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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히르다르, 고잠

2013. 9. 14. 22:24


바히르다르, 고잠 - 한미진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여느 상식 퀴즈에서 흔히 나오는 이 질문은 흥미롭게도 2008년을 기점으로 다른 답을 갖는다.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라고 알려져 온 아프리카의 나일강보다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이 더 길다는 사실이 2008년 5월 리마 지리학회에서 확인된 것이다. 여기서 아마존 강에 대한 새로운 지리적 사실보다는, 역으로 왜 나일강이 그 동안 가장 긴 강이라고 간주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는 구불구불하고 지류가 많은 아마존 강에 비해 굵직한 물줄기로 아프리카의 북동부를 관통하는 나일강이 측량도 수월하고 더 길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일강이 이집트를 고대 문명의 시원으로 발전시켰고 이 문명을 아프리카 각지로 전파하는 교통로로 작용했으며,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에게 많은 자연·문화적 정보를 제공한 원천이 되고, 이후 이집트의 근대화 작업의 대상이 되어 미국·소련과의 외교 관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역사적 배경, 즉 이러한 나일강에 대한 인간의 ‘인지적 작용’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나일강이 수천 년 동안 인류 역사의 자연적 배경으로서 ‘거대한 강’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강의 원류는 어디일까? 수 천년동안 어디서 이 많은 양의 물이 공급되는 것일까? 일찍이 유럽의 탐험가들은 나일강을 따라 그 원류를 추적하고자 했다. 사실 ‘나일강’ 하면 이집트만 떠올리기 쉽지만 나일강은 이집트 외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우간다를 거쳐 흐르기 때문에 그 원류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 나일강의 두 지류 중 하나인 청나일강과 그 직접적 원류인 타나 호수가 위치하는 에티오피아의 바히르다르(Bahir Dar)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티오피아 북서부의 중심, 바히르다르

 

바히르다르는 에티오피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암하라 주의 주도이다. 에티오피아의 행정 구역은 아디스아바바와 디레나와의 2개 특별시, 그리고 인종 구성에 따라 나뉜 9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다. 암하라족은 전체 인구의 26%를 차지하며 에티오피아의 정치적, 경제적 삶에서 전통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들의 언어인 암하릭은 에티오피아에서 아랍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로, 토착어 중에서는 가장 우세하다. 언어와 권력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암하라족이 에티오피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이에 암하라족의 중심지인 바히르다르 역시 예부터 에티오피아의 주요도시 중 하나였다. 바히르다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 군의 표적이 된 바 있으며 1988년 에티오피아 내전 당시에는 혁명군의 거점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바히르다르의 자연유산에도 어렴풋이 녹아 있다. 바히르다르는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청나일폭포와 제주도의 두 배 크기인 타나호수가 인접해 있고 도시 구획이 아름다워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청나일강과 타나호수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장소 같지만, 사실 나일강 탐험 이야기와 그 주위의 수도원 이야기에는 인류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자연의 숭고함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을 횡단하는 나일강을 탐험함으로써 문화적 지배력을 높이려는 서양인들의 욕망, 자연의 기를 통해 종교적 신앙심을 견고히 하려는 수도승들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자연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나일강 탐험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다

 

큰 하천이 문명의 발전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강은 농경생활을 가능하게 해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예측과 대비를 통한 생존 능력을 증진시킨다. 나아가 인류의 관심을 생존보다 고차원적인 방면으로 확장시켜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다. 여기서 나일강은 추가적으로 지속적인 범람을 통해 풍요로운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고 측량과 기하학이 발전하는 계기를 만드는 한편, 범람이 신의 행위라는 종교적 관념을 파라오 1인 체제와 결부 지어 이집트를 강력한 정주문명 국가로 만들어내었다. 이에 나일강이 범람하는 이유와 그 원천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궁극적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3세기 경 이집트의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군원정단은 청나일강을 탐험하고 범람의 이유를 에티오피아 고원의 폭우 때문이라고 결론짓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나일강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15~16세기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진출 이후이다. 여기에는 대항해시대 특유의 개척정신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사회진화론1)적 시각에서 세계의 주인인 유럽인들이 자신보다 열등한 유색인종을 지배하기 위한 기반을 닦고자 하는 의도도 배제할 수 없다. 의도치 않은 결과라 할지라도, 지식과 권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아프리카 문명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일 강을 유럽인들이 탐사하고 그 온상을 밝혀냈다는 것은 이미 오리엔탈리즘2)이 반영된 결과이다. 나일강 탐험의 역사를 세계관과 인류를 변화시킨 위대한 도전정신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의해 미개한 지역을 개척하고 지배의 기반을 증축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움직임으로 볼 것인지는 분명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든, 나일강이 유럽인들의 탐사로 인해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게 된 것은 사실이다.  1613년 프란시스코 알바레스와 페드로 파에스가 더 짧고 단순한 청나일강을 탐험했고, 1770년 제임스 브루스가 타나호수까지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청나일강은 청나일은 고대부터 이집트에서는 촐로에 팔루스, 그리스에서는 프세보에라고 불렸고, 현재는 아랍어로 바르알아즈라크, 혹은 아바이강이라고 한다.

