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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헤헤(Hehe)족의 음크와와(Mkwawa)의 반발,1891-8

헤헤(Hehe)족의 음크와와(Mkwawa)의 반발,1891-8 19세기 동안 독일 당국에 대한 최대의 도전은 음크와와로부터 였다. 여러가지 조치들이 독일인들과의 최후통첩으로 귀결되었다. 해안쪽에서 타보라와 그 너머에 이르는 교역로는 음크와와의 부족령을 통과하게 된다. 그는 그의 영역을 통하여 혹은 영역내에서 교역을 하던 사람들에게 '홍고(통행관세)'를 부과하였다. 독일인들은 음크와와나 그의 부하들이 부과하는 과중한 홍고에 대한 보고들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 헤헤족장을 정복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음크와와는 침략자들이 자신을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와 독일인들과의 상이한 점들을 우호적으로 해결하길 희망했다. 그러..

독일통치와 반발 -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타보라(Tabora)는 음완자(Mwanza), 우지지와 그 이상의 지역에 대한 주요 교역의 중심지로서 전략적 위치에 놓여있었다. 냠웨지족의 추장인 이시케는 그의 부족 영역을 통과하는 사람들로부터 '홍고(hongo:통행관세)'를 거두어 들였다. 1886년 기젝(Gieseck)이라는 독일상인이 거래하다가 사기를 쳤다는 죄로 냠웨지족 영토내에서 살해됐다. 이시케는 그의 재산을 압류했고 키팔라팔라(Kipalapala)에서 쫓아냈던 화이트파더스 선교사들에게 반항했다. 그 이후로 그의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감이 커졌다. 얼마후 노련한 독일인 용병 에민 파샤(Emin Pasha)가 1,000명 이상의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타보..

독일통치와 반발 -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팡가니강 유역은 두가지 이유로 유럽인들의 활동거점이었다. 첫째, 우삼바라(Usambara)는 해안으로부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하고 광대한 고지지역이었고, 유럽식 농업은 고지대에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이 풍미하고 있었다. 둘째, 독일침략군은 팡가니계곡을 내려다보고있는 위치에 있는 비옥한 고지대에 조밀하게 모여살고 있는 주민들 사이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이용하였다. 독일인들이 1880년대에 팡가니유역에 들어갔을 당시, 적대관계는 독일인들이 동맹자와 협력자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했다. 마사이(Masai)족은 질병과 내전으로 너무 약화되어 중대한 반대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지금은 상류계곡에 지배적인 아루샤(Arusha)족은 저항했으나 패배했다. 하류지역은 우삼바..

독일통치와 반발 -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아부쉬리의 저항은 탄자니아인 최초의 저항이었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는 잔지바르의 세이드 칼리파(Seyyid Khalifa)와 동회사에 광물채굴권, 통상조례와 본토수입관세의 징수에 관한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의 관리들은 그때부터 대부분의 해안도시들에 걸쳐서 회사의 깃발을 서둘러 게양하였다. 독일의 저의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은 동일한 깃대위에 술탄의 깃발 옆에 나란히 독일기를 게양할 권리를 주장했다. 팡가니(Pangani)에서 분별없이 잔지바르의 깃발을 제지한 사건은 곧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전 해안지방을 휘말려 들어가게 한 폭력소요를 불러일으켰다. 리왈리스(Liwalis)와 아키다스의 해산, 회교사원에 개를 데리고 ..

