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아는 남위 9°∼18°, 동경 23°∼34°에 위치한 아프리카 중 남부 내륙국으로 남부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공화국이다. 면적 75만 2614㎢, 인구 971만 5000(1996). 정식명칭은 잠비아공화국(Republic of Zambia)이다. 독립 전에는 복로디지아라 했다. 북쪽은 탄자니아와 자이르, 동쪽은 말라위와 모잠비크, 서쪽은 앙골라, 남쪽은 나미비아와 보츠와나, 짐바브웨와 접하고 있다.
수도는 루사카이다. 주민은 대부분이 벰바·바로체 등의 반투계(系) 여러 부족이며, 종교는 애니미즘이 주류를 이루고, 로마 가톨릭이 약 20%, 그밖에 프로테스탄트· 힌두교· 이슬람교 등이 있다. 공용어는 영어이나 각 부족어 도 많이 쓰이고, 문맹률은 46%이다. 통화는 잠비아 크와차 이고, 국민총생산 31억 5,500만 달러(1992), 1인당 국민소득은 370달러(1992)이다. 북한과는 69년, 우리나라와는 90년에 수교하였다.남북최장길이는 약 821㎞이고 동서 최장길이는 1,385㎞이다. 면적(面積)은 75만 2,614㎢로 한국의 약 3.4배이다. 전 국토가 해발고도 900~1500m의 고지이며 남쪽 짐바브웨 국경에는 잠베지강 이 흐르고 있다. 북부의 므웨루호, 방궤울루호 와 남부의 카푸에인조호, 카리바인조호 등 호수와 늪 외에도 중부에 루캉가 늪지대가 있으나 대부분은 지대가 높은 사바나지역이다. 남부의 작은 도시 리빙스턴 부근의 잠베지강에는 탐험가 D. 리빙스턴이 발견하여 이름을 붙인,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큰 빅토리아폭포가 있다.
중부자이르 국경 부근에는 코퍼벨트라 불리는 대동광지대(大銅鑛地帶)가 있다. 동·남부 철도를 따라 있는 적색·적갈색 롬층지대에는 백인들에 의해 상업성을 띤 대 농장이 발달되어 있으나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급자족용 농사를 짓고 있다.잠비아는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내륙국가이며, 이 나라의 대부분은 산림으로 뒤덮인 4,000피트의 고원에 자리잡고 있다. 구리 광업이 경제의 주를 이루며, 구리는 수출량의 80%에 달한다. 옥수수가 중요한 작물이긴 하지만, 비옥하지 못한 토양 때문에 농사는 어렵다. 잠비아의 역사는 잠비아 서부 바로 첼란드 의 지배적 부족 로지족(族)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알루이족)은 룬다족 기타의 종족들과 함께 11세대 전의 조상인 신(神) 니얀베에게 이끌려 북서쪽에서 이동해와서 카푸에강 유역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앙골라 동부에서 보츠와나 북부에 걸친 바로체 왕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1798년 포르투갈인(人)이 처음으로 이 지방을 횡단하였으며, 알루이족은 1838년 북상해 온 코롤로족 에게 정복당하였다. 50년 이 지방을 탐험한 D.리빙스턴은 이 지방을 바로첼란드라고 불렀다. 알루이족은 그 후 64년 코롤로족을 격파한 뒤 로지족이라 자칭하고 왕국을 마로지라고 칭하여 재흥(再興)하였다. 그 때 추장(국왕)인 레와니카는 S.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와 협정을 맺고 광업권 등을 주었다.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그 광대한 지배지역을 로즈에 연유하여 로디지아라 불렀으나 1911년 남 ·북 로디지아의 통치를 분리, 북로디지아는 53년에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그 후 남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지금의 말라위공화국) 등 사이에 연방화 (聯邦化) 움직임이 일어나 45년에 성립된 중앙 아프리카 심의회(審議會)를 거쳐 53년 8월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연방이 성립하였다. 남 ·북 로디지아는 통화를 비롯하여 철도 ·항공사업 ·카리바댐 건설 등 많은 공동사업으로 결합을 굳혀 갔으나 케네스 카운다가 지도하는 ‘잠비아 아프리카민족회의(ZANC)’는 남로디지아의 백인정권을 연방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59년 ZANC는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그 대신 ‘통일민족독립당(UNIP)’이 성립되어, 그 범(汎)아프리카적 저항운동을 계속한 결과 64년 말에 연방은 해체되고, 북로디지아는 65년 1월 내정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광업권을 북로디지아 정부에 이양하는 교섭을 거쳐 카운다 수상의 UNIP 정권은 64년 10월 24일에 국명을 잠비아공화국이라 하고 독립하였다. - 독립과 더불어 케네스 카운다가 국민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잠비아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전유권자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며 대통령중심제 내각을 조직하고 국방군의 총사령관이기도 하다. 입법부는 국민의회이다. 1968년 12월의 총선거에서 카운다가 이끄는 UNIP가 81석, ‘아프리카 인민회의(ANC)’가 23석, 무소속 1석이라는 의석배분이 이루어졌으나 72년 12월 제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UNIP 이외의 정당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ANC와 통일진보당(UPP)은 해산되고, UNIP의 일당제(一黨制) 국가가 되었다. 