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통과의례는 젊은이들이 성숙한 인간으로서 또 책임 있는 존재로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공동체의 특권과 의무를 갖게 되며 교육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들은 새로운 권리를 전수 받고 사회는 그들이 새로운 의무를 수행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성생활, 결혼, 자녀의 출산, 가족에 대한 책임 등에 대한 일들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기간동안 고통을 견디는 것을 배우고 서로 함께 사는 법을 배우며 순종하는 것을 배우고 남녀관계의 비밀과 신비를 배운다.
통과의례에는 시련을 이겨나가는 것이 필수적인데, 새로운 영역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기 위해 때때로 문이 사용된다. 대개 몸의 일부를 변화시키거나(예를 들면 할례, 이 뽑기, 문신이나 상처내기, 머리장식 등) 특별한 의복과 장신구를 착용함으로써 새로운 지위를 나타낸다. 통과의례를 연구할 때는 주로 그 사회학적 기능을 고려해왔다. 사회체계는 순조로운 기능을 위해 일정한 정도의 균형을 요구한다. 개인 또는 집단의 변화는 이러한 균형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므로 통과의례의 주된 사회학적 기능은 이러한 변화 이후에 새로운 사회적 균형을 이루고 사회적 질서를 회복하여 조화된 부분들의 체계로서의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인이 새로운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을 극화한 통과의례는 의례를 행한 개인에게 새로운 역할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통과의례는 또한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지지를 실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회학적 기능 못지않게 중요한 통과의례의 심리학적 기능은 학문적인 관심을 덜 받아왔다. 일부 해석에 의하면, 이러한 의례는 인생의 중요한 단계들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며, 개인이 세계의 어떤 통제 불가능한 측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통과의례는 개인의 경험을 위해 예측 가능한 공동상황을 제공함으로써 변화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고통을 완화하는 심리치료적인 기능을 한다.
피상적으로 관찰해보면 이러한 통과의례의 수행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의식은 아직까지도 비밀리에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처녀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비밀하게 그 의례를 거치도록 한다. 또 부모들도 비록 딸의 통과의례를 공개적으로 시행할 만한 용기는 없다 할지라도 역시 비밀로 이 의례를 행한다. 사람들은 소녀가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으면 음핵이 길게 자라고 가지가 뻗는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여인의 자녀들은 비정상적이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여인은 아직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 여인이 낳은 아이는 “어린아이의 아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둔다면 통과의례를 행하는 심리적인 중요성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의례를 행하지 않는 여인은 참으로 “그 어느 누구”일 수도 없고 “불완전한 인간”이며, 아직도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 사는 협동적인 실존의 분위기 속에서는,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러한 의례에 참여하는 것을 회피한다던가 피해 달아난다던가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한 여인은 조만간 그 가족이나 이웃의 조롱거리가 되고, 그녀에게 어떠한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되면 제의적 성숙의 “고리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격리기간이 끝나고 통과의례를 모두 마치면 곧 소녀들은 결혼을 한다. 그들이 격리되어 있는 동안 집안에서는 남자 친구들의 집안과 결혼에 대하여 의논을 하고 혼인약속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례에 참여하지 않은 여자는 결혼을 하지 않고 일생을 보내던가, 결혼을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아이를 잉태할 거라고 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현대의 생활이 이러한 태도나 실천에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다.
