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를렘(Haerlem)의 난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인도의 향신료를 가져오기 위한 노력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마침내 그가 즉석에서 희망봉(Cape of Good Hope)1)라 다시 이름 붙인 폭풍의 만(Cape of Storms) 주변을 돌아 인도의 서부 해안에 있는 캘리컷(Calicut) -현재 코지코테(Kozhikode)-에 다다른 때는 비로소 1497년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머나먼 인도에까지 이르는 항로는 개척되었지만 아프리카 주변 항해는 상존하는 위험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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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나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주앙(João)은 카부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ça ; 희망의 곶(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아프리카의 끝을 확인한 것이었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라틴어로 성탄절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몹바사(Mombasa)와 (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 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카브렐(Pedro Cabral)은 브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갈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2)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3)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4)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5)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의 내륙지방에는 반투(Bantu)어를 사용하는 줄루(Zulu)족, 코사(Xhosa)족 등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 희망봉에 대하여
동인도 회사를 위해서 먼 동부로의 무역은 극도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한 선박과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극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바타비아(Batavia)6)까지 가는 항해는 평균적으로 약 6달 정도 걸렸고 이 여행 중에 배에서 마시는 모든 물은 다 바닥났고 신선한 음식은 모두 떨어졌으며 소금에 절인 고기와 건빵, 비스킷 모두는 거의 먹을 수 없었다. 결국, 남부 대서양 연안에 도착한 선원들 대부분은 보충과 수리를 받아야 했고, 그 선원들은 종종 괴혈병7), 이질, 기생충을 포함한 질병에 의해서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중간 정거장이 남부 아프리카 해안 어느 곳에 세워졌고 그 곳에서 아픈 선원들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신선한 음식을 먹고 배를 수리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에 세워졌는지 의문이다. 한 가지 가능한 장소는 테이블 베이(Table Bay)8)인데, 이 곳은 조리스 밴 스필베르겐(Joris Van Spilbergen)이 1601년에 그 곳에서 잠깐 쉬면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 당시에 적어 놓은 기록은 위도 34도 4분에 놓여 있고 북부 희망봉의 약 15마일쯤 되는 ‘이 만’은 현 세대에 의해서 테이블 베이(Table Bay)라고 명명되었다. 높은 언덕 때문에 위쪽에는 마치 테이블(Table)처럼 편평한 사각형 모양이고9)바다쪽으로 9-10 마일 정도 거리이다. 또한 재정비하러 그 곳으로 오는 배는 보통 그것 아래쪽 길까지 온다. 이 만은 모든 배들이 정박하는데 매우 편리하였다. 왜냐하면 매우 안 좋은 날씨와 폭풍우 없이 4 패덤(fathom ; 1 패덤은 6피트 약1.83m)정도까지 육지에 가까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희망봉의 동쪽으로는 강어귀나 강가가 있는데, 그곳에서 잉어 같은 모양의 아주 맛있는 물고기를 잡았다. 10월, 11월, 12월에 이러한 계절에는 이 해변을 따라서 네덜란드에 북동풍처럼 매섭고 차가운 남풍이 불어온다.
‘희망봉은 지중해성 기후로 매우 다양한 문화와 집단을 형성하고 농작물을 생산하는 방식에서 유리한 조건이었다. 비록 산지가 많고 언덕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또한 매우 아름다운 계곡이 매력적이다. 사슴과 노루가 풀을 먹고 있고 그 수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언덕에서 흘러 내려오는 깨끗한 물을 아주 좋아한다. 소와 양 같은 동물들 또한 마찬가지로..... 희망봉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뮬라토(mulattoes) 같은 누런빛의 색을 띄고 있고 얼굴은 매우 못 생겼으며 키는 중간쯤 되고, 몸은 여위었고 날씬했으며 달리기를 매우 잘 하였다. 칠면조와 같이 혀를 차면서 매우 이상한 말을 하였다. 그들은 사슴이나 다른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꽤 격려가 되는 보고서임에도 불구하고 50년 이상동안 희망봉에 그 어떤 이주자들이 재정비 장소를 설립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장소가 우연이라도 선정되지도 못하였다.
2. 하를렘(Haerlem)이 좌초하다
동인도 선박인 하를렘(Haerlem)은 1646년 12월 22일에 쉬에담(Schiedam)회사가 있는 바타비아(Batavia)로 항해를 하였고 1647년 3월 22일 테이블 베이(Table Bay)에 처음 도착하였다. 그 배의 선원인 린데르트 잔스젠(Leendert janszen)의 일기에서, 3일 후에 재난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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