카운다 대통령은 73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3선되어 독재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정당을 해산 당한 반대파 사람들도 그 후 UNIP에 대하여 협력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ANC와 UPP의 전(前) 당원들은 카운다 대통령에 대하여 비판적 언동을 하고 있으며, 카운다 체제는 반드시 안정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잠비아는 내륙국이며, 흑인 여러 나라 및 백인정권인 로디지아(짐바브웨)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남부아프리카 문제에 관하여는 중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리 등의 수출은 로디지아를 경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고려하여 다른 인접국인 탄자니아 및 독립 후의 모잠비크와는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짐바브웨의 반(反)백인정권 게릴라, 나미비아의 ‘남서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등에게 일관된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73년에 짐바브웨와의 국경을 폐쇄하고 그 백인정권과 긴장상태에 있었으나 경제적인 이유에서 78년 철도에 한하여 국경을 재개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도 나미비아 문제로 대립관계에 있었으나 그해 잠비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철도 ·항만을 사용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잠비아는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하면서 친공적(親共的) 외교노선을 펴왔는데 70년 이후는 서방측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려 하고 있다. 탄자니아와 함께 중국의 원조를 아프리카에서는 제일 먼저 받아들였다. 1969년에는 기간 업인 동광업을 국유화하였으며, 동의 국제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한 1974년까지는 호황을 누렸으나 1973년 7월의 남로데시아와의 국경폐쇄와 함께 로데시아철도의 사용정지, 10월의 석유파동, 1975년의 동 가격의 폭락, 그리고 그해 8월의 앙골라내전에 의한 벵겔라철도의 운행중지 등의 이유로 인하여 수출의 80∼90% 이상을 동에 의존하던 잠비아 경제는 위험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83년이래 IMF, IBRD의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받아왔다. 1989년 동구권 변혁에 영향을 받아 아프리 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잠비아에서도 이러한 경제적 위기상황과 맞물려서 1990년 7월에 UNIP의 일당독재에 반대하는 야당, 복수정당제민주주의운동(복수정당제민주주의:MMD)이 탄생하여 복수정당제로의 이행을 요구하였다.1990년 9월에 헌법개정위원회를 설치하여 12월에 UNIP이외의 정당을 금지하는 헌법 제 4조를 폐지하였다.
그 결과 91년10월에 복수정당제를 기치로 대통령선거와 국민의회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MMD의 당수인 Chiluba가 대통령으로 당선(84% 지지)되었으며 국민의회 선거에서도 MMD(150석 중125석 차지)가 압승하였다. 그러나 1994년 6월에 잠비아의 군대가 Sir. Dawada Jawara정부를 전복시켰고 이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국제적인 압력 하에서 새 군부 의 지도자 Yaha Jammehs 는 많은 연기 이후인 1996년 9월과 1997년 1월에 선거를 했다. 1996년과 1997년에 있었던 선거로 새 군부의 지도자 Yahah Jemmeh가 정권을 잡고 있으나 구데타에 의한 정치라는 점과 첩보기관을 이용해서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외의 잠비아의 복지제도는 국민공제기금 많은 고용인에게 퇴직수당을 지급하며 많은 임의 기부단체가 정부를 도와 청소년 비행, 입양, 난민 관리와 노령자, 극빈자, 장애자 보호대책에 참여한다. 한편 급격한 도시화는 심한 주택문제를 야기했으며 사회개발부는 도시와 농촌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상 잠비아를 간단하게 나마 살펴보았다. 말리에 관한 레포트를 쓰면서도 느꼈지만 아프리카의 현재는 혼란과 좌절의 시대인 것만 같다. 정국이 불안정하고 경제사정의 악화와 인구의 급증에 의해 소득수준은 크게 떨어졌으며, 특히 도시지역의 실업자, 빈곤계층이 많아 치안은 매 년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시인은 아프리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레포트를 쓰면서 이제는 그 말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 국가들의 이해에 따라 아프리카는 피자를 자르듯이 조각이 나고, 그들이 써오던 말 대신에 유럽 말 을 써야만 했다. 그들의 막강한 힘 앞에서 아프리카는 무참히 굴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문화마저도 서서히 잊혀져 갔을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겪었던 모든 아픔을 딛고 새롭게 거듭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오기만을 바란다.
