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아프리카 탐사단

카이로, 이집트

africa club 2013. 9. 14. 22:06

 

카이로, 이집트

 

-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잃어버린 역사 – 제데프레 왕의 재조명

 

 

카이로 하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문명과 거의 연관이 없으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사실 카이로 지역은 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나일강 삼각주에 속하는 습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약 15세기 전인 642년에 이집트를 점령한 아무르 이븐 알 아스가 군대의 주둔지 푸스탓(Fustat)을 건설한 것이 카이로의 출발점이다. 카이로는 카타이 시대와 파티마 왕조, 살라딘의 아이윱 왕조 등을 거쳐 마믈룩 왕조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1517년 오스만 제국 셀림 1세의 정복으로 속주가 되면서 영광의 빛이 바래게 된다. 잠시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던 카이로는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다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 카이로는 19세기 무하마드 알리 왕조 아래에서 근대 도시 카이로가 정비되면서 오늘날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비록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카이로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정도 떨어진 기자 평원은 고대 이집트의 중심이였고 이집트의 수많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피라미드들이 바로 이 피라미드들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모두 기원전 25세기에 150여 년 간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이집트 제 4왕조의 유물이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로 인해 대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그의 아들 카프레 왕, 손자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들이 이에 속한다.

 

대피라미드는 높이가 148m, 밑변 길이가 233m에 달하며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조금 작다.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라미드들보다 규모가 훨씬 작으며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 다소 급하게 건설된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집트인들은 왜 피라미드를 만들었을까? 가장 지배적인 주장은 피라미드가 파라오들의 무덤이며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력과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이 건축물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피라미드 안에서 파라오의 미라가 발견된 바가 없고, 조세르 왕의 경우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기의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점 때문에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라면 굳이 하나 이상을 지을 이유가 없다).

 

 

피라미드 건설의 또 하나의 유력한 원인은 바로 나일강의 범람이다. 에티오피아 고원의 폭우로부터 비롯된 나일강의 범람은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이집트의 번영을 가능케 했지만, 범람했던 계절에는 농토의 대부분이 물에 잠겨 농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수많은 농민들의 일터와 생계수단을 앗아갔다. 따라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엄청난 노동력과 자원이 필요한 피라미드의 건설을 통해 실직 상태인 농민들에게 일터와 임금을 제공하여 경제를 안정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외에도 피라미드의 건설에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일단 이 엄청난 건축물들이 4500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특히 쿠푸 왕의 대 피라미드에는 2톤 이상의 돌들이 무려 230만 개 이상 사용되었는데 이 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까지도 어떻게 당대의 기술로 이러한 건축물을 만들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피라미드의 각 꼭짓점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돌들이 아주 정교하게 쌓여져 있어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각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면의 모든 돌들이 약간 중앙을 향해 기울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만약에 피라미드가 붕괴되더라도 안으로 붕괴되도록 설계하여 견고함을 높이기 위한 건축기술이었다.

 

피라미드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로, 영화나 책에서 보여지는 피라미드의 건설 현장에서는 노예들이 착취를 당하며 노동을 하는 장면들이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던 기원전 25세기의 고대 이집트에는 노예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꾼들은 매일 무거운 돌을 운반하고 쌓아야 했기 때문에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좋은 보살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석공과 건축가, 기술자들 밑에서 일을 했고, 피라미드 주변에는 일꾼들의 마을이 존재했다. 일꾼들의 마을이 있던 터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로 기록된 석판에서 일꾼들의 업무일지가 발견되었는데 일을 나오지 못한 이유 중에 과음과 숙취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꾼들이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잃어버린 역사 - 네 번째 피라미드와 제데프레 왕

 

기자의 3대 피라미드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네 번째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자의 피라미드는 모두 제 4왕조의 파라오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당시는 피라미드 건설의 전성기였고, 모든 파라오들은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 자신의 피라미드 건설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제 4왕조에서 왕위에 올랐던 파라오는 쿠푸 왕과 그의 아들 제데프레 왕, 카프레 왕, 그리고 쿠푸 왕의 손자 멘카우레 왕으로 총 4명인데, 이 중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만이 기자 평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데프레 왕은 왜 유일하게 기자에 피라미드를 남기지 않았을까? (이집트 제 4왕조 계보 자료)

 

제데프레 왕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그는 악질적인 파라오로 묘사되어왔다. 에밀 샤시냐 등 초기 이집트 학자들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은 왕위 계승자이자 형인 카와브 왕을 죽이고 그 직후 자신의 누이이기도 한 형수와 결혼하는 등 8년 동안 파렴치한 통치를 하다가 이복동생인 카프레에게 암살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한 근거는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에서 나왔다.

