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르테이트(Apartheid)
이 용어는 아프리칸즈어로 분리의 의미를 지닌다. 아파르테이트는 인종 각자의 특성에 따라 분리, 발전되어야 한다는 국민당(1948년 이하 남아공 정부의 통치당)의 정책이다. '아파르테이트'(Apartheid)라 불리우는 인종차별 법은 단지 전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는 백인이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혹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남아공에는 공식적으로 4개의 주요 인종집단이 피라미드형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전체인구의 13.6%인 백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지배충을 형성하고 있으며 약 11,2%의 혼혈, 아시아인들이 중간계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단순 노동자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는 전인구의 75.2%매 달하는 다수의 흑인들이 있다. 현재 남아공은 4개주와 흠랜드(Homeland)라고 불리우는 6개 자치민족국가 그리고 4개 독립 민족국가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전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혹인들은 전지역의 13%에 해당하는 '홈랜드'에 거주하고 있다.
이같은 모순된 지배체계는 네들란드인의 동인도회사가 1652년 케이프 (Cape) 정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케이프타운은 단순한 중간 정박소였으나 동인도회사는 식량과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인 호텐
토족과의 우호관계 유지를 정하는 법형 제 1호를 제정한 것이 최초의 인
종관계법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농업과 목축업의 발달로 백인들의 인구는 점차 늘어났으며 토지의 확장으로 원주민과의 마찰도 점차 증가하였다. 한편, 영국은 1803년 케이프를 점령하였고 1814년 나폴레옹전쟁 이후 정식으로 케이프를 영국령으로 편입시켰다. 1089년 영국의 총독인 카텐트공은 호텐토트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법은 오늘날 남아공의 아파르테이드정책의 법적 기저를 이루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주민 호텐토트족띄 관습법 폐지와 아울러 그들을 영국 식민지법하에 두고 그 식민지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호텐토트족들은 백인고용주의 증명이 겯들여진 신분증명서를 한시 휴대할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후 영국은 기존의 케이프주와 나탈주를 다이아몬드, 금, 철강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트랜스바알공화국, 오렌지자유국 등과 병합하여 1909년 영연방인 남아프리카연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연방은 백인과 비백인 사이의 적대 뿐만 아니라 영국계와 네들란드 후손인 보어인과의 적대관계를 보였다. 1948년 보어인계의 아프리카너 민족정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이 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영 연방에서 탈퇴하여 남아공이 되었다. 국민당은 철저한 백인우월주의 의식하에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테이트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1949년 혼합결혼 금지법, 1950년의 부도덕행위 금지법, 인구등록법, 그리고 집단지역 법 등의 제정을 통해 이 종족간의 혼인금지, 백인과 비백인간의 교제와 성행위 금지, 인종차별로 구성된 거주지 설정 등을 구체화 하였다. 이밖에 1953년에 제정된 반투코육법과 1959련의 분리대학법 등의 차별법은 교육에 있어서 그리고 심지어는 공원과 해수욕장에서도 백인과 비 백인간에 차별을 두었다. 이와같이 백인들은 남아공의 완전한 지배를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전반에 걸쳐 유색인종 특히 혹인들에 대한 철저한 차별을 목적으로 하는 법제도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공정부에 의한 아파르테이트 수용과 실시는 아프리카대륙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가들로 부터 심각한 저항과 제재를 불러일으켰다. 국내적으로는 인종차별 법에 대항한 아프리카 민족회의, PAC(범아프리카회의), 공산당 등 수많은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특히 1912년에 창설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흑인저항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80년대 중반까지 무력투쟁이나 사보타지 등의 수단으로 저항하였으며 '80년대 중반이후는 주로 대화나 타협으로 백인정부와 협상을 시도했다. 1950년 5월 1일 스트라이크로 8명이 사망하는 최초의 저항이 시작된 이래 1960련의 샤프빌에서 72명이 사망하고 180명 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 이 사건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PAC 등의 단체들이 모두 불법화되었으며 이들 단체들은 이웃 나라들, 주로 전선국가(모잠비크, 탄자니아, 잠비아, 앙골라, 짐바브웨)들의 원조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세계 각 국가들은 남아공을 유엔에서 축출하는 등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스포츠에서도 철저히 남아공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특히, 석유금수, 투자철회, 무역단절 등의 경제적 제재는 남아공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1980년에 실질 GDP성장이 7%에 달했으나 1981-88년까지의 GDP성장은 단지 연 평균 1.5%의 성장에 그쳤다. 동 기간 동안 인구 증가율이 2.5%였으므로 실질 소득은 마이너스 성장을 이룬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남아공의 정치, 군사적 전략의 중요성으로 인해 남아공 제재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여 1980년 중반까지 남아공에 대한 경제 제재는 사실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986년 남아공 제재조치가 미국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남아공 경제는 급속히 침체하였다.