탄자니아에서의 독일통치와 아프리카인의 반발

탄자니아에서의 독일통치와 아프리카인의 반발 독일인들은 인원부족에 직면한 이후로 해안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정치구조, 즉 아랍식의 아키다스(Akidas)와 줌베(Jumbes)체제를 모방하게 되었다. 그와싸(G.C.K.Gwassa)는 독일인들이 행정중심지들을 설치할 입지를 선정하는 요소들을 개괄적으로 요약해 놓았다. 이 요소들은 주로 다섯항목으로 집약된다. 첫째, 교역과 교통을 통제하기를 기대하며 교역로를 따라 형성된 구도시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탕가(Tanga)노선의 건설이 1891년에 시작되었다. 음프와 프와(Mpwapwa), 타보라(Tabora), 우지지(Ujiji)와 같은 중앙교역로를 따라서 형성된 지역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 생산적 노동력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많은 인구가..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3

(iv)카비론도(Kavirondo)의 반발 카비론도는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루오(Luo), 아발루야(Abaluhya) 그리고 아바구시(Abagusii)부족들이 무단정주하는 습관때문에 알려진 이름이다. 카비론도는 저항하였고, 협력도 하였다. (a) 왕가(Wanga)족의 무미야(Mumia) 왕가족 족장인 무미야는 초기부터 외부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아와 노예를 찾아다니던 아랍과 스와힐리인 대상들은 무미야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토는 해안에서 우간다로 향하는 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회사의 사람들이 무미아의 호의를 알아차리자, 그들은 무미아의 영토에 중간기지를 설치하였다. 영국정부의 점령이 시작되자, 이 중간기지는 서부케냐의 사령부가 되었고, 1920년 사령부가 카카메가(Kak..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2

(iii)난디(Nandi)의 반발,1895-1905 우간다에 이르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영국은 난디지방을 통과하여야만 했다. 난디는 네가지 주요 이유를 들어 저항하였는데, 사뮤엘 아랍 은게니(Samuel Arab Ng'eny)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a)난디족의 자부심 당시 난디족은 원정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였으며, 주변 부족에 대한 군사적,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백인이 그들의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다. 1944년 헌팅포드(Huntingfor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난디족은 스스로를 백인보다 우월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명의 영향력에 의해 야기되..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1

보호령과 케냐의 반발 1894년 우간다에 대한 보호령의 선포는 케동계곡(Kedong)과 해안지역 사이에 위치한 회사의 영토에 무슨 변화가 생기느냐하는 논쟁이 뒤따랐다. 1895년 7월 1일, 영국정부는 우간다와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안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의 통제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점령은 또한 우간다와 나일계곡의 전략적 통제를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이 지역은 이제 영국의 동아프리카 보호령이 되었다. 그러나 점령은 우간다에서와 같은 어떠한 합의도 없이, 협상할 족장들이 없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구실로 실행되었다. 영국의 점령에 대한 잔지바리(Zanzibari) 아랍인들의 반발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잔지바리섬의 술탄 하메드 빈 트와인(Hamed bin Thwain)은..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우간다의 반발

보호령과 우간다의 반발 우간다에서 루가드(Lugard)가 떠나자마자, 영국정부는 동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특별행정관을 임명하였다. 우간다를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영국의 의도를 알리기위해 제랄드 포탈(Gerald Portal)이 1893년 4월 1일 도착하였다. 5월에 그는 무왕가(Mwanga)와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의 내용은 카바카(Kabaka)가 회사 대신에 영국정부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영국의 허락없이는 어떤 국가와도 관계를 맺지않으며 재정에 관한 거의 절대적인 통제권을 영국에 이양하는 것이었다. 이후 포탈은 부간다를 영국의 지배하에 억류하기 위한 건의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1월에 콜빌(Colville) 대령이 과도 정부 행정가로서 파견되었다. 그는 즉시 분요로..

외국의 점령과 서아프리카에서의 저항 형태

비교 요약 식민지 획득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는 영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러한 태도는 일련의 굴욕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200년전 영국에 의해 카나다와 인도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그들은 이후 1871년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서 또다른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였다. 영국은 1882년 이집트문제에 관한 그들의 행동에서도 전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는 어디에서건 이에 보상하려는 열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실들이 서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이 불모지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정복은 그 지역의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행해진 것이었다. 정복은 종종 파리로부터 지시나 허가없이 즉석에서 군대나 프랑스인에 의해 행해졌다. 한편 영국은 상업적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