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아프리카 탐사단

아부심벨

africa club 2013. 9. 14. 22:03

 

아부심벨

 


이집트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나일 강을 따라 이집트 최남단 수단과의 국경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아스완 댐으로 인해 형성된 거대한 나세르 호가 있는 도시, 아스완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쪽 강변을 향에 나아가다 보면, 사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에 지어져 있는 대 암굴신전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이집트 왕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가 자신과 신을 기리기 위해 지은 아부심벨 신전이다.

 

이집트의 세 명의 신 레 하라크티와 아몬, 프타하와 함께 자신을 기린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하트호르 여신에게 바친 소신전으로 이루어진 아부심벨 신전의 규모는 상상이상으로 컸다. 높이 21미터에 달하는 람세스의 좌상 4개가 입구에서부터 세워져 있었으며,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8개의 기둥이 들어선 객실을 시작으로 두 번째 객실과 여러 개의 문(혹은 세 번째 객실), 신을 기린 지성소 까지 일직선으로 절벽 내부를 향해 들어서 있었다.

 

이정도 규모의 신전을 피라미드나 여타 다른 왕이 세운 신전들과 달리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조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땅속 신전이 다른 신전들보다 인력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집트야 뭐 거대 석조 건물과 석상이 넘쳐나는 나라니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신전이 대단한 이유는 신전의 가장 안쪽, 지성소에 있다. 세 명의 신을 기린 신전이지만, 지성소에는 나란히 4개의 신상이 있다. 왼쪽부터 프타하의 신상, 아몬의 신상이 있고 가장 오른쪽에 레 하라크티의 신상이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신상은? 바로 당대의 파라오, 람세스 자신의 신상이다. 그는 아부심벨을 통해 자신을 신의 반열에 올렸던 것이다.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른 파라오

 

파라오는 죽고 난 이후에 신이 된다고 생각했던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고려해보면 이는 대단히 파격적인 처사였다. 파라오가 거대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었던 바탕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권력도 있었지만, 신전이 갖는 종교적 의미와 이집트 국민들이 가졌던 내세관이 주요했기 때문에, 국민의 납득 없이 스스로를 신격화할 신전을 짓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즉 람세스가 이룬 업적은 국민들에게 신으로 인정받을 만큼 대단했다는 것이 되겠다.

 

뭘 저질렀기에?

 

신왕국 시대 제 19대 왕조에 속하는 람세스 2세는 24살부터 통치하기 시작해서 66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이집트인의 평균 수명인 30세의 세 배에 해당하는 90살까지 살았으며, 200명이 넘는 첩과 부인을 두고 100명이 넘는 자녀를 낳기도 했다고 한다.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권력의 상징인 신전들을 아아주 많이 건설하여서 가는 유적마다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람세스 2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수많은 건축물들이다.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는 것은 당시가 매우 풍요로웠음을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볼 때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나일 강이 크게 범람해서 풍년인 해가 많았다. 이집트 경제는 나일 강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이게 넓게 범람할수록 더 많은 땅에 영양분이 공급되어서 농경지가 넓게 조성되어 풍년을 이뤘기 때문이다. 람세스 2세는 엘레판티네 섬에 있는 나일로미터와 같은 수위계를 이용해 범람 규모를 예측하여 농사가 얼마나 잘될지 내다볼 수 있었고, 풍년인 정도에 따라 세금을 올리거나 낮추는 수학적인 조세제도를 마련했다. 여기에 당시 개발되었던 방아두레박이라는 기구로 범람이 끝난 후에 농경지로 물을 쉽게 끌어올 수 있게 되어 더욱 효율적인 농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들을 이용하여 세금을 더욱 많이 거둘 수 있었다. 강이 범람해서 농사를 못 지을 때엔 농부들을 신전을 짓기 위한 인력으로 썼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람세스 2세는 짓기도 많이 지었지만, 역대 파라오들이 세운 수많은 건축물들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대신 새겨 넣는 일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역대 파라오들의 업적을 자기 것으로 돌려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작업인데, 사실 이건 파라오가 바뀔 때마다 반복되어왔던 관습이었다. 다만 양각으로 이름을 새겼던 전통과는 달리 후대 파라오들이 절대로 건드릴 수 없도록 깊게 음각으로 파서 영원히 자신의 이름이 남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기둥에 새긴 이름을 지웠다간 건물이 무너질 정도? 농담이지만.

 

 

건축 덕후가 된 이유?