한편, 1970년대말 부터 1950년대증반 까지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백인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원조하는 국가들은 주로 주변의 흑아프리카 국가들과 소련 등 동구국가들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국제정치의 해빙무드로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었으며 주변 흑 아프리카 국가들도 남아공의 군사적 위협으로 아프리카 민족
회의기지(base) 제공 등을 중단하였다. 따라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무력투쟁 보다는 백인정권과 협상을 훤했다.
1989년 데 클레르크(F.W de Klerk)의 대통령 취임은 남아공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 오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의해 개방과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단계 조치로 1990년 2월 만델라 등 정치범 석방과 아프리카 민족회의 등의 불법단체들을 합법화했다. 또한 그 동안 지속되었던 각종 인종차별 법을 ·철폐하였다. 혼합결혼금지법과 부도덕 법은 1985년에 이미 철폐되었으며 토지법, 집단거주지역법, 인구등록법 등이 1991년 9월에 폐지되었다.
1991년 12월, 19개 각종 단체들은 신헌법 제정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만델라 사이의 상호 비난과 줄루족을 기반으로 하는 인카타 자유당(Inkata Freedom Party) 등의 자치국(Homeland) 대표자들은 신헌법이 그들의 홈랜드 자치권을 약화시킬 것으로 우려하여 신헌법조약에 비준하기를 거부하는 등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출발을 보였다. 즉, 흑.백간의 갈등, 강.온건 백인간의 갈등 그리고 흑. 흑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환경변화 아래에서 백인의 생존을 위한 전략과 급진적인 국가전복 보다는 선거라는 혁명을 통
한 점차적인 혹인해방 성취 그리고 자치국들의 지위보장 등의 합의로 남아공 최초로 지난 4뭘 선거가 실시되어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압승으로 인종차별은 종식되었다. 즉 남아공에서의 선거혁명으로 17세기 이래 백인들이 지배하였던 흑아프리카가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존엄에 관한 근대적인 자각이 있은 이래 박해를 받은자가 박해자와 싸워 전쟁과 혁명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승리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때 남아공에서 만델라의 승리로 흑백차별이 종식된 것은 인류문명사의 획기적인 쾌거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아프리칸즈어로 분리의 의미를 지닌다. 아파르테이트는 인종 각자의 특성에 따라 분리, 발전되어야 한다는 국민당(1948년 이하 남아공 정부의 통치당)의 정책이다. '아파르테이트'(Apartheid)라 불리우는 인종차별 법은 단지 전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는 백인이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혹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남아공에는 공식적으로 4개의 주요 인종집단이 피라미드형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전체인구의 13.6%인 백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지배충을 형성하고 있으며 약 11,2%의 혼혈, 아시아인들이 중간계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단순 노동자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는 전인구의 75.2%매 달하는 다수의 흑인들이 있다. 현재 남아공은 4개주와 흠랜드(Homeland)라고 불리우는 6개 자치민족국가 그리고 4개 독립 민족국가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전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혹인들은 전지역의 13%에 해당하는 '홈랜드'에 거주하고 있다.
이같은 모순된 지배체계는 네들란드인의 동인도회사가 1652년 케이프 (Cape) 정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케이프타운은 단순한 중간 정박소였으나 동인도회사는 식량과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인 호텐
토족과의 우호관계 유지를 정하는 법형 제 1호를 제정한 것이 최초의 인
종관계법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농업과 목축업의 발달로 백인들의 인구는 점차 늘어났으며 토지의 확장으로 원주민과의 마찰도 점차 증가하였다. 한편, 영국은 1803년 케이프를 점령하였고 1814년 나폴레옹전쟁 이후 정식으로 케이프를 영국령으로 편입시켰다. 1089년 영국의 총독인 카텐트공은 호텐토트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법은 오늘날 남아공의 아파르테이드정책의 법적 기저를 이루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주민 호텐토트족띄 관습법 폐지와 아울러 그들을 영국 식민지법하에 두고 그 식민지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호텐토트족들은 백인고용주의 증명이 겯들여진 신분증명서를 한시 휴대할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후 영국은 기존의 케이프주와 나탈주를 다이아몬드, 금, 철강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트랜스바알공화국, 오렌지자유국 등과 병합하여 1909년 영연방인 남아프리카연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연방은 백인과 비백인 사이의 적대 뿐만 아니라 영국계와 네들란드 후손인 보어인과의 적대관계를 보였다. 1948년 보어인계의 아프리카너 민족정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이 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영 연방에서 탈퇴하여 남아공이 되었다. 