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술을 아주 좋아하셨다. 이웃에 가서 술마시기를 좋아하셔서 곧잘 집에 늦게 오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우리가 저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자 어머니는 아예 저녁 지을 부담이 없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우리 형제들은 한편 걱정이 되었다.
나의 두 누님은 물론 나보다 더 먼저 결혼을 했다. 그들은 아주 먼데로 시집을 갔다. 한 누님은 킬로사라는 곳으로 갔다. 다우리로 염소를 많이 받았는데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 팔아야 했다.
나는 그 후 oversea coporation 이라는 개인회사에 취직이 되어 어머니의 허락을 맡고 그 회사에 들어갔다. oversea coporation 은 땅콩을 가공하는 회사이다. 그 회사는 린디라는 곳에 있어서 나의 아내에게 고향 일을 맡겨놓고 나만 우선 그리로 갔다. 얼마 후 대강 자리를 잡고 나서 나는 아내에게 차비를 보내어 나 있는 곳으로 오도록 했다. 그 당시 차편은 오로지 버스밖에 없었다. 송게아에서 린디까지는 아주 멀다. 아마 500킬로는 될 것이다.
그때는 유럽사람들이 차를 타고 직접 송게아에 와서 (영어를 할 수 있는)사람을 구했다. 그 당시만해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로 말할줄 아는 것이 참 행운이었다. 아주 많은 유럽사람들이 들어왔는데 다들 영어 할수 있는 보이를 구하려 했다. 그래서 우리가 채용된 것이다.
일단 채용되면 살기가 좋았다. 집도 주고 식품도 주고 차도 공짜로 태워주기 때문이다. 월급은 40쉴링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 1947년 다른 모든것이 제공되기 때문에 40쉴링이면 많은 것이다. 식품도 주었지, 물도 공짜지 전기도 공짜지. 월급으로는 그저 용돈정도만 쓰면 되었다.
그 후 그 회사가 문을 닫게되자 나는 쉘로 가게 되었다. 더 좋은 자리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몸바사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가족도 함께 몸바사에 데려 갔는데 아이들이 조금 크자 아이들을 송게아 고향으로 보냈다. 물론 몸바사는 좋은 곳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타운에서 자라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우리 고향말을 알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을 송게아로 보내서 고향사람들 속에서 살도록 하고 크리스마스 같은 때 오게 했다.
린디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송게아에 갔다. 나의 어머니가 고향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나의 어머니는 1967년에 돌아갔다. 사고로 돌아간 것이었다. 약 50세 가량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 고향에는 이제 동생 둘 밖에 남지 않았었다. 나는 역시 그 애들도 도와주어야 했다. 나는 그 애들에 비하면 도시에서 월급을 많이 받는 편인데 그 애들은 나와는 처지가 달리 고향에서 고작 농사나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돈을 보내주기도 하고 고향에 갔을 때는 밭을 둘러보고 농사를 의논도 하고 많이 도와주었다.
몸바사에 있을 때 내가 근무한 곳은 BP 쉘이었다. 그런데 케냐가 독립을 한 후 케냐에서는 케냐 사람을 써야한다고 외국인은 안된다고 했다. 우리를 고용한 유럽사람들은 우리가 거기서 오랫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케냐 정부에 요청을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탄자니아로 돌아와야 했는데 회사측에서는 후하게 급료를 지불하고 될 수 있으면 탄자니아에서 다른 회사에 고용이 되도록 애써주었다.
어쨌든 나는 national shipping line에 채용이 되었다. 나의 전 회사에서 추천을 해주었다. 나는 퇴직할 때까지 거기에서 일했다. 배를 타고 온 여러나라 선원들을 보게 되었다. 북한 선원도 보았다.
내가 natioal shipping line에서 일할 때는 배가 들어오면 새벽부터 부두에 나가 야 했다. 선주로부터 텔렉스가 오는데 몇시에 입항예정이고 필요한 물자가 무엇이고 등을 알리고 배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요청을 하기도 하는데 그에 따라 모든 것을 주선을 하는 것이다. 배가 들어오지 않을 때는 보통 8시에 사무실로 출근을 해서 우선 무슨 배가 언제 들어올 것인지 부터 체크를 하고 어떤 종류의 카고가 필요한지 또 하역을 하게 되면 얼마만한 물량인지 등을 체크해서 모든 것을 준비한다. 그런 후 항구로 나가서 배가 들어올 것을 보고하고 배에 맞추어 하역작업을 지휘 보고한다. 사무실에서는 선주와 연락을 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한다. 세계각국의 다양한 종류의 배가 들어온다. 또 다레살람에서 화물을 배로 부치는 주문도 받는다.
그 회사에서 20년을 일 한 후 55세가 되던 해에 퇴직했다. 55세가 정년이다. 1986년 이었다. 퇴직을 하고도 회사에서 내 후임을 구하지 못해 1년간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나서는 내 스스로 그만 두었다. 아이들이 다 컸기 때문에 더 일을 안해도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커서 무엇보다 얼른 자립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가 없어서 주위의 사람들이 도움을 준 셈이었는데 사실 그들은 자기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한테는 그러지 않아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얼른 어른이 되어 독립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늘 노력했다. 그런 결과 쉽핑 라인의 매니저의 직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나의 두 누님은 물론 나보다 더 먼저 결혼을 했다. 그들은 아주 먼데로 시집을 갔다. 한 누님은 킬로사라는 곳으로 갔다. 다우리로 염소를 많이 받았는데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 팔아야 했다.
