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분쟁지역]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은 아프리카 지역분쟁이며 자원이 있는 한 계속될 수 있다.
탈냉전시기에 아프리카는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으며 아프리카 국가의 군사개입이 발생하여 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생한 내전은 대표적인 사례로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대전(Africa's World War I)’이라고 부르고 있다. 2002년 앙골라, 나미비아, 짐바브웨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 측에서 싸웠고, 르완다와 우간다는 반군편에서 콩고민주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했다.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 군사를 파병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지역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잘 보여 준 사례였다. 냉전시기에는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했으나 탈냉전시기에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지역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이해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한 인종학살은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중부 아프리카지역에서 민족 집단의 대이동을 야기하였고 이는 곧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1959년부터 1963년 사이 르완다의 정치적 불안정은 투치족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이때 난민으로 르완다를 떠난 투치족들은 거의 30여 년 동안 르완다에 돌아가지 못했으나 르완다의 투치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롤랑 카빌라는 투치족의 지원을 받아 1997년 모부투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1980년대 우간다로 들어간 투치족은 무세베니(Yoweri Museveni)가 이끄는 국민저항군(National Resistance Army : NRA)에 합류하여 밀톤 오보테(Milton Obote)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후 무세베니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우간다 군에 합류했다. 이후 우간다의 지원을 받아 르완다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 : RPF)을 만들어 르완다를 침공하여 후투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1990년에 RPF는 르완다를 공격하였고 결국 1993년 8월 권력분점에 합의하여 아루샤 평화협정(Arusha Peace Agreement)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평화협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93년 10월 부룬디의 후투족 대통령 은다다예(Melchior Ndadaye)가 암살되면서 부룬디에서 투치족이 살해당했고 이어 후투족도 살해당했다. 이후 르완다 후투족 출신 대통령인 하비아리마나(Juvenal Habyarimana)와 부룬디의 후투족 출신 대통령인 은타리야미라(Cyprien Ntaryamira)가 탄 비행기가 1994년 4월 6일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공격으로 키갈리 공항에서 착륙 도중 격추되어 사망하면서 르완다의 후투족 과격파들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에 대한 살육을 시작했다. 1994년 4월부터 7월 사이에 약 100만 명이 살해되는 인종학살이 발생했다.
이후 RPF는 르완다에 진입하여 후투 과격파 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후투족 200만 명이 망명길에 올랐다. 역사적으로 과거 30년간 투치족이 이웃 국가로 피난하였으나 1994년 인종학살은 후투족을 난민으로 떠나게 하였다. 1994년 이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간 후투족은 르완다 RPF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정치조직화 하면서 르완다 뿐 아니라 콩고민주공화국의 지역적 불안정을 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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