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령과 우간다의 반발
우간다에서 루가드(Lugard)가 떠나자마자, 영국정부는 동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특별행정관을 임명하였다. 우간다를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영국의 의도를 알리기위해 제랄드 포탈(Gerald Portal)이 1893년 4월 1일 도착하였다. 5월에 그는 무왕가(Mwanga)와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의 내용은 카바카(Kabaka)가 회사 대신에 영국정부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영국의 허락없이는 어떤 국가와도 관계를 맺지않으며 재정에 관한 거의 절대적인 통제권을 영국에 이양하는 것이었다. 이후 포탈은 부간다를 영국의 지배하에 억류하기 위한 건의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1월에 콜빌(Colville) 대령이 과도 정부 행정가로서 파견되었다. 그는 즉시 분요로(Bunyoro)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i) 콜빌대령과 분요로 반대운동, 1893
콜빌 대령은 도착 직후 분요로에 대한 반대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분요로는 정복되지 않았고 영국의 동맹자 토로(Toro)의 평화를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벨기에가 나일강쪽에서 영국의 영토로 침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분요로에 대한 공격은 콜빌로 하여금 이 두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반대운동은 1893년 12월에 시작되었다. 한달만에 호이마(Hoima)에 근접해 있는 카벨레가(Kabalega)의 수도가 점령되었다. 소규모의 병력만이 카발레가의 영향력이 되살아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요로에 잔존하였지만 왕국의 공식적인 합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카발레가 정복에 있어서 그들 역할에 대한 보상으로써 바간다(the Baganda)는 분요로의 동부와 남동부, 특히 중요한 지역인 키타라(Kitara) 왕국의 전 수도인 무벤데(Mubende)의 넓은 지역을 합병하려 하였다.
콩고자유국가(the Congo Free State)의 레오폴드2세가 그 영토를 나일강에서 확장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은 1894년이었다. 그는 이런 운동임이 그와 I.B.E.A. 회사의 맥키논(Mackinnon)간의 협정의 도움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얼마동안, 자유당 수상인 로즈베리(Rosebery)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영국의 희망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프랑스도 같은 방향에서의 야망을 갖게되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자 로즈베리는 콩고 자유국가를 프랑스와 영국 영토의 완충국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그는 레오폴드2세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1894년 5월 12일의 협정에서 레오폴드는 영국의 영토가 1886년과 1890년의 영-독 협정에 의해 자신에게 할당되었다고 생각했다. 영국 영토와 콩고자유국가간의 경계는 동위 30번째 자오선에 고정되었고 독일 영토의 북부에서 부터 콩고-나일강 유역까지 연결되었다. 그 대신에 영국은 레오폴드에게 나일 서쪽에 있는 긴땅을 레오폴드 생전에 임대하였는데 그 땅은 알베트 호수에서 수단의 파쇼다(Fashoda) 까지 뻗어있었다.
영국은 이제 이전 보다 더 많이 우간다에 관여하게 되었다. 1894년 8월 27일 영국은 부간다를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다음해인 1895년 초대 총독으로 어니스트 버클리(Ernest Berkely)가 임명되었다. 1896년 그는 분요로,토로,안콜레(Ankole) 그리고 부소가(Busoga)를 보호령으로 삼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영향력은 초기에 토로에 대한 분요로의 위협에 대한 도전을 받았었다. 1897-9년의 무왕가의 폭동과 수단군의 반란이라는 두 폭동에 의해 거의 제거되었다.
ii) 무왕가의 폭동, 1897
이전 3년간은 무왕가가 영국의 통치에 복종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 기간에 영국의 새로운 체계에서 참을 수 없는 정치적 좌절을 겪었다고 느꼈으며 이것은 그에게 단지 진정한 권위는 두 기독교 카티키로스(Katikiros)가 쥐고있고 재판장, 회계국장이라는 명칭을 갖게했다. 그는 이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1897년 7월 6일 그는 새로운 영국의 행정에 저항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수도를 탈출하였다. 그는 부간다 남서부에 있는, 영국의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못한 부두(Buddu)지방으로 피신하였고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놀랍게도 캄팔라(Kampala)와 다른 지역에서 만약 누군가 무왕가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열광적으로 표시하지 않았다. 두명의 기독교 카티키로스는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영국의 통치가 시작하면서 카바카와 그 부하들이 권력을 잃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과는 달리 기회주의적인 움직임으로 영국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부두에서 무왕가는 패배하였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탈출하였다.
