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위대한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Transkei) 인근 템부(Thembu)지역에서 마디바(Madiba)족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이름은 학교 선생님이 그에게 영어식 이름을 지어 주어 갖게 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고문회의 의장이었으며 만델라가 아홉살이 나던 해에 사망했다.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일종의 로열티가 나중에는 만델라가 정치적 행동을 하는 데에 중요한 후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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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이후 만델라는 국회의장 혹은 군주의 후견아래 만델라는 현직으로 출마하기도 했던 만델라는 그 이후 조국의 안위를 위해 투쟁하며 그의 종족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하기 시작했다.
기본교육을 마친 만델라는 힐타운(Healdtown)에 있는 감리교 대학에 입학하고 그 다음에는 포트하레(Fort Hare)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사 과정을 밟았다. 학생대표 등을 맡고 있던 만델라는 결국 학교로부터 저항모임 등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었고, 요하네스버그로 교환학생으로 보내졌다. 결국 남아프리카 대학에서 첫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이러한 경험은 1943년에 이르러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Youth League of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에 창립자로 활동하면서, 비트바터르스란트(Witwatersrand)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즈음에 나중에는 정치적 동지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는 올리버 탐보(Oliver Tambo)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만델라는 의지가 굳은 동지들과 힘을 모아 Anton Lembede의 지휘아래 뭉치게 되었다. 물론 그 속에는 그의 소중한 친구들이었던 William Nkomo나 시술루, 탐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60명으로 시작한 이들 모임은 아프리카 회의를 전 지역적인 운동으로 전환하는 임무와 그 운동의 힘을 추출해 내고 대규모의 사람들을 선동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했었다.
이 활동을 기반으로 만델라는 1943년에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을 창립하고 이듬해 1944년 Evelyn Mase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57년이 되어서는 이혼하게 된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다.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으로 통해 본격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시작한 만델라는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의 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그 덕분에 아프리카회의로부터 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탐보와 함께 흑백차별의 논리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대항하며 본격적인 항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아파르트하이트의 초기였던 1948년 선거에서 국가당(National party)이 압승을 하게 되자 만델라는 이듬해 청년회의에서 행동노선을 채택하여 보이콧, 파업 불복종과 비협력을 무기로 채택하여 적극적으로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프리카회의에 의해서도 이 노선이 전격적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1950년의 청년회의 노선으로 전시민권의 부여와 직접선거로 이루어지는 국회 대표제를 정한 만델라는 토지의 재부분배와 노동쟁의의 권리, 교육, 문화 부문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 만델라는 모든 아이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성인교육에 이르기까지 보장되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1952년 아프리카 연맹이 정당하지 못한 법률을 무시하자는 캠페인이 준비되었고, 이는 전시민적인 불복종 캠페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만델라는 이 과정에서 자원하여 앞장서 이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일반인을 이끌어야 할 자원자로서 책임 다해야 함을 각성하고, 차별법안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전 국토를 누볐다. 만델라는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감옥행을 선고받았고, 집회에 참가가 금지됨은 물론 요하네스버그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주제한까지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만델라는 탐보와 함께 법률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가 법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파르트하이트, 차별적인 법률에 대한 저항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을 쌓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탐보와 함께 성공적으로 1952년 법률가로서의 인증을 받은 만델라의 정치적 행보는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법률가로서의 그들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법률가 자격증은 아파르트하이트로부터의 면죄부는 되지 못했다. 차별법의 부당함에 대해 뼈저리게 느낀 이들에게 당국은 그들의 변호사 사무소를 사람들이 일과 시간에 찾아 올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먼 곳에 열 것을 명령한 것이다. 마치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말과도 다름없는 이 말을 이 두 사람은 무시해 버렸다. 결국 만델라는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물러날 만델라는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흑인 인종격리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을 꾸준히 진행하였고, 공식적인 집회 없이도 저항운동의 리더쉽을 긴밀하여 유지할 수 있는 조직적 계획을 맡아 진행해 나가기도 했다. 지방과 지역적인 힘까지 모아 저항운동을 하나의 큰 물결로 이끌어 내고자 했던 이 계획은 만델라 이후에는 M-plan이라 명명되었다.
1956년에 국가 중요 반역죄로 기소되고 4년 뒤에 다시 이 소송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1958년에 통과된 흑인들이 일하고 거주하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명령으로 정하는 Pass Law에 대항하여 꾸준히 저항운동을 계속하는 등 그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서 우러러 나오는 행동은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도 식을 줄을 몰랐다. 그가 만 40세가 되던 그해 만델라는 또 한 명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데, 후에 영부인이 되었다가 이제는 이혼한 Winnie Madikizela이다. 나중에 위니는 만델라 석방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가장 절정이었던 만델라의 50년대 투쟁활동의 전반은 서구인 거주지연 이전과 반투 교육의 도입에 대한 저항을 이끌고, 1955년에 민중의회에 의해서 채택된 자유헌장의 보급하는 등의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50년대 후반에는 노동착취, 거주지분리 법안, 초기 흑인자치구역 정책에 대항한 저항운동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 흑인자치구역 정책에 관해서 만델라는 후일 이 법안에 의해 치밀한 계획에 의한 대규모 축출은 물론 정치적 박해와 공포정치가 실현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견하기도 하였고 이에 대한 투쟁과 저항에 힘을 쏟았다.
