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남부아프리카 역사

희망봉(Cape Town) 역사

africa club 2003. 9. 25. 13:37
희망봉(Cape Town)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코이산어족에 속하는 산(San)족과 코이코이(Khoikhoi)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노란색 피부와 작은 키 그리고 단음절의 흡기음(吸氣音, staccato click sound)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산족은 수렵채집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코이코이족은 주로 양과 소를 기르는 유목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폭풍의 곶(Tormentoso ; The Cape of Storms)이라고 이름지었다.

케이프 타운이 쉽게 포루투칼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유명한 유령선 전설(Flying Dutchman)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람이 세고 폭풍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바람이 심하게 몰아쳐서 대서양의 파도가 높게 해안의 바위를 들이칠 때 희망봉의 유령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배는 마스트가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바람에 휘날리며 케이프 주위를 영원히 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포루투칼 왕 Jo o는 그 이름이 나쁘다 하여 희망봉(Boa Esperan a ; Good Hope)으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케이프 타운은 1652년 4월 6일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ck)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흙으로 만든 5각형의 성을 축성하고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폭퐁우를 피해갈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물을 비롯한 고기, 신선한 야채, 과일 그리고 포도주를 보급받을 수 있었으며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병든 선원들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이었다.

판 리비어크는 남아프리카역사에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역사책을 펼치면 판 리비어크와 그의 부인 마리아(Maria)의 사진을 볼 수 있으며 남아공의 어떤 도시를 가더라로 판 리비어크 거리를 만날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 케이프 타운의 백인정착지는 케이프 반도와 주변 내륙지방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유럽국가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서 이주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케이프에 이주한 아시아인들중 일부는 본국에서 저항운동을 하다가 케이프로 추방당한 사람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예로 이주되었으며 오늘날 케이프의 말레이인들의 조상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이 세계의 문화를 모두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게 되었다.

1795년 나폴레옹이 해군을 강화함에 따라 케이프 타운은 무역루트로서 아주 중요하다는 전략적 인식하에 영국은 케이프 타운을 잠시동안 지배하였으나 1806년 점령하여 몇 년동안 지배하였으나 1806년 다시 악화된 프랑스의 세력을 막고 케이프 식민지를 통한 인도와의 귀중한 해상 무역 루트의 장애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케이프 타운을 침략하여 이주사회를 건설해나가면서 이미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던 네덜란드 후예들과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후 케이프 영국총독은 케이프 아프리카너(Cape Afrikaner)로 불리는 이들을 영국의 통치하에 두고 싶어하였다. 이때까지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은 영국의 통치를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가난한 많은 아프리카너들은 영국의 통치와 압제를 벗어나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우마차를 타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내륙으로 대이주(Great Treck)을 시작하게 되었고 영국은 자동적으로 반투계 선주민들과 일련의 전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반면 케이프 타운 항구는 이 시기부터 유럽과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화물과 병력과 전쟁물자가 많아지게 됨에 따라 '바다의 선술집(Tavern of the Seas)'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