총독대리 트레버 터난(Trevor Ternan) 대령은 공식적으로 카바카를 폐위시키고 전통에 따라 무왕가의 어린 아들 다우디 츠와(Daudi chwa)의 계승을 선포하기 위해 주요 족장들을 캄팔라로 소집하였다. 새로운 카바카를 돕기위해 세명의 섭정관이 임명되었다 : Apolo Kaggwa(원로 Katikiro), Stamislaus Mugwanya(원로 카톨릭 족장), Zachary Kisingiri(원로 개신교 족장)
무왕가가 그의 새로운 피신처인 안칼레(Ankale)에서 지지를 얻게되자 영국은 경쟁자 중 한명을 지원하였고 이에 따라 그 지역에서 영국의 통제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1899년 분요로의 망명자인 무왕가와 외부인에 대한 반대가 가장 지속적이었던 카발레가는 체포되어 키스마유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카발레가는 기독교인이 되어 존(John)이라는 세례를 받았고 1923년 분요로로 돌아오는 길에 진자(Jinja)에서 사망하였다. 무앙가는 망명중 세이셜(인도양 서부에 위치하는 공화국)에서 사망하였다.
iii) 수단군에 의한 폭동, 1897
이것은 카발레가와 무왕가가 했던 것 처럼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만은 아니라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받은 대우에 대한 군인들의 반발이었다. 관계된 군인들은 무왕가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가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군대는 프랑스군이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던 지역의 방어를 위해 맥도날드(Macdonald) 소령의 지휘로 엘다마 라빈(Eldama Ravine)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반란 중이던 부소가(Busoga)의 루바요새로 철수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다른 수단 군대와 함께 포위되었지만 1898년 분요로와 나일 북부쪽으로 탈출하였다.
군대의 불만
수단 군대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이유로 폭동을 일으켰다.
(i) 그들의 봉급이 연체되었다. 이것은 충분한 의복의 공급을 받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에 의해 야기되었는데 의복은 동아프리카에서 일상작인 화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ii) 그들은 장거리 작전에서 일상적인 관행이 되었던 부인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iii) 그들은 맥도날드 소령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는데 맥도날드 소령은 그들을 경멸하였고 그들의 지도자인 세림 베이(Selim Bey)를 학대하였다.
(iv) 그들은 불필요하게 과도한 업무를 담당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분요로에서 전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난디와 협곡(Rift Valley)의 터겐(Turgen)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후 또다시 무왕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철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맥도날드 소령을 어떤 장소까지 호위하기 위해 엘다마 라빈(Eldama Ravine)으로 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무왕가와 수단군인들의 폭동은 우간다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두번의 폭동이 모두 실패하였지만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폭동의 결과와 의의
영국은 막대한 액수의 자금을 폭동 진압에 지출해야 했고 이것은 영국 정부로 하여금 보호령에서 좀 더 명확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이에따라 1899년 해리 존스톤(Harry Johnston)경은 특별총독을 임명하여 우간다에 파견함으로써 영국에 재정적 부담을 주는 보호령을 어떻게하면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검토케 하였다. 바간다(Baganda)족장들과의 치밀한 협의끝에 1900년 부간다협정이 체결되었다.
부간다 협정,1900
부간다협정은 외부인이 아프리카인들과 제휴하여 작성한 문서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네가지 주요 문제를 다루고 있다.
(a) 재정
바간다는 영국정부에 대해 3루피(인도,파키스탄, 스리랑카의 화폐단위)의 가구세를 지불토록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사자saza'추장들과 장관들에 의해 징수되며, 그들은 이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카바카(Kabaka)와 루키코(Lukiko)의 동의없이 바간다에 대한 더 이상의 과세는 없었다.
(b)국경
부간다 영토의 두배확장과 예전의 10개에서 20개로의 saza숫자의 증가가 승인되었다. 새로운 경계는 최근에 분요로(Bunyoro)로부터 합병된 지역도 포함되었다.
(c)정부체계
정부의 간다(Ganda)체계는 조지 윌슨(George Wilson)에 의해 제안된 방향에 따라 수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유지된다. 카바카는 '전하 HisHighness'라는 칭호가 붙여지며, 나이가 들면 국민을 직접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카바카는 세명의 장관, 즉 전통적인 카티키로(Katikiro), 새로만들어진 대법원장, 그리고 새로 신설된 재무장관의 도움을 받는다. 루키코는 이제 최고법정일뿐만 아니라 부족의 입법부로 법률화된다. 처음으로 그 인원이 고정되었다. 20명의 saza족장, 3명의 장관, 60명의 명사 그리고 카바카가 임명한 6명의 사람들이다. 이것은 카바카가 이전에 행사했던 권력을 상당히 축소시킨 것이다.
(d)토지분쟁의 해결
토지는 중요한 문제였고, 협정은 토지소유를 안정시켜 토지사용의 개선을 유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전체토지의 절반은 왕실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나머지는 카바카, 그의 가족, 장관, saza 족장 그리고 1,000명의 소부족 족장에게 분배되었다. 이것은 세가지 면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카바카와 족장들은 자유보유의 명칭이 허용되었고, 반면 전통적으로 부간다의 임명된 족장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고 다만 카바카를 대신하여 토지를 돌봐야 했다. 둘째로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들은 과거처럼 집단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토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세째로 'mailo'소유자들은 그들 토지에 있는 가구마다 2루피의 임대료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무단점유체계의 배경이 되었다.