 

청나일강은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많은 양의 유기물을 실어 와 이집트 하류에 비옥한 점토층을 만들어 주어 농업발달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이집트 고대문명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청나일강을 창세기(2:10-14)에 나오는 네 개의 낙원 강 가운데 하나인 ‘기혼 강’과 동일시하고 있다. 청나일강은 에티오피아의 타나호수에서 흘러나와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백나일강과 합류하게 된다. 백나일강의 물이 회백색인 데 비하여 이 강물은 맑은 청색이기 때문에 청나일강이라고 한다. 청나일강은 타나호 근처에서 수력발전에 이용되고 있다. 사실 습지와 사막지대를 지나 대부분 증발되는 백나일강과 달리 유량이 풍부한 청나일강은 나일강을 둘러싼 아프리카 수자원 분쟁의 핵심이다.

 

 

 

 

그림 1 나일강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타나 호에서 동남쪽으로 30여km를 흐르던 청나일강이 마을 근처 높은 낭떠러지에서 계곡으로 엄청난 수량의 강물을 쏟아 내리는 지점이 바로 청나일폭포이다. 청나일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10위 중 하나로 손꼽히며, 에티오피아 최고의 관광명소이다. 현지에서는 ‘연기나는 물’을 뜻하는 티스 아바이(Tis Abay)라고 불린다. 우기인 7월부터 8월 동안에는 타나 호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수량이 4백 미터의 폭을 가진 이 청나일폭포에서 45미터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데, 1km의 거리에서도 폭포가 일으키는 물보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청나일강의 수원을 이루는 타나호수는 평방 3,600km의 넓이를 가진 에티오피아 최고 호수로 그 저수량이 엄청나다. 2006년 여름 에티오피아에서 626명이 사망했던 대홍수 시기 타나호수 근처에서 이재민이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었다. 타나호수가 해발 2000미터 첩첩산중의 고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저수량을 가늠해보기 쉽지 않다.

 

호상에는 37개의 섬이 위치하는데 파피루스 배를 타고 이 섬과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 교회와 수도원을 투어한다. 현지인들이 탕크와(tankwa)라 부르는 이 배는 갈대 줄기를 엮어 만든 것으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애용해 왔고 여전히 공예품과 땔감, 심지어 황소까지 실어 나르는 중요한 해상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맑고 검푸른 타나 호수 위 약 20개의 섬에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주요한 교회와 수도원들이 있다. 엔토스 이야수 수도원은 화려한 벽화와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파티샤’라는 기도하는 동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곳 중 하나로 유명한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은 여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옛 에티오피아 왕들의 왕관과 의복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금은보화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만의 종교적 해석을 담고 있는 오래된 성경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수도원도 있다.

 

 

사실 고립된 섬의 숲속에 수도원이 생긴 이유는 슬픈 순교의 역사에 있다. 17세기 에티오피아 왕조는 남쪽 오로모족의 정치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민들에게 가톨릭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회 수도자들(the Jesuits)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예수회 수도자들은 강력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에티오피아 정교회 수도자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 수도원으로 와 3만 2000명의 순교자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바히르다르에 오는 길에 있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 역시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를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던 1930년대 후반, 반(反) 이탈리아 저항운동의 본거지였던 이 수도원은 무솔리니의 측근이었던 그라치아니 총독의 암살미수 사건 이후 유례없는 학살을 당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이 수도원들은 세계사의 변두리로 더욱 내몰리게 된 약소국 에티오피아의 설움을 보여주는 심리적 유산이 되었다.

 


다시 나일 강 탐험 이야기로 돌아와, 청나일강에 비해 훨씬 알려진 바가 없었던 백나일강의 탐사 기록을 살펴보자. 사실 19세기 유럽인들의 나일강 탐사의 핵심은 ‘검은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백나일강에 있었기 때문에, 백나일강 탐험은 유럽인의 미지의 세계 개척에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에 의한 본격적인 탐사는 1830년 이집트 탐험대가 그 때까지 백나일강의 상류라고 여겨져 왔던 나이저 강이 별개의 큰 강임을 확인한 이후 이루어졌다.