 

그가 이렇게까지 건축에 집착한 이유는 자신의 가문, 19대 왕가의 정체성에 있다. 19대 왕가는 정통 왕의 혈통이 아닌 군인의 가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렇기에 평민출신이라는 굴레에 엮여 왕위의 정당성이 부족했다. 당연히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어 왕좌를 굳건히 다져야 하는데 람세스 2세의 조부인 람세스 1세는 뭔가 시도 해보기도 전인 재위 1년 반 만에 통치를 끝냈고, 부친인 세티 1세 또한 11년의 재위기간에 그쳐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진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엔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람세스 2세는 이에 위기를 느껴 재위기간 내내 건축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이 지은 수많은 건축물들 위에 벽화와 글을 새김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때로는 왜곡하기도 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강력한 파라오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켜나갔다. 아부심벨 내부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 정면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기둥이 많은 방, 즉 다주식 홀이 나오는데, 이 방의 벽에는 전사로서 부각된 람세스 2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아부심벨 내부의 카데시 전투 벽화 묘사 ---  이 전투는 지금의 시리아가 위치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전투인데,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융성하던 히타이트 왕국과 벌어진 전쟁이었다. 벽화에서는 이집트 병사가 모두 달아난 와중에도 람세스 2세가 아문신의 도움을 얻어 홀로 적을 제압했다고 나오지만, 현대의 전해지는 여러 정황들과 기록을 살펴볼 때 그는 목숨을 건졌을지는 몰라도 이기진 못했고 시리아지방도 이집트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사실을 왜곡한 것인데, 자기과시욕이 강했기 때문이건 평민이었던 신분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건 그가 이런 왜곡된 사실을 카르나크 신전과 같은 다른 유적에도 기록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에 바빴고, 이를 통해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지 통제와 선전 전략의 대가였던 것이다.

 


평균 수명의 세 배를 산만큼 진실을 왜곡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을까. 그에 의해 세워진 수많은 건축물들과 이름이 고쳐진 유적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람세스 2세에 대한 찬양을 담은 벽화에 둘러싸인 채로 새로이 태어난 이집트 국민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오래 삶을 영위하는 파라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제는 그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신의 존재가 되었음을 의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미지 통제에 성공하여 국민들의 자발적인 승인을 받아 내었든, 강력한 왕권으로 억눌러 강제로 복종을 이끌어 내었든 그의 선전 전략의 최종 목표였던 아부심벨 신전은 완성되었다. 이 신전의 건립으로 그는 살아생전에 신으로 추앙받았던 유일무이한 파라오가 되었다.

 

 

+TIP !

 

햇살의 과학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소신전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67년간 지배, 신전 다수 건설, 일자리,수도 건설, 신을 자처한 유일한 왕

  

이 부조들은 람세스 2세가 주도한 카데쉬 전투의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 카데시 전투는 현재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 간의 대규모 전투다.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쯤 아나톨리아 반도의 하투샤(현재 터키 중부의 보아즈칼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히타이트 왕국과 근동 지방을 중간에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4년 4월 카데쉬를 향해 약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떠난다.

 

람세스 2세는 한 달 뒤 적군의 속임수에 걸려 위기에 처한다.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이집트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홀로 싸운 람세스 2세는 아문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이집트의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히타이트 측의 기록과 객관적인 정세로 볼 때 람세스 2세는 필사적으로 탈출했을지언정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데시도 여전히 히타이트 왕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람세스 2세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에 자신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부조들을 새겨 놓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람세스 2세를 자기현시욕이 매우 강하고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기록을 이용해 현실을 지배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람세스 2세 치하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대탈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약 66년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해 온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서 그 같은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은 유대인들이 왕릉이나 신전을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이집트인들에게는 사소한 사건을 나중에 유대인들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고 그는 추측하기도 한다.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누비아는 고대 아프리카 북동부에 있었던 지명으로, 이집트인이 이 지방의 흑인을 놉(Nob) 즉 노예라고 부른 것이 ‘누비아인’으로 되어 누비아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남서쪽 코르도판 고원에 사는 부족이 누바(Nuba)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다. 누비아인은 누비아 사막지대의 나일강 유역에 살던 농민인데,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생긴 나세르호(湖) 때문에 이 지역이 수몰되어 1961년부터 수단 정부의 도움으로 누비아사막 남쪽 끝 아토바라강(江)의 에티오피아 국경에 가까운 곳에 건설된 하슴 엘 길바 댐 부근의 농경지로 집단이주하였다.

 

누비아의 유적은 나일강 상류의 제1폭포에서 제4폭포에 이르는 하안지역(누비아)에 산재한다. 즉, 이 지방은 황금 •석재의 산지이며, 또 상아 •흑단 •진귀동물 등을 생산하는 아프리카 오지(奧地)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집트 국왕들은 때때로 원정하여 이곳을 영유하였다. 따라서 구석기시대부터 이슬람 침입까지의 각 시대의 신전 •성채 •비문 •분묘 등의 유적이 많다. 특히, 아부심벨신전(神殿), 제벨 바르칼에 있는 신전군(群), 쿠르르와 누리에 있는 나파타 왕국의 피라미드군(群)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물 밑에 가라앉는 유적의 구제조치로서 1960년부터 국제적인 규모의 조사와 아부심벨 •칼라브샤 •케르타시 •덴두르 •겔프후세인 등 주요 신전의 이축(移築)이 이루어졌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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