시간은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따라서 양력과 그것을 다시 일정한 달, 일, 시, 분, 초로 나눈 것에 근거한 현대 서양 문명의 연대기와는 다르게 자세한 과정들의 세부사항부터, 현재 시간까지의 일시적인 과정의 측정을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균일하게 추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은 시간을 수학적인 계산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과의 관련속에서 구체적이고 특정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헤아린다. 즉 시간은 사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날, 달, 해, 일생, 혹은 사람의 삶은 제각기 그것들이 지닌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모두 나뉘어지고 헤아려진다. 왜나하면 그러한 시간들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일 어떤 일을 하자’라는 약속은 정확히 몇 시에 하자는 의미보다는 ‘무엇을 한다.’라는 의미가 강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엇을 한다.’라는 사실이다.
음비티(J.S. Mbiti)의 주장처럼 아프리카인들은 대시간(Macro-Time)인 자마니(zamani ; 과거)와 소시간(Micro-Time)인 사사(sasa ; 현재)로 구분되고 미래라는 시간개념은 실제적인 시간의 너머로 생각된다. 사사라는 시간은 개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사사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스스로의 기억이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그의 사사기간이 젊은 사람보다 길다.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아도 개인의 사사보다 좀더 중요하고 크다는 것일 뿐이지 자체적으로 사사기간이 있다. 사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실존을 의식하는 시간의 영역이고 그 속에서 그들 스스로의 짧은 미래 속에, 그리고 주로 자마니라는 과거 속에다 투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는 그것 자체로의 짧은 미래와 역동적인 현재와 경험된 과거를 함께 지닌 완전한 혹은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자마니는 사사와 필연적인 관계이며 그것 자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지고 있다. 즉 사사는 ‘자마니에게 먹이를 준다.’든가 ‘자마니 안으로 사라져 들어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자마니는 어떤 것도 그것을 넘어서서 더 갈 수 없는 그러한 기간이 된다. 자마니는 시간의 무덤이고 끝이며 모든 것이 휴지 점에 부닥치는 그러한 차원이다. 따라서 자마니는 모든 현상과 사건들을 모아놓는 마지막 창고이고 모든 사물이 이전도 이후도 없는 현실 속으로 흡수되는 시간의 바다이다.
자마니는 사사가 근거하고 있는 기초이며 또한 사사는 자마니에 의해 비로소 설명될 수 있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마니는 소멸이 아니라 많은 일과 사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구전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듯이 신화와 전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역사관도 자마니를 지향하고 있지 지극히 짧은 시간안의 미래나 존재하지 않는 미래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인들의 신화와 전설은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수 없으며 인간의 역사가 사사로부터 자마니로 움직이는 리듬 속에서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역시 사건들을, 특히 사람들의 활동들에 대해, 그것들이 마쳐졌는지, 아직 진행 중인지, 혹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지 고려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마쳐지거나, 완벽히 마친 사건들이나 활동들은 다 마치지 못한 일들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아직 시작되어지지 못한 것들 보다는 훨씬 더욱 그렇다. 단순한 기술체계를 가지고 있고, 일시적인 흥미 거리가 사회 활동으로 집중되는(시계, 달력, 연대기, 그리고 자연 현상들이 아닌), 토착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과거가 미래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사회체계를 제공하는 것이 과거이고, 사회관계도 과거부터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전문화에서는, 사람들은 그들의 기본적 방향을 위해서 아직 진행 중인 어떤 것 보다는 과거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들에게는, 역사는 미래의 골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은 세계의 기원, 인류의 창조, 인간의 역사와 전통, 혹은 그들의 사회로의 전개등과 같은, 사람들의 존재의 뿌리를 짚어주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견해에 따르면, 미래는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아무런 사건도 포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종교적 혹은, 규범적인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 계절, 연령, 혹은 세대의 반복을 미래에 반영하고, 지금부터 이렇게 많은 단위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야기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 끝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인들은 ‘진보에 대한 신념’ 곧 인간의 활동 및 업적의 발전은 낮은 데서부터 보다 높은 데로 나아간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음비티의 주장은 에반스-프리차드(Evans-Pritchard)나 보해넌(Paul Bohannan)의 연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에반스-프리차드는 뉘르(Neur)족의 시간개념을 연구한 후 뉘르족은 시간을 세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인다고 설명하였다. 1년이 12개월의 단위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뉘르족은 그것들을 한 단위의 단편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어느 달에 한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숫자 기호에서 일어난 사건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시간의 단위보다 활동들이나 활동의 성과, 그리고 사회 구조와 구조적 차이들로서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
보해넌이 티브(Tiv)족으로부터 시간이란 제각기 다른 활동을 수용하는 일련의 폐쇄된 방으로 이러한 시간의 방들은 옮길 수도 섞일 수도 없다고 밝힌 내용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티브족에게 시간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현상들에 의해 다른 종류의 기간들로 분류되어진다. 하지만 그 사건들은 종종 다른 논리적인 시리즈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간의 분류를 서로 관련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티브족은 달을 시장이나 농업 활동, 혹은 계절과 연관시키지 않는다. 만약 누가 얼마나 많은 달이 1년에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10에서 18까지 매우 다양하다. 만약 누가 한 달에 있는 시장의 개수를 물으면, 그 대답은 3에서 8까지 다양하다. 또한 한 달에 있는 일의 수를 물으면, 10에서 15까지 다양하다.