 

빅토리아 호수가 유럽인들에 의해 처음 발견된 것은 1858년 영국인 스피크와 버튼이 이를 나일 강의 수원이라고 추정, 탐사에 성공했을 때이다. 스피크는 이 광활한 호수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나, 버튼과의 협의 없이 성급히 발표하는 바람에 당장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1870년대 영국의 군인 C.G.고든과 그 부하들이 나일강의 지도를 작성하고, 이어서 M.스탠리가 빅토리아 호수를 주항한 이후 스피크의 발견은 인정받게 되었다. 스탠리가 백나일강의 원류지대를 상세히 밝힌 것이 계기가 되어 런던의 왕립지리학협회가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일 강은 이집트, 에티오피아, 수단, 우간다 등을 모두 관통하는 세계 제 2의 강이다. 특히 나일 강의 탐사 기록에 있어서 유럽인들과 에티오피아인, 수단인들과의 접촉은 하나의 세계사를 간직하고 있는 부분이다. 쉽게 가치판단을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유럽인들의 나일강 탐사의 역사는 근대 이후 현대까지 아프리카의 세계 속 위치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탐험’의 사전적 의미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고 조사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발달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당대 유럽이 베일에 가려져있던 나일강의 수원, 온상을 밝혀낸 것은 분명 탐험의 역사이다. 하지만 나일강 탐험이 다른 아프리카 내륙 지역으로 유럽인을 끌어들이고 결국 그 지역 사람들을 지배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는 ‘탐험’이라기보다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모르는 세계를 ‘발견’했다는 의미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큰 호수의 이름이 왜 아프리카 지역의 토착 고유명사가 아니라 ‘빅토리아 호수’이고 지금까지 이렇게 불리어오고 있는지, 나일강 탐험의 역사를 보면 씁쓸한 기분이 든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 속에서 인류의 무수한 역사적 흔적을 느끼고 간다.

 

 

* 참고자료

 

 1. 인터넷 자료 및 블로그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100.nhn?docid=34258)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Nile)

  길에대한애정, 「에티오피아 북부 여행의 시작 Bahir Dar」(http://caminodesol.blog.me/ 150101738343)

  예담,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 탐험의 역사」(http://yedamco.blog.me/87936315)

  환상다반사, 「타나호수 수도원 탐사」(http://blog.naver.com/softgore?Redirect=Log& logNo=10114896884)

 

 2. 뉴스

  강덕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의 학살 사건」, 크리스천투데이, 2009. 11. 11.

  강덕치, 「청나일 강의 수원 타나 호를 찾아」, 크리스천투데이,  2009. 11. 18.

  김성호, 「“여성 출입 금지”, 도대체 어떤 수도원이기에?」, 오마이뉴스, 2007.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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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펜서(H. Spencer)가 사회발전을 설명하는 데 있어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른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대입시켜 만들어낸 개념이다. 사회도 생물계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동질적인 것에서 복잡하고 이질적인 것으로 발전해 간다며, 단선적이고 낙관적인 사회의 발전을 상정하였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긍정하고 역사의 발전을 인정하는 한편, ‘문명사회’인 서양이 ‘야만사회’인 동양을 지배해야 마땅하다며 제국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2) 일반적으로는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적인 정서(동방세계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고 정의하고, ‘동양이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 중심적 편견과 제국주의적 음모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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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2013. 9. 14. 22:18


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이세정

 

 

이집트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 자체였던……

나일 강의 범람에서부터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까지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인간생활과 자연의 일체는 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집트 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이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생활 전반에 녹아 내린 것으로 그들에게는 삶이요, 그리고 곧 죽음이었다. 이집트 종교에는 여러 가지 성격이 겹친 복합 신들이 많이 등장하고 이집트인의 종교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로 많은 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나라가 기본적으로 조그만 농업사회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신들이 오랜 세월 속에서 통합되며 여러 신화가 만들어졌고 강한 세력이 주변을 통합하면서 신들도 정리되었다. 크게 보아 헤르모폴리스, 멤피스, 그리고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 중에서 현재 카이로 동남쪽 교외 지역인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아툼(혹은 라)이 슈(공기의 남신)와 테프누트(이슬의 여신)를 창조했고, 이 둘이 결합하여 게브(대지의 남신)와 누트(하늘의 여신)를 낳는다. 그 후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남신 오시리스와 세트, 여신 이시스와 네프티스가 나오는데 이들 남매가 각각 짝을 지어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가 부부가 된다. 이 아홉 신이 9주신으로 사람들에게 숭배되었다. 이 가운데 오시리스신은 이집트를 통치하며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존경을 받았지만, 이를 시기한 동생 세트의 모함에 빠져 죽게 된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관을 찾아내어 남편을 살려냈지만, 이를 안 세트가 오시리스를 14토막으로 잘라 이집트 방방곡곡에 버렸다. 이시스는 다시 조각들을 찾아서 결합시켰지만, 물고기에 먹혀 버린 남근만은 찾지 못했다. 이시스는 나일강의 진흙으로 그 부분을 보충한 후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살려내었고, 그와 결합해 아들 호루스를 낳게 된다. 호루스는 성장하여 작은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한다. 그렇게 해서 호루스는 현세의 왕으로, 오시리스는 내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호루스의 부인인 하토르는 사랑의 여신으로서 그리스인들은 하토르 여신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동일시했다.

