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샤 살롬 압달라 (여, 58세)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나는 내 사업에서 돈을 벌어 사업을 늘리고 쿠션카바를 외국에 수출하고 싶고 내가 고용한 모든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불하고 싶다.’
나의 이름은 아샤 살룸 압달라이다. 나는 1943년 9월 5일에 태어났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오만에서 왔는데 잔지바르 여인과 결혼해서 그곳에 자리잡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잔지바르에 낳아서 흑인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마수드 비날리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랍여인(나의 어머니)과 결혼해서 아이를 여덟을 낳았다. 아버지는 돌아가고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있는데 나이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는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샴바와 집이 있다. 그 집은 세주어 수입을 얻는다.
나의 아버지는 농업 지도요원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집을 세 채 남겼다. 하나는 내가 어머니와 살고 있는 집이고 두 채는 나의 여자 형제들한테 돌아갔다.
나의 언니 둘과 남동생 하나가 오만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거기 간지 이제 10년 째이다. 언니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남동생은 공항에서 일한다.나의 오빠는 집에서 놀면서 펜션으로 살고 있고 그의 자녀들이 도와준다.
나의 아버지는 그때로서는 깨어있는 사람이어서 우리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것을 보고 나의 어머니 쪽 형제들도 그들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나의 언니는 중3까지 다니다가 시험에 떨어졌다. 나의 남동생 하나는 고등학교(12학년), 다른 동생은 초등학교(스텐다드 8)을 마쳤는데 지금은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본토 어디에 있다.
나는 초등학교 8학년까지 다녔다. 나는 중학교 시험에 통과가 되었지만 그때는 수줍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는 결혼을 했다. 16살때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기숙학교여서 교원양성학교생들이 우리들을 돌봐주는 식이었는데 나를 돌봐주던 한 큰 여학생이 나를 좋게 여겨서 그의 큰오빠더러 나와 혼인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나의 아버지한테 오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는 다우리로 나의 부모에게 천 쉴링을 냈는데 그때는 매우 큰 돈이었다. 우리 관습으로는 신랑감이 처녀의 집으로 가서 아버지한테 딸을 달라고 하여 그 아버지가 승낙을 하면 결혼이 성립된다.
남편은 교사였는데 1962년 잔지바르 혁명이 났을 때 살해당했다. 결혼한 지 꼭 3년만이었고 나는 겨우 열아홉 살 이었다. 아이가 하나 있었다. 남편은 보지 못했다. 그냥 그가 죽었다고만 들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 친정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남편 측에서 데려가 버렸다.
첫 번째 남편이 죽은 후 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경찰이었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이 키콰주니인데 그 남자도 키콰주니 분소에서 일을 하여 나를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결혼 역시 나의 아버지한테 와서 결혼 승낙을 얻고 다우리를 내면 된다.
나는 그때 이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혁명 직후여서 유스리그라는 것이 있었다. 한조에 50명정도가 속하였는데 단체로 여기 저기 일하도록 보내어졌다. 우리는 처음에는 병원에서 6개월간 일하다가 그다음은 농사짓는데로 보내졌다. 그후 교육부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은 담배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역시 월급이 적어서 그만두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슬람들은 여자가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여자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얻는다. 나는 그를 위해 열심히 집안일을 하는데 그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오니 내가 어떻게 그 집에 있겠는가. 그래서 도로 친정으로 갔다.두 번째 남편은 전 처와 이혼하고 나를 얻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나와 이혼하고 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보통 이슬람 남자는 아내를 넷을 거느릴 수 있지만 나의 전 남편은 그럴만한 처지가 못되었다. 그는 한꺼번에 여러 아내를 거느릴 경제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이혼하고 또 결혼하고 한 것이다. 아내 한명도 먹여 살리지 못해서 오히려 내가 그를 도와야 했다. 나의 두 번째 남편은 세 여자하고 결혼했다. 그리고는 죽었다.
그래서 두 번째 남편과도 이혼했다. 이혼하고 나서 일년 반 있다가 다시 결혼을 했다. 친정에 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외롭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교육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차라리 결혼을 해서 내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는게 나았다.
나의 세 번째 남편은 펨바 출신이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있다. 두 번째 남편과 이혼을 하고나서 친정에서도 구박을 하고 혼자 외롭기 때문에 누가 아버지한테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장사를 하기 시작하여 시장에서 도매로 물건을 가져와 동네에서 소매로 팔았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잔지바르와 몸바사와 다레살람을 오가며 장사를 하게 되었다.
몸바사에는 나를 도와서 물건을 팔아주고 돈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나의 집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나의 세 번째 남편이 질투가 나서 몸바사에 가서 그 사람에게 나를 더 이상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 나의 남편은 내가 건방지고 못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남편은 내 모든 사업물건을 빼앗기게 만들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빈털털이로 잔지바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 조금 장사를 시작했다.
나의 세 번째 남편은 나를 때리기 일쑤였고 몹시 괴롭혔다. 그러다 끝내 나를 쫓아냈다. 10년 정도 된다. 세 번째 남편은 지금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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