아프리카의 시간 계산은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전제로 한다.- 계절, 달의 차고 기움, 그리고 해의 움직임- 그리고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사회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또한 개인과 사회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의 사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시간을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경험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즉 아프리카인 들은 다른 사건들에 비해 구체적인 사건들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한 아프리카인이 ‘그 마을은 내 막내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옮기지 않았어요.’ 혹은, ‘정부는 내가 정화의식을 한 후에, 그리고 결혼을 하기 전에 출범했다.’라고 표현한다.
‘하루’는 아프리카의 공동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맞추어 시간이 진행된다. 예를 들어 우간다의 앙코레(Ankore)족은 가축을 돌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가축을 돌보는 일에 맞추어 시간이 나누어진다. ‘달’은 ‘뜨거운 달’, ‘첫 비가 오는 달’, ‘잡초를 뽑는 달’, ‘콩을 거두어들이는 달’, ‘사냥을 하는 달’등으로 나누어 계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시간적으로 정확하게 구분되기 보다는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해’는 계절에 따른 활동들에 맞추어서 이루어진다. 모두 ‘몇일이 한해인가’라고 세기 보다는 ‘건기와 우기가 몇 번이나 지나갔는가’로 계산된다. 이 또한 정확한 날짜로 계산되면 365일을 벗어나 340일이 될 수도 있으며 360일이 될 수도 있지만 계절이나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도 느낄 수 없다.
낮과 밤의 끊임없는 리듬처럼, 그리고 달의 차고 기울음처럼 한해가 왔다가는 가곤 하는 그런 세월을 사람들은 기대하면서 살아간다. 즉 그들은 우기가 오면 다음에는 파종의 계절이 오고, 그것이 지나면 수확의 계절이 오며, 그 다음에는 건기가 오고, 그것이 지나면 다음에 다시 우기가, 그리고 그 우기의 다음에는 또 다시 파종의 계절에 오는 이 같은 영원히 지속되는 일들을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해를 지내면서 과거라고 하는 시간의 차원이 차츰 더해져 간다. 그들에게 있어 ‘무한’이라든가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다만 과거의 영역에 속해있는 어떤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시간은 양을 잴 수 없는 다른 사건들의 반복들과 세대나 연령층과 같은 사회 구조들로서 표현되기 때문에, 시간은 균일한 것, 지속적인 것, 혹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어 지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관점에서는, 지금의 하루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똑같은 하루라고 생각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시간은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따라서 양력과 그것을 다시 일정한 달, 일, 시, 분, 초로 나눈 것에 근거한 현대 서양 문명의 연대기와는 다르게 자세한 과정들의 세부사항부터, 현재 시간까지의 일시적인 과정의 측정을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균일하게 추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은 시간을 수학적인 계산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과의 관련속에서 구체적이고 특정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헤아린다. 즉 시간은 사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날, 달, 해, 일생, 혹은 사람의 삶은 제각기 그것들이 지닌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모두 나뉘어지고 헤아려진다. 왜나하면 그러한 시간들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일 어떤 일을 하자’라는 약속은 정확히 몇 시에 하자는 의미보다는 ‘무엇을 한다.’라는 의미가 강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엇을 한다.’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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