 

 

오 나의 태양이시여 – 호루스와 에드푸의 신전

 

이른 아침 우리는 에드푸에 정박했다. 크루즈에서 내려 처음 바라 본 에드푸의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의 지방 소도시를 보듯 평범하고 고요하다. 거대한 건축물들과 길거리에 널려있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유적들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작고 조용하지만 작은 언덕 위에 나일 강을 바라보는 에드푸에서 여유와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드푸라고도 하는 이 도시는 룩소르 남쪽 110km 지점 나일 강의 서쪽지역 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지금은 작은 지방도시이지만 과거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아폴로노스폴리스메갈레 (Apollonospolis megale)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의 행정수도가 위치했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지금은 설탕과 도자기의 도시이며 사람들의 인심이 좋고 굉장히 친절하다. 크루즈 선에서 내려 선착장에 줄지어 서있는 마차를 타고 달리는데 뜨거운 햇살 속이지만 바람은 청량해 기분이 상쾌하다. 앞에 마차 위에 매달려 가는 아이는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얼굴은 천진난만이다. 번잡하지만 알록달록한 색들로 가득 찬 시내를 지나니 드디어 호루스 신전의 입구이다.

 


(꼭지)

호루스 (Horus, Hr, Hru, Ώρος, Hōros)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서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아들이다. 고분 벽화에서는 호루스가 매의 머리를 쓰고 있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다. 호루스는 이집트의 신들 중에서 다양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보통 매의 머리를 한 남성으로 표현되나, 호루미오스라고 불릴때에는 사자의 외관을 취하며, 하르마키스라고 불릴때에는 스핑크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한 후대에는 유아신(幼児神)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의 위협을 피하며, 토트의 도움을 빌려 호루스를 몰래 출산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인 이시스의 무릎 위에 놓인 아기(하포크라테스)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병사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성 게오르기우스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호루스는 대기와 불을 상징하며, 그 색은 일반적으로 흑, 적, 백을 의미한다. 부친 오시리스의 복수를 완료한 호루스는 현세의 통치자가 된다. 따라서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역대의 왕들도 그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다. 호루스는 태양신 라와 결합하여 라-호라크티를 시작으로, 여러 신들과 융합하여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집트를 상징하는 모양으로서 유명한 우제트의 눈이란 바로 호루스의 눈을 뜻하기도 한다. 이집트 항공의 항공기의 수직꼬리에는, 비행의 안전을 바라는 의미로 호루스의 심볼이 그려져 있다.

 

 

 

 


 

이 신전은 BC 237년 프톨레미 3세때에 공사가 시작된 이후 180여년 동안 여러명의 파라오들에 의하여 공사가 계속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집트 관광청이 펴낸 관광안내 팸플릿에는 이 신전은 2004년초에 보수공사와 관광객 편의시설을 갖추고 2.300년만에 다시 오픈한 것이라고 써있다.  에드푸 신전은 이집트에 남아있는 신전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푸 사원에도 탑문이 있고 열주(列柱)가 있고 그 중심축에 본실을 두었으며 많은 조상(彫像)과 부조로 장식한 점은 신왕국시대의 다른 신전들과 마찬가지이지만 이 시대 특유의 주두(柱頭)를 가진 둥근기둥들이 채용된 것이 이채롭다.

 

그리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에드푸 신전은 전적으로 호루스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그래서 신전 곳곳에 호루스 신의 조각상이 서 있다. 입구 양쪽에도 있고 제1열주실의 전면에도 두 개의 호루스 신의 석상이 서 있다. 매는 호루스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이집트인들은 하토르 여신이 새해 첫날에 남편이 있는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으로 외출한다고 믿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호루스 신은 태생이 두 가지였다.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은 호루스신을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난 아들로 여겼지만, 멤피스 신화에서는 오시리스와 형제였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신을 ‘연하의 호루스’, 오시리스와 형제인 호루스신을 ‘연상의 호루스’라고 불렀다.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은 연상의 호루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연하의 호루스를 나타내는 상징들도 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전 앞에 세워진 독수리 모습의 신인데, 이것은 숙부인 세트에게 복수한 연하의 호루스 신을 의미한다.