나는 그 후 oversea coporation 이라는 개인회사에 취직이 되어 어머니의 허락을 맡고 그 회사에 들어갔다. oversea coporation 은 땅콩을 가공하는 회사이다. 그 회사는 린디라는 곳에 있어서 나의 아내에게 고향 일을 맡겨놓고 나만 우선 그리로 갔다. 얼마 후 대강 자리를 잡고 나서 나는 아내에게 차비를 보내어 나 있는 곳으로 오도록 했다. 그 당시 차편은 오로지 버스밖에 없었다. 송게아에서 린디까지는 아주 멀다. 아마 500킬로는 될 것이다.
그때는 유럽사람들이 차를 타고 직접 송게아에 와서 (영어를 할 수 있는)사람을 구했다. 그 당시만해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로 말할줄 아는 것이 참 행운이었다. 아주 많은 유럽사람들이 들어왔는데 다들 영어 할수 있는 보이를 구하려 했다. 그래서 우리가 채용된 것이다.
일단 채용되면 살기가 좋았다. 집도 주고 식품도 주고 차도 공짜로 태워주기 때문이다. 월급은 40쉴링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 1947년 다른 모든것이 제공되기 때문에 40쉴링이면 많은 것이다. 식품도 주었지, 물도 공짜지 전기도 공짜지. 월급으로는 그저 용돈정도만 쓰면 되었다.
그 후 그 회사가 문을 닫게되자 나는 쉘로 가게 되었다. 더 좋은 자리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몸바사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가족도 함께 몸바사에 데려 갔는데 아이들이 조금 크자 아이들을 송게아 고향으로 보냈다. 물론 몸바사는 좋은 곳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타운에서 자라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우리 고향말을 알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을 송게아로 보내서 고향사람들 속에서 살도록 하고 크리스마스 같은 때 오게 했다.
린디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송게아에 갔다. 나의 어머니가 고향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나의 어머니는 1967년에 돌아갔다. 사고로 돌아간 것이었다. 약 50세 가량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 고향에는 이제 동생 둘 밖에 남지 않았었다. 나는 역시 그 애들도 도와주어야 했다. 나는 그 애들에 비하면 도시에서 월급을 많이 받는 편인데 그 애들은 나와는 처지가 달리 고향에서 고작 농사나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돈을 보내주기도 하고 고향에 갔을 때는 밭을 둘러보고 농사를 의논도 하고 많이 도와주었다.
몸바사에 있을 때 내가 근무한 곳은 BP 쉘이었다. 그런데 케냐가 독립을 한 후 케냐에서는 케냐 사람을 써야한다고 외국인은 안된다고 했다. 우리를 고용한 유럽사람들은 우리가 거기서 오랫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케냐 정부에 요청을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탄자니아로 돌아와야 했는데 회사측에서는 후하게 급료를 지불하고 될 수 있으면 탄자니아에서 다른 회사에 고용이 되도록 애써주었다.
어쨌든 나는 national shipping line에 채용이 되었다. 나의 전 회사에서 추천을 해주었다. 나는 퇴직할 때까지 거기에서 일했다. 배를 타고 온 여러나라 선원들을 보게 되었다. 북한 선원도 보았다.
내가 natioal shipping line에서 일할 때는 배가 들어오면 새벽부터 부두에 나가 야 했다. 선주로부터 텔렉스가 오는데 몇시에 입항예정이고 필요한 물자가 무엇이고 등을 알리고 배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요청을 하기도 하는데 그에 따라 모든 것을 주선을 하는 것이다. 배가 들어오지 않을 때는 보통 8시에 사무실로 출근을 해서 우선 무슨 배가 언제 들어올 것인지 부터 체크를 하고 어떤 종류의 카고가 필요한지 또 하역을 하게 되면 얼마만한 물량인지 등을 체크해서 모든 것을 준비한다. 그런 후 항구로 나가서 배가 들어올 것을 보고하고 배에 맞추어 하역작업을 지휘 보고한다. 사무실에서는 선주와 연락을 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한다. 세계각국의 다양한 종류의 배가 들어온다. 또 다레살람에서 화물을 배로 부치는 주문도 받는다.
그 회사에서 20년을 일 한 후 55세가 되던 해에 퇴직했다. 55세가 정년이다. 1986년 이었다. 퇴직을 하고도 회사에서 내 후임을 구하지 못해 1년간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나서는 내 스스로 그만 두었다. 아이들이 다 컸기 때문에 더 일을 안해도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커서 무엇보다 얼른 자립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가 없어서 주위의 사람들이 도움을 준 셈이었는데 사실 그들은 자기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한테는 그러지 않아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얼른 어른이 되어 독립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늘 노력했다. 그런 결과 쉽핑 라인의 매니저의 직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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