난디족의 할례 또한 성숙을 위한 의례라는 점, 그래서 어린아이임을 단절하고 어른에로 결합되는 것을 극화한 의례라는 접은 동일하다. 성기는 생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성기를 상처 내는 것은 생명의 분출을 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열어놓아야 비로소 막히지 않고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다. 격리는 죽음의 상징이다. 그것은 마치 씨앗을 땅속에다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례를 끝내는 것은 새롭고 책임 있는 생명으로의 부활, 곧 새싹의 돋아남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들의 통과의례를 통하여 그들이 속한 전체 종족의 협동적인 삶 자체가 다시 소생하게 된다. 그 공동체의 삶의 리듬에다 새로운 진동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그 공동체의 생명력이 되살아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례를 거절하는 사람이나 그 의례의 조화를 망치는 사람(처녀가 아니라든지 겁쟁이라든지 해서)은 전체 난디족의 사회에 심각한 반역을 범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여인은 공동체 전체를 멸망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보면 부끄러움을 당한 딸이나 누이의 부모들이나 가족이 자살을 하려 한다든지, 그 소녀를 전체의 공동체적 실존을 위하여 죽여야 한다든지 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의례는 깊은 차원에서부터 솟아난 심원하게 거룩한 제의이다. 이 제의에 종족 전체의 사활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의례는 죽음과 와해의 극복 및 정복을 종교적으로 극화한 것이다.
성기를 단절하거나 뚫는 것, 머리를 깎는 것등은 모두 하나의 존재양태를 단절하고 다른 존재양태로 이입하는 것을 상징한다. 얼굴을 흰 진흙으로 얼룩지게 하는 것은 새로운 출생,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의례를 마치면 남자들은 하나의 전사로서의 생애를 시작하게 되고, 여자들은 결혼을 하게 되며, 때로는 그 의례가 끝나는 즉시 실제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세대의 리듬은 극화되고 연출된다. 함께 통과의례를 겪은 사람들은 여생을 신비스러운, 그리고 제의 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사실상 그들은 한 몸이고, 한 집단이고, 한 공동체이며, 한 백성인 것이다. 그들은 온갖 일을 서로 돕고 살아간다. 한 사람의 아내는 같은 연령집단의 다른 남자들의 아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집을 방문하면 그 집의 남자는 그 찾아온 사람에게 자기 아내와 동침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그 남편이 집에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이것은 집단의 연대성을 긍정하는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각 개인은 “나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즉 우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있는 것이다”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연대성은 안정감, 일체감, 협동적인 실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등을 창조하고 제공한다.
은데벨레족은 형식화된 통과의례 대신에 성숙기의 변화를 표현하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의식을 행하고 있다. 남자아이의 경우를 보면 최초로 몽정을 한 다음 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일찍 일어나 벌거벗고 강에 가서 몸을 씻는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와 가축의 우리에 이르는 출입구 가까이의 집 밖 모퉁이에 서 있는다. 그러면 그것을 본 다른 소년들이 몰려나와 장대로 그 아이를 때려준다. 그 소년은 숲으로 달아난다. 그리고 거기에서 2, 3일간 머문다. 그 동안 다른 소년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그 며칠 동안 그 소년은 낮 동안에는 결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만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 기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서 전통적인 주의가 마련해준 약이 섞인 음식을 먹는데, 이 일은 하나의 의식으로 행해진다. 즉 주의가 장대 끝에다 옥수수로 된 음식을 놓고 이것을 그 소년의 입에다 틀어넣으면 그 아이는 그 막대를 입에 꼭 물고 그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잘 하면 주의는 그 막대를 가지고 그 아이를 세 번 혹은 네 번 내려친다. 이러한 매질은 그 아이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 일이 끝나면 그 아이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몰려와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그 아이에게 선물로 준다. 여자아이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월경을 한 다음 오랫동안 찬물에서 몸을 씻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그녀의 부모들은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데, 이 잔치가 끝나면 소녀들은 긴치마를 입기 시작한다. 긴치마를 입는 것은 이제 그 여자아이들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며칠 동안을 수풀 속에서 보내는 것은 역시 “죽음과 부활”의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유년기를 단절하는 행위는 몸을 씻는 일로 극화된다. 