 

 

호루스 신전은 전형적인 이집트 신전의 형태를 갖춘 곳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단일 신전으로서 신전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갖추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의 신전에 가까운 신전이다. 신전 입구에서는 멀리 거대한 탑문이 보이며 그 옆 언덕에는 마을이 보인다. 발굴되기 전 호루스 신전은 흙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는 아직 흙으로 덮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신전 부속 건물들로 발굴 후에는 이 호루스 신전이 더욱 거대한 위엄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신전의 탑문은 이집트의 많은 신전들 중에서 탑문의 원형이 가장 깨끗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탑문의 벽화는 후대의 신전의 특징인 신화적인 내용이 담겨있으며, 이 신전의 주인인 호루스 신과 파라오를 묘사한 벽화로 한 많은 곳에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신전 입구에는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신의 석상이 감시자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있는 모습이 수 천년의 역사를 무색하게 할 정도이다. 탑문을 들어서면 삼면이 원기둥 회랑으로 된 큰 안뜰을 만나게 되는데 원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원기둥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많은 건물들이 기둥들로 둘러싸인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프로레마이오스 왕조시대 신전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큰 안뜰을 지나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위압적인 모습의 호루스신의 석상이 서있고 양쪽으로 ‘아침의 집’과 ‘책들의 집’이 있다. 탄생의 빛을 향한 첫 경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침이고 책들의 집에서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파피루스로 만든 책은 없지만 이곳에서 저술들의 제목을 알리는 상형문자가 원기둥에 적혀 있다고 한다. 신전에 들어가게 되면 정면으로 하늘로 가는 나룻배가 보관된 방인 ‘성자 중의 성자’ 를 볼 수 있고 그 주위로 여러 방들과 신비의 복도를 볼 수 있다. ‘성자 중의 성자’에는 성스러운 배가 중앙에 있는데, 이집트는 나일강의 혜택을 사는 나라답게 나일강을 오가는 배를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벽화 또한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호루스 신의 탄생에서부터 그가 어둠의 힘들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에 이르기 까지 호루스 신화의 일화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저마다 고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방들이 이 ‘성자중의 성자’를 둘러싸고 있다.

 

 

수 천년의 세월 동안 나일 강을 바라보며 – 코옴보 신전

 

점심 식사 후 나일 강의 정취를 만끽하다 보니 어느 새 배는 나일 강의 서쪽 강안에 이르렀다. 코 옴보에 도착한 것이다. 꽤 큰 도시로 알려져있지만 그 풍경은 시골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 지역은 나일강 주변에서 농경지가 아주 많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코옴보 신전은 나일 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코옴보 신전에 올라 나일 강가를 바라보니 햇살에 비치는 강물의 반짝임과 마을의 풍경이 어우러져 신전의 모습과도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이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투트모트3세 때 건설되었는데 천년이 지난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인 BC332~395년에 완전히 새롭게 개축된 것이다.

 