결국 그는 50년대를 통찰해 볼 때, 억압적 정치제도와 법안에 의한 처저한 희생물이었다. 결국 그는 수배가 내려지고 체포되었고 수감되었다.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된 바 있었던 그는 1960년 3월 샤프빌흑인학살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기에 이르고, 1962년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1964년 범죄혐의 추가로 다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길고 긴 수감생활에 들어가야만 했다.
체포되기 전 그는 강제적으로 가족들로부터 격리된 생활을 하거나, 수사를 피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면서 까지도 끝까지 자유를 향한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범위를 좁혀 오는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가장복과 변장을 시도했고, 일반 노동자의 옷이나 운전기사로 변장하는 것은 다반사에 가까웠다.
그 때 즈음은 남아프리카 자유운동이 새로운 전환을 꾀하던 시기였고, 아프리카회의(ANC)는 좀더 차별화된 자유운동 기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전환과 새로운 기구가 바로 평화시위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즈음이 다른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깨달을 언저리였고, 만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국 그는 체포된 것이다.
리보니아에서 열린 공판에서 만델라는 서슴없이 이를 밝히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Umkhonto we Siewe라 불리는 폭력 투쟁은 바로 평화적 저항 수단에 철저한 박해로써 대응했던 정부에 대한 최후의, 그리고 정당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백인에 의해 조직된 사법부에 의해 전적으로 주관되는 재판에서 만델라는 스스로 자신의 변호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재판의 진행이 공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몇 번의 재판을 거듭한 뒤에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만델라는 경계가 삼엄하기로 악명높은 로벤섬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긴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감옥에서 도덕적 권위와 지도력을 바탕으로 수감자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노력하는 등의 살아 움직이는 실천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감생활이 길어지고 감옥 밖의 탐보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석방운동으로 인해 만델라는 점점 인권운동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기도 하여, 세계인권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1980년 망명해 있던 만델라의 친구 탐보가 만델라를 석방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국제사회는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종격리 정책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과 제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국제적 압력은 결국 1990년에 이르러 드 클레르크 대통령으로 하여금 아프리카 회의에 대한 해금조치와 함께 만델라를 석방하게 만들고 만다. 마침내 아프리카회의는 그들이 그렇게 꿈꾸던 새로운 다인종 민주주의를 형성해 나가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고, 만델라는 세상에 다시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아프리카회의는 곧 만델라를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병든 탐보 대신 국회의장으로 다시 추대하게 된다. 만델라는 새로운 다인종 국가의 민주헌법의 제정을 위해 데 클레르크 총리와 긴밀한 협조와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평온한 사회로의 이행을 부단히 추구하였고, 그 결과 1993년에는 이 두 사람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94년 4월에 실시되었던 대통령선거에서는 국민의 65%에 달하는 지지율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는 경이로운 득표율일 뿐만 아니라,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역사적인 결과였다. 반세기에 이르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시대가 종식되고 남아프리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총선에 의해 구성된 정부 역이 5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통치하였고, 총선에서 5%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정당은 내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일궈낸 업적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는 어려울 듯 하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공포에 질린 백인 세력에 대하여 포용정책을 먼저 실시했다. 화해와 용서, 민주화를 향한 ‘큰 정치’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다름 아닌 그의 포용정책에 그 근거를 둔다.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으면 사면을 통해 용서하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흑백간의 화합을 통한 국가적 통합을 이루려 노력했고, 심지어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입안자와도 만나 손을 잡는 등 화해와 용서의 맨 앞에 서서 뜻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면모는 한 나라의 경영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를 대변하는 정치가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21세기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나선 만델라의 정치적 위상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어 갔다. 만델라는 국제무대에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함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을 중재하고 국가들간 경제협력을 주도하는 데에서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했다.
먼저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도자로서 만델라는 97년 로커비 비행기 폭파사건과 관련하여 유엔의 봉쇄조치 하에 있던 리비아를 방문하여 서방세계에 향하여 봉쇄조치를 해제할 것을 촉구하고, 서방과 국제사회의 이익이 아프리카의 이익에 선행될 수 없음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로커비 비행기 폭파사건의 재판을 재 3국에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공정한 재판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희생자 가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비행기 폭파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고 제 3국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라도 재판이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방에 의한 기준 없는 국경분할과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아프리카내 국가들의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지역분쟁 문제를 서방에 의존하지 않고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해결함으로써 좀더 실질적인 해결책을 얻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종전의 해결방식과는 다른 평화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나이지리아 군사정부의 독재에 대한 국제적 비판여론을 조성하는가 하면 자이르 내전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여 모부투와 카빌라 두 명의 분쟁 지도자들을 30년만에 만날 수 있게 하였다. 비록 그의 이러한 노력은 표면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모부투가 군사적 충돌을 포기하고 망명을 택하는 등 평화적으로 결론이 지어져 기존의 목표는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제적 발전을 위한 노력은 기존 백인 세력이 이루어 놓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력이 크게 힘이 되었다. 전 아프리카의 30%에 달하는 국민 총생산력을 지닌 남아아프리카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만델라는 각종 지역경제공동체 기구 창설에 앞장서게 된다. 특히 1979년에 창설된 남부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에 의장에 부임하여 실질적인 활동을 주도하면서 유럽연합과 같은 자유무역지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노력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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