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당시 왜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정이 달랐을까?

2018. 4. 13. 15:52


독립의 과정은 식민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유럽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다른 독립의 과정을 겪었다. 즉 백인 이주민들의 이익에 따라 독립의 방식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지도> 식민지배국가와 아프리카의 독립년도



식민지 해방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가 독립을 내주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해방시킨 과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경우는 서로 달랐다. 어떤 경우, 식민지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그 지배자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벨기에건, 포르투갈이건, 비슷한 모형을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알제리,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케냐, 나미비아, 자이레, 짐바브웨 등의 독립운동은 코트디부아르, 어퍼볼타(부르키나파소), 탄자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지역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커다란 충격을 동반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 이주민의 이익이 민족투쟁의 성질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주민의 이익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조직 능력 역시 중요한 변수로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식민 열강에 의해 지배를 받았냐는 사실보다는 그 식민지에 유럽인 이주민이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식민 해방의 유형과 방법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주민이 없는 곳에서는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치를 허용하는 데 수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주민이 있는 경우에는 식민 해방의 과정에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 간의 폭력적 갈등의 기간이 거의 특징적으로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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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왜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하였는가?

2018. 4. 6. 10:07


아프리카 식민지화의 핵심적 원인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럽 각국은 민족주의적 경쟁과 힘의 균형, 그리고 국가주의적 시각에 따라 더욱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경쟁하였다. 또한 제국주의적 시각에 따라 새로운 시장과 자원의 공급지로서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욕구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것이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선교사들이나 해안가에 거점을 두고 이루어지는 소규모 무역상들에게 방치된 상태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유럽 국가들의 경쟁은 1870년대에 들어와 점점 치열해졌다.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과 그리고 독일에서는 개인과 집단들이 경쟁하고 있었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조직한 국제아프리카회의(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같은 단체에 의해서도 경쟁이 유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비공식적인 무역 제국이 공식적인 식민제국으로 전환하는 것을 옹호하게 만들었다. ‘분할또는 쟁탈(scramble)’이라는 유럽인들의 표현에 맞는 거의 공황에 가까운 경쟁상태가 일어나게 되었고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쟁탈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식민지배는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문화는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일부 경우에 있어, 이러한 전통은 아프리카인들의 후진성과 미개함, 그리고 야만성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지배 방법이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체제, 즉 기술적으로 진보한 소수의 외국인이 다수의 원주민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강제로 지배한 체제였다. 식민주의자는 식민 지배를 하는 자신들은 우등한 쪽이고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프리카인들은 열등하다는 이론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아프리카의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배경의 대부분은 다윈(Darwin), 스펜서(Spencer), 모건(Morgan),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역사발전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유럽인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이 낮은 수준의 문명을 점령하여 세계의 곳곳에 번영과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옳은 일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백인의 십자가라는 문구로 표현되거나 프랑스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명의 의무라고 표현되는 이러한 주장들은 백인종의 생물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차별적 이론을 더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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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독일의 아프리카 지배

2011. 1. 20. 11:30

1. 독일의 아프리카 지배

 1895년에 아프리카에 영향을 주었던 독일의 식민지배는 4군데의 주요 지역에 집중되었다: 토고랜드(Togoland), 카메룬, 독일령 동 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 그리고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German South West Africa).

 
1.1.1. 1. 독일령 카메룬(German Cameroons)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고자 노력했던 영국 선교사들은 19세기 초반에 현재의 서부 카메룬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858년에 영국인들은 유럽인들의 최초의 영구적인 정착지인 빅토리아(Victoria)를 이 지역에 건설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분할(scramble for Africa)”시기에 영국이 아닌 독일이 이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독일은 1884년 7월 12일에 이 지역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했고 내륙지역으로 통치지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때 얻게 된 새로운 영토를 카메룬(Kamerun), 혹은 독일령 카메룬(German Cameroons)이라 불렸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그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두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1.1.2. 2. 독일의 동부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

1890년대와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현재 르완다(Rwanda)와 부룬디(Burundi), 탄자니아(Tanzania)의 대륙지방과 모잠비크의 일부분이 독일의 동부아프리카에 포함되었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르안다(Ruanda)와 우룬디(Urundi)를 형성하고 있었고 탄자니아는 탕가니카(Tanganika)로 알려져 있었다. 1891년에 독일 정부는 상업적인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German East Africa Company)로부터 그 지방의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식민지는 1907년까지 독일의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지 못했다. 전쟁기간 동안에 독일령 동부 아프리카는 영국이 점령하게 되었다. 베르사유 협정(Versailles Treaty ; 1919년)은 벨기에로 넘어간 르완다-우룬디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를 영국의 통치아래 두게 했다.