이 제의 적인 목욕은 동시에 비생산적인 삶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보다 깊은 종교적 정화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의식은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즉 결혼, 재산의 소유, 책임지는 행위(아이들은 “단단하게”하기 위하여 매를 때리는 일을 참고할 것)등의 준비를 극화한 것이다. “단단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이 이제는 모든 특권과 의무를 지고 보다 넓은 사회에 완전히 협동적으로 참여하게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며, 그러한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년이 되는 통과의례는 현대생활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가 개인의 삶이 지닌 전통적인 순환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관습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통과의례에는 시련을 이겨나가는 것이 필수적인데, 새로운 영역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기 위해 때때로 문이 사용된다. 대개 몸의 일부를 변화시키거나(예를 들면 할례, 이 뽑기, 문신이나 상처내기, 머리장식 등) 특별한 의복과 장신구를 착용함으로써 새로운 지위를 나타낸다. 통과의례를 연구할 때는 주로 그 사회학적 기능을 고려해왔다. 사회체계는 순조로운 기능을 위해 일정한 정도의 균형을 요구한다. 개인 또는 집단의 변화는 이러한 균형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므로 통과의례의 주된 사회학적 기능은 이러한 변화 이후에 새로운 사회적 균형을 이루고 사회적 질서를 회복하여 조화된 부분들의 체계로서의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인이 새로운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을 극화한 통과의례는 의례를 행한 개인에게 새로운 역할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통과의례는 또한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지지를 실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회학적 기능 못지않게 중요한 통과의례의 심리학적 기능은 학문적인 관심을 덜 받아왔다. 일부 해석에 의하면, 이러한 의례는 인생의 중요한 단계들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며, 개인이 세계의 어떤 통제 불가능한 측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통과의례는 개인의 경험을 위해 예측 가능한 공동상황을 제공함으로써 변화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고통을 완화하는 심리치료적인 기능을 한다.
피상적으로 관찰해보면 이러한 통과의례의 수행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의식은 아직까지도 비밀리에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처녀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비밀하게 그 의례를 거치도록 한다. 또 부모들도 비록 딸의 통과의례를 공개적으로 시행할 만한 용기는 없다 할지라도 역시 비밀로 이 의례를 행한다. 사람들은 소녀가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으면 음핵이 길게 자라고 가지가 뻗는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여인의 자녀들은 비정상적이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여인은 아직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 여인이 낳은 아이는 “어린아이의 아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둔다면 통과의례를 행하는 심리적인 중요성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의례를 행하지 않는 여인은 참으로 “그 어느 누구”일 수도 없고 “불완전한 인간”이며, 아직도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 사는 협동적인 실존의 분위기 속에서는,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러한 의례에 참여하는 것을 회피한다던가 피해 달아난다던가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한 여인은 조만간 그 가족이나 이웃의 조롱거리가 되고, 그녀에게 어떠한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되면 제의적 성숙의 “고리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격리기간이 끝나고 통과의례를 모두 마치면 곧 소녀들은 결혼을 한다. 그들이 격리되어 있는 동안 집안에서는 남자 친구들의 집안과 결혼에 대하여 의논을 하고 혼인약속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례에 참여하지 않은 여자는 결혼을 하지 않고 일생을 보내던가, 결혼을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아이를 잉태할 거라고 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현대의 생활이 이러한 태도나 실천에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다.
난디족의 할례 또한 성숙을 위한 의례라는 점, 그래서 어린아이임을 단절하고 어른에로 결합되는 것을 극화한 의례라는 접은 동일하다. 성기는 생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성기를 상처 내는 것은 생명의 분출을 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열어놓아야 비로소 막히지 않고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다. 격리는 죽음의 상징이다. 그것은 마치 씨앗을 땅속에다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례를 끝내는 것은 새롭고 책임 있는 생명으로의 부활, 곧 새싹의 돋아남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들의 통과의례를 통하여 그들이 속한 전체 종족의 협동적인 삶 자체가 다시 소생하게 된다. 그 공동체의 삶의 리듬에다 새로운 진동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그 공동체의 생명력이 되살아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례를 거절하는 사람이나 그 의례의 조화를 망치는 사람(처녀가 아니라든지 겁쟁이라든지 해서)은 전체 난디족의 사회에 심각한 반역을 범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여인은 공동체 전체를 멸망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보면 부끄러움을 당한 딸이나 누이의 부모들이나 가족이 자살을 하려 한다든지, 그 소녀를 전체의 공동체적 실존을 위하여 죽여야 한다든지 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의례는 깊은 차원에서부터 솟아난 심원하게 거룩한 제의이다. 이 제의에 종족 전체의 사활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의례는 죽음과 와해의 극복 및 정복을 종교적으로 극화한 것이다.