수도는 루사카이다. 주민은 대부분이 벰바·바로체 등의 반투계(系) 여러 부족이며, 종교는 애니미즘이 주류를 이루고, 로마 가톨릭이 약 20%, 그밖에 프로테스탄트· 힌두교· 이슬람교 등이 있다. 공용어는 영어이나 각 부족어 도 많이 쓰이고, 문맹률은 46%이다. 통화는 잠비아 크와차 이고, 국민총생산 31억 5,500만 달러(1992), 1인당 국민소득은 370달러(1992)이다. 북한과는 69년, 우리나라와는 90년에 수교하였다.남북최장길이는 약 821㎞이고 동서 최장길이는 1,385㎞이다. 면적(面積)은 75만 2,614㎢로 한국의 약 3.4배이다. 전 국토가 해발고도 900~1500m의 고지이며 남쪽 짐바브웨 국경에는 잠베지강 이 흐르고 있다. 북부의 므웨루호, 방궤울루호 와 남부의 카푸에인조호, 카리바인조호 등 호수와 늪 외에도 중부에 루캉가 늪지대가 있으나 대부분은 지대가 높은 사바나지역이다. 남부의 작은 도시 리빙스턴 부근의 잠베지강에는 탐험가 D. 리빙스턴이 발견하여 이름을 붙인,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큰 빅토리아폭포가 있다.
중부자이르 국경 부근에는 코퍼벨트라 불리는 대동광지대(大銅鑛地帶)가 있다. 동·남부 철도를 따라 있는 적색·적갈색 롬층지대에는 백인들에 의해 상업성을 띤 대 농장이 발달되어 있으나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급자족용 농사를 짓고 있다.잠비아는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내륙국가이며, 이 나라의 대부분은 산림으로 뒤덮인 4,000피트의 고원에 자리잡고 있다. 구리 광업이 경제의 주를 이루며, 구리는 수출량의 80%에 달한다. 옥수수가 중요한 작물이긴 하지만, 비옥하지 못한 토양 때문에 농사는 어렵다. 잠비아의 역사는 잠비아 서부 바로 첼란드 의 지배적 부족 로지족(族)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알루이족)은 룬다족 기타의 종족들과 함께 11세대 전의 조상인 신(神) 니얀베에게 이끌려 북서쪽에서 이동해와서 카푸에강 유역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앙골라 동부에서 보츠와나 북부에 걸친 바로체 왕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1798년 포르투갈인(人)이 처음으로 이 지방을 횡단하였으며, 알루이족은 1838년 북상해 온 코롤로족 에게 정복당하였다. 50년 이 지방을 탐험한 D.리빙스턴은 이 지방을 바로첼란드라고 불렀다. 알루이족은 그 후 64년 코롤로족을 격파한 뒤 로지족이라 자칭하고 왕국을 마로지라고 칭하여 재흥(再興)하였다. 그 때 추장(국왕)인 레와니카는 S.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와 협정을 맺고 광업권 등을 주었다.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그 광대한 지배지역을 로즈에 연유하여 로디지아라 불렀으나 1911년 남 ·북 로디지아의 통치를 분리, 북로디지아는 53년에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그 후 남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지금의 말라위공화국) 등 사이에 연방화 (聯邦化) 움직임이 일어나 45년에 성립된 중앙 아프리카 심의회(審議會)를 거쳐 53년 8월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연방이 성립하였다. 남 ·북 로디지아는 통화를 비롯하여 철도 ·항공사업 ·카리바댐 건설 등 많은 공동사업으로 결합을 굳혀 갔으나 케네스 카운다가 지도하는 ‘잠비아 아프리카민족회의(ZANC)’는 남로디지아의 백인정권을 연방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59년 ZANC는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그 대신 ‘통일민족독립당(UNIP)’이 성립되어, 그 범(汎)아프리카적 저항운동을 계속한 결과 64년 말에 연방은 해체되고, 북로디지아는 65년 1월 내정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광업권을 북로디지아 정부에 이양하는 교섭을 거쳐 카운다 수상의 UNIP 정권은 64년 10월 24일에 국명을 잠비아공화국이라 하고 독립하였다. - 독립과 더불어 케네스 카운다가 국민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잠비아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전유권자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며 대통령중심제 내각을 조직하고 국방군의 총사령관이기도 하다. 입법부는 국민의회이다. 1968년 12월의 총선거에서 카운다가 이끄는 UNIP가 81석, ‘아프리카 인민회의(ANC)’가 23석, 무소속 1석이라는 의석배분이 이루어졌으나 72년 12월 제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UNIP 이외의 정당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ANC와 통일진보당(UPP)은 해산되고, UNIP의 일당제(一黨制) 국가가 되었다. 