독일령 동부 아프리카에서 독일의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취해진 경제변화는 1905년 독일의 통치에 반대하는 마지 마지 반란(Maji Maji rebellion)으로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탄자니아 부족들의 단결을 초래했다. 마지 마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은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교수형을 집행하여 아프리카인들을 살해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령 동부 아프리카에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아스카리(Askari)라는 군인들로 차출되어 식민지 군대에 끌려가 싸웠다.

 
1.1.3. 3.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German Southwest Africa)

1884년에 독일은 남서 아프리카(Southwest Africa ; 오늘날의 나미비아(Namibia))를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남서 아프리카에서의 독일 통치는 아프리카 전체에서 가장 잔혹한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 후 몇 십 년간 반란은 아주 철저하게 진압되어서 헤레로(Herero)족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고 집단 수용소가 세워졌는데 식민지 정착 자들은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을 매우 잔혹하게 다루었다. 서기 1915년에 남아프리카(South Africa)가 남서 아프리카를 점령하여 1990년까지 그 곳에 불법적으로 통치했다.

핸드릭 비트부이(Hendrik Witbooi)는 헤레로족에 저항하여 독일에 협력하였던 그는 그 후 독일 통치에 저항하여 나마(Nama)족을 이끌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투쟁 끝에 그는 1905년에 전사했다.

1904년의 반란 후에 독일 당국은 헤레로(Herero)족의 대부분을 학살했다. 4분의 3 이상이 대학살의 결과로 사망했는데 학살당하거나 굶주려 죽었다.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의 아프리카인 포로들은 목에 사슬로 묶여진 상태로 농장으로 끌려갔다.

 
1.1.4. 4. 토고(Togo) 공화국

역사가들은 현재 토고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조상이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자 아니면 아산테(Asante)와 다호메이(Dahomey) 사이에 일어난 전쟁의 피난민으로 믿고 있다.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고 있던 포루투갈 선원들은 15세기 후반에 이 지역에 도착했다. 노예무역이 시작되자마자 남쪽 토고는 노예해안(Slave Coast)으로 불리었다. 노예해안은 남서쪽 나이지리아(Nigeria)부터 현재 가나의 볼타(Valta)강 입구 주변까지 뻗어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독일 무역가와 선교사들이 토고에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1884년 독일은 해안지역에 보호령을 만들었고, 1899년 그들은 독일령 토고랜드(German Togoland)라 불리는 식민지를 설립하였다. 세계 1차 대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령 토고랜드를 점령하였고, 1922년 국제연맹은 서쪽 1/3지역은 영국이 다스리고 동쪽 2/3는 프랑스가 다스리게 하였다. 1946년 UN은 영국과 프랑스령 토고랜드에 신탁통치를 하였다.

1956년 영국령 토고랜드 사람들은 황금해안(Gold Coast)으로 포함되는 것에 대해 국민투표를 하였고, 1957년 황금해안지역이 가나로 독립하였을 때 합병되어졌다. 하지만 1956년 프랑스령 토고랜드는 프랑스연합(French Union) 내에서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프랑스는 토고의 진보당(Progressive Party)의 당수인 니콜라스 그루니츠키(Nicolas Grunitzky)를 수상으로 임명하였고 그는 토고가 프랑스 연합 내에 남기를 원했다. 하지만 1958년 토고의 통일당(Unity Party)의 수장, 실바누스 올림피오(Sylvanus Olympio)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올림피오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였고 1960년 4월 27일에 독립을 성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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