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남부아프리카 역사

남아공 역사 개요 - 아파르테이트를 중심으로

africa club 2001. 10. 22. 08:06
1, 처음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에서는 10여전까지(공식적으로 1994년 인종차별법인 아파르테이트(Apartheid)이 철폐되었지만 사실상 1991년부터 인종차별법인 철폐되었음) 인종간의 차별을 도고 있었다.
1991년에 폐지가 되었지만 그 상처의 자국은 깊다. 예를 들면 뿌리깊은 차별 의식이나 빈곤 등은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여기에서 간략히 남아공 역사를 돌아보자.

2, 식민지 지배

1602년  케이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1652년  팬·리벡크, 케이프에 상륙 
            ↓
     민간의 입식자를 네덜란드에서 받아들인다. 노예 노동을 적극적으로 도입
     케이프 식민지에서 성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서서히 동부의 나탈주나 북부 오 렌지 자유주 등으로 확대

1795년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케이프 식민지의 지배권을 빼앗는다
     ※노예제를 폐지해, 1953년에는 입법권을 가지는 식민지 의회를 설치한다.   

179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해산

1830년∼40년  네덜란드계 백인 내륙으로 이동(대이주 :그레이트 트랙)

1896년  남아프리카 전쟁(보어전쟁) 영국계 백인 대 아프리카너(보어인)
1902년 보어전쟁 종식

1910년  영국은 케이프주 오렌지자유주, 나탈주, 트랜스바알 주를 합쳐 영연방 국가 성립

1913년  토지법(Land Act) 제정 - 흑인에게 척박한 일정부분의 땅을 지정. 이외의 토지에 대해 흑인들은 구입이나 임차를 할 수 없게 된다. 이 당시 65%의 넘는 흑인들 의 토지는 전체 토지의 13%에 해당하는 지역만 할애.
     이 법의 성립에 의해 아파르테이트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1936년 이후 흑인들에 대한 선거권은 박탈되었다

 ①전쟁 후의 전환기∼철폐까지
아파르테이트가 만들어진 이유로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남아프리카(보어) 전쟁에 의한 아프리카너들의 빈곤의 격화와 둘째는 아프리카너의 종교에 기인한다. 이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교의에 유래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성경에 따라 비백인은 태어나 백인의 하인이 되는 것이 운명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1948년 제2차 세계대전 후 총선거에서 여당(연합당)과 야당(국민당)의 일대일 대결이 되어 국민당은 선거 슬로건으로 분리·격리를 의미하는 아파르테이트를 내걸어 국민당이 집권하게 된다.

1950년  인구 등록법 - 모든 남아공인을 백인, 칼리이드, 인도인, 흑인이라고 하는 네 개 의 인종으로 나눈다.
이후 여러가지 차별 법을 제정하였고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아파르테이트는 완성된다.

한편 195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흑인 대중운동이 시작된다. 그 주된 단체로서 넬슨·만델라가이끄는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 남아프리카·인도인 회의(SAIC)등이 있다.
이후 ANC의 노선에 불만을 품은 일부 회원들이 판아프리카 회의(PAC)를 만든다.

1955년 ANC 「남아공은 흑인, 백인 등 남아공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 속한다.」라고 하는 문언으로 시작하는 「자유 헌장」(Freedom Charter)이 채택된다

1960년 샤프빌 학살 사건…ANC와 PAC주도하에 패스법 철폐를 외치는 흑인들에게 경찰과 군인들 총격을 개해 67명이 학살된다. 이 사건 이후 ANC와 PAC는 불법단체로 규정된다.

1961년 영연방으로부터 탈퇴

1962년 넬슨·만델라 체포 - 종신형 선고

1989년 데 클레르크 대통령 취임

1991년 토지법, 집단 지역법, 인종 등록법 폐지 = apartheid 폐지

 ②철폐 이후

1994년 남아공 최초 다인종 선거가 4월 마지막 주에 실시되어 인구의 77%를 차지하고 있는 흑인들의 압도적인 지지속에 ANC의 만델라가 사상 처음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또한 제1 부통령에는 ANC의 음베키가, 제2 부통령에는 국민당의 데 글레르크 취임해 국민 통합 정부가 성립한다

만델라 대통령은 우선 빈곤 문제에 착수한다. 선거전에서 공약으로 내걸은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부흥 개발 계획(RPD)을 진행시킨다. RPD는 주택 건설, 전화, 상하 수도의 정비,
토지의 재분배, 고용 창출 등이라고 하는 빈곤층을 위한 사회정책이다.
RDP사무국이 1995년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남아공의 전주민의 52. 8%가 빈곤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실업률은 50%의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게다가 인종 구성으로 보면 빈곤층의 94. 7%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흑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RDP 계획도 남아공의 경제성장 목표달성의 실패와 재정 부족으로 결국 1995년 실패로 끝나고 1996년에는 거시 경제성장 전략을 실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장, 고용, 재분배(GEAR) 정책이다
1999년부터 만델라 뒤이어 타보 음베키가 2대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만델라의 경제 정책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남아공의 경제성장이 연 6%를 달성해야만 가능한 정책이다. 그러나 남아공의 최근 경제성장률은 3%이내를 보이고 있어 여전히 정책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실업률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실업률은 30%이상으로 흑인들의 경우는 40%이상이다.

3, 마지막으로

이 빈부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 아파르테이트법은 철폐되었지만 곧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파르테이트가 가져온 것은 빈부격차, 빈곤, 실업 뿐만 아니라 남아공이 전 세계에서 가장 범죄가 빈발하게 발생하는 요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현재의 추세라면 현 흑, 백간의 경제적 차이는 백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흑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짐바브웨 처럼 백인들의 농장에 대한 강제 점거 사태로 이어질 수 도 있다.
비록 공식적인 아파르테이트는 사라졌지만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는 아직까지 인종차별이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