코옴보 신전은 지진과 나일 강의 홍수에 의한 피해로 많이 망가졌었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이후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우상숭배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로는 기독교도(콥트 교도)들에 의한 파괴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우상숭배 금지령 이후 이 신전은 폐쇄되어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다. 1893년에 발굴이 시작되어 신전의 지붕을 덮고 있던 모래를 걷어내면서 신전의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오늘 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세베크(Sebek), 또는 소베크(Sobek)는 악어가 신격화된 이집트 신으로, 나일 강에 의존하던 이집트에서 악어를 매우 두려워하던 것에서 기인하였다. 나일 강에서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이집트인들은 악어의 신 세베크에게 기도하여, 악어에게 공격 받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소망하였다. 세베크는 악어, 또는 악어의 머리를 한 남자로 묘사되었으며, 강력한 공포의 신이었다. 일부 이집트 창조 신화에서는 세베크가 세상을 창조하는 혼돈의 물에서 처음으로 나왔다고 묘사한다. 때때로 창조신의 모습으로 태양신 레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스 계통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콤 옴보 신전에 이 지역 토착신인 소베크 신과 함께 호루스의 변신인 하로에리스 신을 모시고 경배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장군에 의해 건국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급은 이집트인들과 융화하는 정책을 펴서 자신들이 이집트에 완전히 동화하였음을 나타내려고 하였는데 세트를 처치하고 스스로 파라오가 된 호루스 신을 자신들의 신으로 경배함으로써 자신들이 파라오가 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코 옴보 신전에 하로에리스 신과 소베크 신을 함께 모시게 된 것은 틀림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 신전을 크게 개축한 이후일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콤 옴보 신전은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의 두 신에게 바쳐진 이중적인 성격의 신전이다. 소베크 신은 이집트의 토착 신으로서의 의미가 강하고 하로에리스로 변신한 호루스 신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의미가 있는 신이라고 볼 때에 두 신간에 어느 신이 우월하거나 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코 옴보 신전은 철저하게 대칭구조를 유지하고 양쪽에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을 대등하게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둥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의 기둥모양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흔히 그레코로만 왕조라고 하는데 이 기둥들에서는 코 옴보사원을 증축하고 개축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들의 건축에도 그리스 양식을 많이 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악어가 많아 악어의 머리를 가진 신 소벡(Sobek)과 매의 머리를 가진 신 호루스(Horus)를 같이 모셨다는 이 신전은 BC 2세기경의 벽화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여러 번의 홍수로 많이 깎이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 닳음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해 난 이곳이 좀 더 살갑게 느껴졌다. 한산한 관광객들도 그러하고. 소박하다고 해야 하나. 나일 강가의 고지대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위치한 장엄한 프톨레미 신전은 해질녘에 특히 경외심을 자아낸다. 훌륭한 의사였던 하로에리스 신과 악어의 신 소벡을 합배한 이 신전은 이중으로 된 입구, 홀, 지성소 등으로 유명하다. 부조가 새겨진 벽에는 고대의 수술 기구, 골 절단기 및 치과용 도구 등이 묘사되어 있다. 근처에서 발견된 세 마리의 악어 미라는 현재 하토르 예배당에서 보관 중이다.

 

나일강의 멀리서부터 거대한 탑문과 원기둥들이 보이는데 마치 나일강 뱃길을 감시하는 망루를 보는 듯하다. 탑문은 세베크를 위한 입구 하나와 호루스를 위한 입구 하나가 있는 거대한 문을 구성하고 있다. 호루스 신전의 탑문과 벽화들은 오랜 시간 흙에 묻혀 있었으며 그 훼손 정도가 다른 신전들에 비해 심하다. 신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큰 우물이다.

 

이 우물은 악어로 상징되는 세베크 신이 들어오는 통로로 성장의 물이 나타나 에너지의 바다에서 직접 유입되는 세례용 액체를 제공했다고 한다. 코옴보 신전의 본 건물에 들어오면 바로 원기둥이 늘어선 홀이 보인다. 이 홀에는 정면에 문이 두개있고 호루스 앞에서 파라오가 호루스와 토트로부터 이중세례를 받는 것이 특징이다. 원기둥의 상태나 양식을 보면 그리스 건축풍이 많이 가미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열주실의 원기둥들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편이다. 그리고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벽화가 곳곳에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인 그리고 이집트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던 여걸. 그러나 그러한 고정된 몇몇 이미지들과 달리, 실제로 그녀는 대부분의 이집트 파라오들이 마케도니아 지방에 뿌리를 두고 그리스계로 그리스어만 했던 전통을 벗어나 직접 이집트어를 배우고 실생활에서 이집트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첫 번째 파라오로 기억되고 있다. 프 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도 흐려지는 벽화처럼 조금씩 역사 속으로 침식되는 듯해 난 또 다른 이집트의 여걸 핫셉수트와 함께 세월의 무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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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2013. 9. 14. 21:47

 

아스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부터 나일강의 상류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집트의 남쪽 끝 도시, 아스완이 보인다. 이집트의 큰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스완도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나일강의 동쪽 강가에 큰 도시가 들어서 있고, 서쪽해안으로는 사막이 보인다. 나일강이 얼마나 넓은지 그 위에 몇 개의 큼지막한 섬들이 있다. 섬들에는 문화유적은 물론이고, 수목원, 박물관, 독특한 누비아인 마을까지 볼거리도 각양각색이다. 나일강 위에는 낮잠을 즐기는 듯 물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전통배 펠루카들이 둥둥 떠다닌다. 수도와 먼 이집트의 끝부분이어서인지, 아스완은 북적북적대던 관광객들이 많이 줄어들어 한가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수도와 멀고 한적해 보이는 이 도시는 얼핏 변두리 같다는 느낌을 주지만 사실 그렇게 밋밋한 도시는 아니다. 아스완은 그 역사가 이집트 고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도시이다. 이집트의 국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고왕국 시절부터 군사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아스완은 남쪽의 이웃나라 누비아1)와 바로 인접하여 때로는 지배하고, 때로는 지배당하기도 하며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쪽 나라에서 온 상인들에게 아스완은 이집트로 들어가는 입구도시였다. 그래서 아스완에는 예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각종 물품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 발달했다. 아스완에서 상업이 얼마나 발달했었는지는 그 이름에 확실히 나타난다. 과거에 이집트에서는 아스완을 고대 이집트어로 ‘무역’이라는 의미의 스웨넷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아랍어로 ‘시장’을 뜻하는 아수안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아스완이라고 불린다. 또한 아스완은 좋은 돌이 많이 났기 때문에 이집트의 거대 피라미드와 다양한 조각품들에 쓰이는 화강암을 공급하는 주요 도시이기도 했다.

