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크와 유적
by 지연
아프리카.
타크와 유적지의 모스크
한 때 무역이 번성했다는 타크와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500년 전 항해사들이 지나다녔을 그 수로를 그대로 따라 망그로브 나무로 뒤덮인 섬들 사이사이를 해쳐 나가는 시간 자체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의식 같았다. 바람이 밀어주는 다우선을 타고 유적지의 입구까지 낭만적인 기분에 푹 젖은 우리는, 섬 육지까지 배가 들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가방을 머리 위에 얹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늪지대를 걸어 지나간 후에야 타크와 유적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타크와 유적은 만다섬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고, 라무 타운에서부터 배로 30분 거리이다. 타크와 유적은 15세기에서 16세기 동안 번성했다가 17세기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지금은 폐허가 된 스와힐리 무역 도시의 잔재이다. 이 유적이 중요한 것은 시기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량의 유적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온전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키블라 벽(메카 방향을 향한 벽) 위에 기둥이 세워진 모스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이 기둥은 벽 아래에 있는 셰이크(통치자)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웃한 섬에서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이곳 타크와로 일년에 두 번 방문을 하기 때문이다.
타크와의 유적은 해수면 높이에 위치하고 있어 밖에서는 이 섬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인도양을 면한 해변에서 섬을 바라보면 언덕 뒤편에 있는 타크와 유적은 시야에서 가려지기 때문에 외부의 적은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섬 주변이 얕은 바다여서 많은 배들이 접근하기 힘들고, 따라서 바닥이 얕은 배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자연적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이들의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크와는 결국 17세기에 멸망하고 만다. 안타깝게도 그 정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담수의 소금화로 식수 조달이 불가능해지고, 동시에 파테인들과의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이 유적은 지금은 대중들에게 완전 공개되어 있으며 피크닉이나 캠핑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외딴 섬에 이런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300년 동안 베일에 감추어져 있었던 이 타크와 유적을 방문한 첫 백인 탐험가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려진 벽화마저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타임캡슐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한 때 스와힐리 문명과 아랍 문명이 뒤섞이며 번영을 이루었을 그들은 이 유적만을 남긴 채 어디로 사라져간 것일까?
왠지 쓸쓸함을 풍기는, 과거의 잔상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라무 해안의 다우선
다우선
수세기동안 아랍인들은 인도양에서 동아프리카로 항해를 하였다. 이 때 쓰였던 배가 다우(Dhow)라 불리는 외돛 범선이다. 엔진이나 노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바람에 의한 동력만으로 항해를 하는 배인데, 다양한 화물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다우가 있다. 돛이 하나 밖에 없어서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돛의 각도를 이용하여 바람을 받는 방향을 조종할 수 있고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심지어는 맞바람을 맞을 때에도 지그재그로 움직이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물론, 시간은 오래 걸린다. 다우선은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탈 수 있다. 아랍인들은 계절풍의 도움을 받아 매년 12월부터 5월 사이에 동아프리카로 건너와서 6월부터 10월 사이에 아라비아와 북인도양 인근으로 돌아갔다. 동아프리카로 올 때는 이국적인 대추야자, 카펫, 향료 등을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싣고 와서 돌아갈 때에는 망그로브 나무, 곡식, 금, 상아 그리고 아랍이 노예무역을 할 당시에는 노예도 싣고 돌아갔다.
최근에 현대적인 선박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라무섬이나 잔지바르 같은 곳에서는 비록 관광용일지라도 항구에 정박한 다우선들을 볼 수 있다. 부두 위에는 열심히 돛을 손질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항해는 바람과 물살, 뱃사람의 노련한 힘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다우선의 역사
다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에리트리아해 항해지』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다우는 인도양 서부와 홍해에서 일반적인 무역수단이었다. 일례로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바스코 다 가마가 마톤도니섬에 도착했을 때 그 곳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카누와 다우를 만드는 전문가들이었다. 다 가마는 이 사람들의 다우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다우 무역의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다우 문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대를 이어 내려오던 다우에 대한 지식과 전설들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가끔씩 지나가버린 아름답고 로맨틱한 시절에 대한 회상을 하기 위해서 다우를 찾는다. 지금은 몇 대의 다우만이 케냐 해안에 남아 있을 뿐이고, 이마저도 대부분이 관광용이다.
라무시의 해안 모습.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우를 만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 세기에 걸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 전통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5세기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다우는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코코넛 끈과 나무 핀으로만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다우제작의 맥이 끊겨가고 있지만 다 가마가 600년 전에 만났던 마톤도니 섬에는 아직도 그 기술을 증명할 수 있는 장인이 살고 있다. 이 섬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다우 만들기를 관람하고 간다. 장인들은 전통적인 도구들을 사용하여 나무를 자르거나 조각을 한다. 음감보나무라는 매우 단단한 나무를 주로 사용하여 제작하는데, 최근에는 이 나무를 베어가려면 산림청에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대의 최신 항법과 디젤 엔진이 장착된 선박들 때문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던 다우 무역은 이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천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모습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사실상 다우 위에서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었던 만큼, 현대 항해술의 발달을 안타까워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서 날씨에 상관없이 자야했고 규율은 매우 엄격했다. 무슬림 기도 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졌고 여성들은 갑판 아래에만 갇혀서 모든 여행 기간을 보내야 했다니,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안전하고 오고갈 수 있는 지금의 모습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스톤 타운
라무 올드 타운은 전통적인 기능을 간직하면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존이 잘 되어있는 스와힐리 주거지역이다. 산호석과 망그로브 나무로 단순한 모양새로 지어진 시가지는 안뜰, 베란다, 정교하게 조각된 문 등의 독특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라무는 19세기부터 주요한 무슬림 종교 축제를 주관해오고 있으며, 학술적으로 이슬람과 스와힐리 문명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라무 박물관 위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이곳은 또한 여행을 하기에도 매우 적합한 곳이다. 대다수의 건물들이 라무 섬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18세기에 지어졌고, 정교하게 조각된 목재문과 좁은 골목길, 높은 건물들은 마음 편히 유유자적하면서 걸을 수 있는 산책코스이기도 하다.
응고로응고로의 플라밍코들은 발레리나의 군무를 연상시켰다.
응고로응고로 새벽 사파리는 흡사 시간여행 같다. 자욱한 안개는 분화구 가득 가라앉아 사방을 둘러싼다. 아프리카 어디서도 응고로응고로만큼 다양한 동물들이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 힘들다. 사방이 분화구 벽으로 둘러싸인 초원에서 코끼리 가족, 치타, 플라밍고 무리, 물소, 가젤 때를 가까이서 보는 것을 잊지 못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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