 

아부라와슈의 폐허에서 제데프레 왕의 조각상들은 모두 부서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조각상에 영혼이 깃들어 산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조각상을 부순다는 것은 내세에서의 영원한 죽음을 뜻하며, 이는 극악한 범죄에 대한 복수였기 때문에 초기 이집트 학자들은 제데프레 왕이 그가 저지른 극악한 범죄들로 인해 살해되고 그의 조각상들마저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이 기자 평원이 아닌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것 또한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해석했다. 위와 같은 근거들을 토대로 제데프레 왕은 역사에서 악독한 왕으로 기록되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와 새로운 증거들은 이 주장의 정당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붕괴되어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기자 평원으로부터 약 8km정도 떨어져 있는 아부라와슈에 있었다. 아부라와슈는 군사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은 허가되지 않지만 소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잃어버린 4번째 피라미드의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초기 이집트 학자들이 제데프레 왕이 자신의 피라미드의 위치를 아부라와슈로 정한 것을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현대 이집트학자들은 이를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통해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했는데 재임 기간 내에 완성을 해야 했기 때문에 크기로 승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데프레 왕은 짧은 시간 내에 높은 피라피드를 짓기 위해 이미 120m 높이의 아부라와슈 언덕의 꼭대기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현재까지 가상으로 복원된 자료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68m 높이에 120m의 언덕 높이를 더해 아버지 쿠푸 왕의 피라미드보다 조금 더 높았으며, 12m의 아스완 화강암을 토대로 매끈한 석회암과 호박금을 씌운 정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쿠푸 왕이 석회암보다 훨씬 단단한 화강암을 피라미드 내의 내실 보호를 위해서만 사용했던 것과 달리 제데프레 왕은 최초로 화강암으로 피라미드의 외벽을 건설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암과 달리 화강암은 나일강 하류 아스완으로부터 960km 뱃길을 따라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화강암의 사용은 막강한 힘을 상징했다. 이러한 화강암을 건물 외벽에 사용했다는 것은 제데프레 왕의 강력한 힘과 통치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최근 기자 평원에서 발견된 새로운 증거들 또한 제데프레 왕의 삶을 재조명한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서있는 스핑크스는 원래 카프레 왕의 조각이라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카프레 왕의 모든 조각상에는 턱수염이 달려있고 머리 장식에 주름이 없는데 반해 스핑크스에는 턱수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 장식에 주름이 존재한다. 즉,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조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잇는 선이 스핑크스를 우회하는 것을 보면,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누구의 조각상일까?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스핑크스의 얼굴은 쿠푸 왕의 작은 조각상과 가장 닮아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만, 쿠푸 왕이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증거에 의하면 쿠푸 왕은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자원을 쏟아 부어서 대피라미드의 건설에만 집착한 폭군으로서, 다른 공사에 자원을 배분할 여유가 없었고, 스핑크스와 같은 대규모 공사를 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리하면, 스핑크스는 쿠푸 왕이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카프레 왕 이전에 이미 완공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은 단 한 명,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아부라와슈에서 출토된 스핑크스의 얼굴과 사자의 몸통부분 조각상이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 쿠푸 왕의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 옆 구덩이에서 발견된 신성한 배에서도 제데프레 왕에 대한 새로운 진실이 밝혀졌다. 신성한 배의 용도는 사카라의 상형문자에 설명되어있는데, 이 배의 용도는 파라오의 내세로의 편안한 여행을 위함이다. 쿠푸 왕에게 이 신성한 배를 선물한 사람의 이름은 아직도 구덩이에 쓰여있다.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추가적으로, 제데프레 왕이 형인 카와브 왕을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큰 힘을 실어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왕위 계승자였지만 계승을 하지 않은 카와브 왕의 딸인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제데프레 왕의 이름이 발견된 것이다. 만약 제데프레 왕이 카와브 왕을 죽였다면, 카와브 왕의 딸이자, 다음 계승자였던 메레산크가 아버지를 죽인 자의 이름을 자신의 무덤에 기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2)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인 쿠푸 왕을 조각한 스핑크스를 건설하고 아버지의 평안한 사후세계를 위해 신성한 배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발견된 증거를 고려한다면, 제데프레 왕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는 불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념한 효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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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ko.wikipedia.org/wiki/%EC%B9%B4%EC%9D%B4%EB%A1%9C

2) History Channel, “The Lost Pyra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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