 

아스완의 도심은 지금 대부분 나일강 동쪽 변에 위치하지만, 옛날 아스완에서 가장 발달했던 곳은 강변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옛날 아스완의 중심지는 나일강 위 가장 큰 섬인 엘레판티네섬이었다고 한다. 이 섬은 고대도시 ‘아부‘가 있었던 곳인데, 아부는 고대 이집트어로 코끼리와 상아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섬 이름이 상아라니! 섬에서 상아시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마치 제주도를 ’감귤‘이나 ’한라봉‘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집트의 끝이면서 입구이기도 했던 아스완에 있던 섬 도시 아부. 그 역사는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 나르메르가 지중해에서부터 아스완까지 아우르는 통일 이집트를 건설했던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기원후 300년까지 약 3300년의 긴 세월동안 아부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아부에서는 나일강이 범람할 때 밀려오는 물의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아부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인 크눔을 숭배하는 종교의 중심지였다.

 

크눔신은 초기 이집트 신들 중에 하나로,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신이다. 처음에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이었으나 나중에는 생명을 창조하는 신으로 섬겨졌는데, 그 이유는 나일강의 물이 매년 범람하여 주위의 땅에 비옥한 흙을 실어다 주고, 건조한 땅을 적셔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신화에 따르면 크눔은 물레에서 진흙으로 아이들의 몸을 빚어 어머니의 자궁에 넣어놓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이들을 점지해주시는 삼신할머니와 비슷한 일을 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부의 여인들도 크눔신에게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까. 크눔신을 믿는 종교의 세력은 아부의 역사와 함께하며 성장했고, 아직도 엘레판티네 섬에는 크눔신의 신전과 크눔신으로 여겨졌던 신성한 양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집트가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이집트에도 전파되면서, 고대 이집트 신들은 점점 버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크눔신을 섬기던 도시 아부도 쇠퇴하여 아스완의 중심은 동쪽 강변으로 옮겨가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엘레판티네 섬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만큼 볼거리도 많다. 옛날 아부의 원형을 간직한 유적들과 멋진 아스완 박물관, 다채로운 누비안 마을은 아스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들이다. 먼저, 아스완 박물관은 엘레판티네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해있다.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가니 방 하나에 따로 전시되어 있는 양의 미라와 돌로 만든 관이 보인다. 이 양은 앞서 말한 크눔신과 관련된 신성한 양이라고 한다. 박물관의 중심부로 가면 아스완과 누비아 지역에서 발굴된 골동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옛날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소품, 무기, 그릇, 수저 같은 물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물들은 유리진열장 안에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설명까지 친절하게 되어있다.(비록 영어이지만.) 이제 박물관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슬쩍 빠져나와 뒤에 있는 정원으로 향하기로 한다. 신기하게도 정원은 고대 아부 유적들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20세기 초에 tm위스와 독일에서 아부 유적들을 발굴하기위해 팀을 파견했고, 발굴팀은 기원전 3000년에서부터 기원후 14세기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건물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아스완의 도시 중심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스완 댐이 있다. 이 댐은 외관이 썩 멋지지 않아 댐 애호가들에게서도 별로 사랑받지는 못하지만, 나일강을 통제하고 싶다는 이집트인들의 강한 바람이 담긴 의미심장한 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주변의 농경지에 농사를 지어 살아왔는데,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댐이 지어지기 전에 이집트인들은 매년 나일강의 범람에 의지하여 농사를 지어왔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은 일정치 않아서 범람이 잘 된 해는 풍작이었지만 반대로 범람이 적었던 해는 손 쓸 도리없이 흉작이었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어 세월이 지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지의 부족현상이 심해졌다. 건축기술이 발전하여 댐을 지을 수 있게 되자 이집트는 대규모의 댐건설에 착수했다. 1898년에 영국의 건축가 윌콕스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1902년에 완성된 것이 아스완 로우 댐이다. 그 후 한 차례의 증설 공사에도 불구하고 아스완 로우댐이 꽉 차자, 이집트에서는 7km 상류에 댐을 하나 더 짓기로 한다.