성기를 단절하거나 뚫는 것, 머리를 깎는 것등은 모두 하나의 존재양태를 단절하고 다른 존재양태로 이입하는 것을 상징한다. 얼굴을 흰 진흙으로 얼룩지게 하는 것은 새로운 출생,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의례를 마치면 남자들은 하나의 전사로서의 생애를 시작하게 되고, 여자들은 결혼을 하게 되며, 때로는 그 의례가 끝나는 즉시 실제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세대의 리듬은 극화되고 연출된다. 함께 통과의례를 겪은 사람들은 여생을 신비스러운, 그리고 제의 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사실상 그들은 한 몸이고, 한 집단이고, 한 공동체이며, 한 백성인 것이다. 그들은 온갖 일을 서로 돕고 살아간다. 한 사람의 아내는 같은 연령집단의 다른 남자들의 아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집을 방문하면 그 집의 남자는 그 찾아온 사람에게 자기 아내와 동침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그 남편이 집에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이것은 집단의 연대성을 긍정하는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각 개인은 “나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즉 우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있는 것이다”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연대성은 안정감, 일체감, 협동적인 실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등을 창조하고 제공한다.
은데벨레족은 형식화된 통과의례 대신에 성숙기의 변화를 표현하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의식을 행하고 있다. 남자아이의 경우를 보면 최초로 몽정을 한 다음 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일찍 일어나 벌거벗고 강에 가서 몸을 씻는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와 가축의 우리에 이르는 출입구 가까이의 집 밖 모퉁이에 서 있는다. 그러면 그것을 본 다른 소년들이 몰려나와 장대로 그 아이를 때려준다. 그 소년은 숲으로 달아난다. 그리고 거기에서 2, 3일간 머문다. 그 동안 다른 소년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그 며칠 동안 그 소년은 낮 동안에는 결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만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 기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서 전통적인 주의가 마련해준 약이 섞인 음식을 먹는데, 이 일은 하나의 의식으로 행해진다. 즉 주의가 장대 끝에다 옥수수로 된 음식을 놓고 이것을 그 소년의 입에다 틀어넣으면 그 아이는 그 막대를 입에 꼭 물고 그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잘 하면 주의는 그 막대를 가지고 그 아이를 세 번 혹은 네 번 내려친다. 이러한 매질은 그 아이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 일이 끝나면 그 아이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몰려와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그 아이에게 선물로 준다. 여자아이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월경을 한 다음 오랫동안 찬물에서 몸을 씻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그녀의 부모들은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데, 이 잔치가 끝나면 소녀들은 긴치마를 입기 시작한다. 긴치마를 입는 것은 이제 그 여자아이들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며칠 동안을 수풀 속에서 보내는 것은 역시 “죽음과 부활”의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유년기를 단절하는 행위는 몸을 씻는 일로 극화된다. 이 제의 적인 목욕은 동시에 비생산적인 삶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보다 깊은 종교적 정화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의식은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즉 결혼, 재산의 소유, 책임지는 행위(아이들은 “단단하게”하기 위하여 매를 때리는 일을 참고할 것)등의 준비를 극화한 것이다. “단단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이 이제는 모든 특권과 의무를 지고 보다 넓은 사회에 완전히 협동적으로 참여하게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며, 그러한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년이 되는 통과의례는 현대생활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가 개인의 삶이 지닌 전통적인 순환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관습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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