카운다 대통령은 73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3선되어 독재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정당을 해산 당한 반대파 사람들도 그 후 UNIP에 대하여 협력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ANC와 UPP의 전(前) 당원들은 카운다 대통령에 대하여 비판적 언동을 하고 있으며, 카운다 체제는 반드시 안정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잠비아는 내륙국이며, 흑인 여러 나라 및 백인정권인 로디지아(짐바브웨)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남부아프리카 문제에 관하여는 중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리 등의 수출은 로디지아를 경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고려하여 다른 인접국인 탄자니아 및 독립 후의 모잠비크와는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짐바브웨의 반(反)백인정권 게릴라, 나미비아의 ‘남서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등에게 일관된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73년에 짐바브웨와의 국경을 폐쇄하고 그 백인정권과 긴장상태에 있었으나 경제적인 이유에서 78년 철도에 한하여 국경을 재개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도 나미비아 문제로 대립관계에 있었으나 그해 잠비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철도 ·항만을 사용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잠비아는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하면서 친공적(親共的) 외교노선을 펴왔는데 70년 이후는 서방측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려 하고 있다. 탄자니아와 함께 중국의 원조를 아프리카에서는 제일 먼저 받아들였다. 1969년에는 기간 업인 동광업을 국유화하였으며, 동의 국제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한 1974년까지는 호황을 누렸으나 1973년 7월의 남로데시아와의 국경폐쇄와 함께 로데시아철도의 사용정지, 10월의 석유파동, 1975년의 동 가격의 폭락, 그리고 그해 8월의 앙골라내전에 의한 벵겔라철도의 운행중지 등의 이유로 인하여 수출의 80∼90% 이상을 동에 의존하던 잠비아 경제는 위험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83년이래 IMF, IBRD의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받아왔다. 1989년 동구권 변혁에 영향을 받아 아프리 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잠비아에서도 이러한 경제적 위기상황과 맞물려서 1990년 7월에 UNIP의 일당독재에 반대하는 야당, 복수정당제민주주의운동(복수정당제민주주의:MMD)이 탄생하여 복수정당제로의 이행을 요구하였다.1990년 9월에 헌법개정위원회를 설치하여 12월에 UNIP이외의 정당을 금지하는 헌법 제 4조를 폐지하였다.
그 결과 91년10월에 복수정당제를 기치로 대통령선거와 국민의회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MMD의 당수인 Chiluba가 대통령으로 당선(84% 지지)되었으며 국민의회 선거에서도 MMD(150석 중125석 차지)가 압승하였다. 그러나 1994년 6월에 잠비아의 군대가 Sir. Dawada Jawara정부를 전복시켰고 이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국제적인 압력 하에서 새 군부 의 지도자 Yaha Jammehs 는 많은 연기 이후인 1996년 9월과 1997년 1월에 선거를 했다. 1996년과 1997년에 있었던 선거로 새 군부의 지도자 Yahah Jemmeh가 정권을 잡고 있으나 구데타에 의한 정치라는 점과 첩보기관을 이용해서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외의 잠비아의 복지제도는 국민공제기금 많은 고용인에게 퇴직수당을 지급하며 많은 임의 기부단체가 정부를 도와 청소년 비행, 입양, 난민 관리와 노령자, 극빈자, 장애자 보호대책에 참여한다. 한편 급격한 도시화는 심한 주택문제를 야기했으며 사회개발부는 도시와 농촌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상 잠비아를 간단하게 나마 살펴보았다. 말리에 관한 레포트를 쓰면서도 느꼈지만 아프리카의 현재는 혼란과 좌절의 시대인 것만 같다. 정국이 불안정하고 경제사정의 악화와 인구의 급증에 의해 소득수준은 크게 떨어졌으며, 특히 도시지역의 실업자, 빈곤계층이 많아 치안은 매 년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시인은 아프리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레포트를 쓰면서 이제는 그 말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 국가들의 이해에 따라 아프리카는 피자를 자르듯이 조각이 나고, 그들이 써오던 말 대신에 유럽 말 을 써야만 했다. 그들의 막강한 힘 앞에서 아프리카는 무참히 굴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문화마저도 서서히 잊혀져 갔을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겪었던 모든 아픔을 딛고 새롭게 거듭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오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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