국민당은 철저한 백인우월주의 의식하에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테이트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1949년 혼합결혼 금지법, 1950년의 부도덕행위 금지법, 인구등록법, 그리고 집단지역 법 등의 제정을 통해 이 종족간의 혼인금지, 백인과 비백인간의 교제와 성행위 금지, 인종차별로 구성된 거주지 설정 등을 구체화 하였다. 이밖에 1953년에 제정된 반투코육법과 1959련의 분리대학법 등의 차별법은 교육에 있어서 그리고 심지어는 공원과 해수욕장에서도 백인과 비 백인간에 차별을 두었다. 이와같이 백인들은 남아공의 완전한 지배를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전반에 걸쳐 유색인종 특히 혹인들에 대한 철저한 차별을 목적으로 하는 법제도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공정부에 의한 아파르테이트 수용과 실시는 아프리카대륙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가들로 부터 심각한 저항과 제재를 불러일으켰다. 국내적으로는 인종차별 법에 대항한 아프리카 민족회의, PAC(범아프리카회의), 공산당 등 수많은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특히 1912년에 창설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흑인저항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80년대 중반까지 무력투쟁이나 사보타지 등의 수단으로 저항하였으며 '80년대 중반이후는 주로 대화나 타협으로 백인정부와 협상을 시도했다. 1950년 5월 1일 스트라이크로 8명이 사망하는 최초의 저항이 시작된 이래 1960련의 샤프빌에서 72명이 사망하고 180명 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 이 사건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PAC 등의 단체들이 모두 불법화되었으며 이들 단체들은 이웃 나라들, 주로 전선국가(모잠비크, 탄자니아, 잠비아, 앙골라, 짐바브웨)들의 원조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세계 각 국가들은 남아공을 유엔에서 축출하는 등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스포츠에서도 철저히 남아공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특히, 석유금수, 투자철회, 무역단절 등의 경제적 제재는 남아공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1980년에 실질 GDP성장이 7%에 달했으나 1981-88년까지의 GDP성장은 단지 연 평균 1.5%의 성장에 그쳤다. 동 기간 동안 인구 증가율이 2.5%였으므로 실질 소득은 마이너스 성장을 이룬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남아공의 정치, 군사적 전략의 중요성으로 인해 남아공 제재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여 1980년 중반까지 남아공에 대한 경제 제재는 사실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986년 남아공 제재조치가 미국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남아공 경제는 급속히 침체하였다.
한편, 1970년대말 부터 1950년대증반 까지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백인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원조하는 국가들은 주로 주변의 흑아프리카 국가들과 소련 등 동구국가들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국제정치의 해빙무드로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었으며 주변 흑 아프리카 국가들도 남아공의 군사적 위협으로 아프리카 민족
회의기지(base) 제공 등을 중단하였다. 따라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무력투쟁 보다는 백인정권과 협상을 훤했다.
1989년 데 클레르크(F.W de Klerk)의 대통령 취임은 남아공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 오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의해 개방과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단계 조치로 1990년 2월 만델라 등 정치범 석방과 아프리카 민족회의 등의 불법단체들을 합법화했다. 또한 그 동안 지속되었던 각종 인종차별 법을 ·철폐하였다. 혼합결혼금지법과 부도덕 법은 1985년에 이미 철폐되었으며 토지법, 집단거주지역법, 인구등록법 등이 1991년 9월에 폐지되었다.
1991년 12월, 19개 각종 단체들은 신헌법 제정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만델라 사이의 상호 비난과 줄루족을 기반으로 하는 인카타 자유당(Inkata Freedom Party) 등의 자치국(Homeland) 대표자들은 신헌법이 그들의 홈랜드 자치권을 약화시킬 것으로 우려하여 신헌법조약에 비준하기를 거부하는 등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출발을 보였다. 즉, 흑.백간의 갈등, 강.온건 백인간의 갈등 그리고 흑. 흑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환경변화 아래에서 백인의 생존을 위한 전략과 급진적인 국가전복 보다는 선거라는 혁명을 통
한 점차적인 혹인해방 성취 그리고 자치국들의 지위보장 등의 합의로 남아공 최초로 지난 4뭘 선거가 실시되어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압승으로 인종차별은 종식되었다. 즉 남아공에서의 선거혁명으로 17세기 이래 백인들이 지배하였던 흑아프리카가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존엄에 관한 근대적인 자각이 있은 이래 박해를 받은자가 박해자와 싸워 전쟁과 혁명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승리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때 남아공에서 만델라의 승리로 흑백차별이 종식된 것은 인류문명사의 획기적인 쾌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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