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을 이룬 아파르테이트(apartheid)와 함께 40년전 아프리카너(Afrikaner)들은 선조들의 꿈을 수행하였으며 1961년 5월 31일 남아프리카 연맹에서 독립공화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폭풍의 암운은 외부세계가 제재를 가하고 국내에서는 흑인들의 무장투쟁을 야기시켰다.
1948년에 권력을 잡은 국민당(National Party)은 점차 인종간의 분리를 압박해 갔다 ; 인종간의 결혼과 섹스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거주지역도 분리되었으며 모든 흑인들은 그들의 신원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 패스(pass)법이 제정되었다.
1960년 2월 다른 아프리카 독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수상 하롤드 맥밀란(Harold Macmillan)은 남아공을 방문하여 케이프타운 의회 연설에서 "변화의 바람이 아프리카 대륙에 불고 있다"라는 연설을 함으로써 남아공 백인정권에게 충격을 준 역사적 연설을 하였다.
아프리카너인들은 비슷한 인구 분포를 지니고 있던 영어권 백인들과 공존하였으며 1960년 10월 백인 단독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52%의 찬성과 48%의 반대로 공화국 설립이 종결되었다. "공화국 주의자들 사상은 아프리카너주의의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라고 남아공 대학(Unisa)의 역사학자인 자콥 피트 브리트스가 말했다.
"그것은 드랜스바알과 오랜지 자유주 보어 공화국들이 그들의 독립국을 설립 할 때인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보어인들은 1899-1902년에 있은 영국과의 보어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그들의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1960년 남아공화국의 설립은 남아공 백인들을 규합하기 위한 기회를 수상인 베르워드(Verwoerd)에게 주었다.
"많은 영어권 백인들은 남아공에 대한 외부의 압박 증가에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들은 남아공의 인종 정책들에 간여하는 것에 불쾌해 하였다"라고 브리트스는 말했다.
그 논쟁으로부터 제외된 다수인 흑인들은 1960년 3월 요하네스버그 남부의 샤프빌에서 패스법에 항의하는 평화적인 행진 중에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69명이 사망하고 180명이 부상당하는 사태를 겪어야만 했다.
이같은 사태에도 불구하고 베르워드 수상은 공화국 설립을 위한 국회소집을 요구하였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는 비록 불법단체로 규정되었지만 5월 29일부터 3일간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우리는 공화국이 선포되는 날 우리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공화국으로의 변경은 단지 결점을 감추는 것 뿐이었다'라고 만델라는 그의 자서전 '자유를 위한 머나먼 여정'에서 밝혔다
그러나 백인 정부는 경찰과 군인들을 마을 안으로 보내 파업하는 사람들을 체포하였으며 그 파업은 5월 30일 종식되었다.
남아공 수상이던 베르워드는 영연방 회의에 참석하여 남아공이 영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공식화하였으며 그가 귀국했을 때 백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영연방으로부터의 탈퇴는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어 경제적 상황은 어려워 갔다.
샤프빌 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 후 전ANC 의장이었던 알버트 루툴리는 노벨평화상을 수상받았다. 1994년 이전까지 5월 31일은 백인들에게는 공공 휴일이었다. 그러나 1994년 4월 27일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 선거가 실시되어 흑인정권이 들어섬으로써 4월 27일이 '자유의 날'(Freedom Day)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The Mail & Guardian, May 3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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