 

이리하여 지어진 것이 아스완 하이 댐이다. 기존의 로우댐과는 비교도 안되는 대규모의 공사였기 때문에 이집트는 자금조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처음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기로 했지만, 소련에게 무기를 조달받은 것을 계기로 지원이 끊긴다. 결국 이집트는 소련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하이댐 공사에 착수했고, 10여년의 공사 끝에 1970년 아스완 하이댐이 완공된다.  아스완 댐이 지어진 후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호수가 생겼는데, 이 호수의 이름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호가 되었다.

 


아스완 댐의 건설 후 나일강을 상당부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농업용수 공급과 농경지 확장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수력발전도 가능케 하여 주변 도시의 전기공급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댐 건설 후에는 나일강에서 자연적으로 공급되던 풍부한 미네랄이 댐안에 쌓여있을 뿐 밖으로 나가지 않아 비옥하던 농경지가 점점 불모지로 변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또 바다에서는 어획량이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나세르호에 의해 원래 그 지역에 있던 문화 유적들은 이제 영영 가라앉아 버렸다.

 

아스완 댐의 건설로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침수지역에 살고 있던 누비안인이었다. 그들의 마을이 호수 속에 잠겨버리자 그들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아스완, 콤옴보 등지에 새로 마을을 지었다. 앞서 말한 엘레파티네 섬에 있는 누비안 마을도 그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침수지역에 있던 문화유적들 중 아부심벨 같은 중요한 유적들은 유네스코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구해낼 수 있었던 다른 유물들은 아스완의 누비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아스완에서 누비안 마을을 구경하고, 누비안 인들이 만든 기념품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아스완 댐 건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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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비아(Nubia)는 이집트 남부의 나일강 유역과 수단 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누비아 지역 대부분은 수단 영토에 있으며, 1/4 정도만 이집트에 속한다. 고대에 누비아는 독립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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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집트 고왕국(Old Kingdom)

2008. 7. 28. 11:26

   신석기 혁명이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이용하여 농작물을 비옥하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집트인을 통하여 아프리카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삶의 안정적인 방법은 강 유역을 따라 점차적으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100년 경, 이전에 적(Red)과 백(White)으로 나누어진 나일 강 위쪽(Upper ; 남쪽)과 아래쪽(Lower ; 북쪽)의 왕국은 메네스(Menes) 왕에 의해 통일되어 파라오 왕조(Pharaonic dynasties)가 시작되었다. 안정적인 중앙집권화된 통치 하에서, 이집트 문화는 발전하면서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이집트 과학, 농업 그리고 상형문자는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그리고 남쪽 특히 누비아(Nubia) 등지의 주변국에 영향을 미쳤다.

파라오의 초기 4대 왕조는 고대왕국으로 명명되어지고, 쿠푸(Khufu), 카프레(Khafre), 그리고 멘카루(Menkaure)는 사콰라(Saqqara)에 계단형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초기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로 신에 대한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파라오의 믿음의 상징이며 지상의 신성한 왕권의 상징으로 건설되었다.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s)는 쿠푸(Khnum-Khuf. 줄여서 Khufu라고 함, 그리스어로 Cheops ;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 제 4왕조의 왕 ; 2613?-2494? B.C.)대왕이 건설했다. 높이는 146.59미터에 이르며, 한 개당 2.5톤에 이르는 돌덩이 230만개로 만들어졌다.

농업에 기반을 둔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과 무역을 했다. 수단의 남쪽 경계, 리비아와 서부아시아까지 교역로를 확보하고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이집트는 자주 출병하였다. 당시 이집트의 뛰어난 통치자였던 하쿠프(Harkuf)는 기원전 2,300년경 콩코 분지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원정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과 접촉하게 했고, 누비아까지 국경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외부와의 접촉으로 이집트는 다양한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아스완 댐 근처의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견은 파라오 왕권이 남쪽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페피 1세(Pepi I)하의 제 6 왕조는 왕권이 약화된 시기였다. 이집트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왕자들과 지방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반란의 위협은 국가의 몰락을 가져와 2 세기 동안 이집트는 몰락을 겪었다. 이러한 일은 잉여농산물에 의해 국가가 유지되고 있던 이집트의 쇠퇴를 가속화했고, 결국 중앙 권력의 와해로 왕조가 멸망한다.

Mansa Musa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기자(Giza), 나일강, 이집트, 쿠푸, 파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