부간다 협정의 중요성
1900년의 협정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보호령내에서 부간다에 수혜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었지만 카바카는 부간다내에서 더 이상 군주로 군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단지 보호령정부와 바간다간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더욱이 이 협정은 루키코에게 거의 의회와 같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루키코는 부간다의 법률을 제정하였고 최고법원이었다. 이것은 후에 보호령을 대표하는 입법부의 설치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부간다협정은 또한 초기의 기독교정당들과 그들의 회교도 동맹들의 지도력을 승인하였다. 비록 소수이지만 그들이 부간다의 정치무대를 지배하였다. 예를 들면, 복원된 루키코의 모든 구성원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신자들이었다. 협정에따라 토지는 기독교나 회교도들에게만 분배되었다. 토지정리는 후에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교환경제가 생존경제를 대체하게되자, 토지분배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은 질투심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일부사람들에게 유포되었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루키코 구성원에 부여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쪽은 협정을 수용할 만 했고, 존스톤은 유사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토로(Toro) 와 앙콜레(Ankole)로 갔다.
토로협정,1900
이것은 부간다협정보다 짧고 단순한 것이었다. 모든 미경작토지는 왕실소유가 되었지만 무카마(Mukama)와 일부 족장들에게 토지소유권이 허용되었다. 무카마는 그가 영국에 충성하는 한 루웬조리(Ruwenzori)밑에서 많은 공국의 통치자로서 인정받았다. 주택세와 gun taxes 가 또한 제정되었다.
토로협정은 군주국의 장래에 매우 중요하였고,무카마 카사가마(Mukama Kasagama)의 지위도 확실해졌다. 음왕가와 카발레가(Kabalega)와는 달리 카사가마는 결코 영국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았고, 그의 연방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얻었다. 따라서 이 협정은 분요로(Bunyoro)로부터 토로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부간다로부터는 가능케하였다.
안콜레(Ankole)협정,1901
1900년에 영국은 안콜레의 통치자인 무가베(Mugabe)가 주변국가들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는 것을 지원하였다. 1901년의 안콜레협정에 의해 주변국은 무가베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왕국의 규모는 두배가 되었다.
분요로(Bunyoro)
1933년까지 분요로협정은 없었다. 이 지방의 정복은 기정사실로 간주되었고, 존스톤은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0년, 죠지윌슨(George Wilson)이 그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새인물, 그러나 전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통치자를 취임시켰는데, 왜냐하면 카발레가(Kabaldega)가 망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카발레가의 아들인 두하가(Duhaga)였다. 곧 그에 대한 족장들의 충성심의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1901년 영국과 우간다영토의 왕국간에 실질적인 해결책이 만들어졌다.
우간다에서 루가드(Lugard)가 떠나자마자, 영국정부는 동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특별행정관을 임명하였다. 우간다를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영국의 의도를 알리기위해 제랄드 포탈(Gerald Portal)이 1893년 4월 1일 도착하였다. 5월에 그는 무왕가(Mwanga)와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의 내용은 카바카(Kabaka)가 회사 대신에 영국정부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영국의 허락없이는 어떤 국가와도 관계를 맺지않으며 재정에 관한 거의 절대적인 통제권을 영국에 이양하는 것이었다. 이후 포탈은 부간다를 영국의 지배하에 억류하기 위한 건의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1월에 콜빌(Colville) 대령이 과도 정부 행정가로서 파견되었다. 그는 즉시 분요로(Bunyoro)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i) 콜빌대령과 분요로 반대운동, 1893
콜빌 대령은 도착 직후 분요로에 대한 반대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분요로는 정복되지 않았고 영국의 동맹자 토로(Toro)의 평화를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벨기에가 나일강쪽에서 영국의 영토로 침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분요로에 대한 공격은 콜빌로 하여금 이 두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반대운동은 1893년 12월에 시작되었다. 한달만에 호이마(Hoima)에 근접해 있는 카벨레가(Kabalega)의 수도가 점령되었다. 소규모의 병력만이 카발레가의 영향력이 되살아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요로에 잔존하였지만 왕국의 공식적인 합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카발레가 정복에 있어서 그들 역할에 대한 보상으로써 바간다(the Baganda)는 분요로의 동부와 남동부, 특히 중요한 지역인 키타라(Kitara) 왕국의 전 수도인 무벤데(Mubende)의 넓은 지역을 합병하려 하였다.
콩고자유국가(the Congo Free State)의 레오폴드2세가 그 영토를 나일강에서 확장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은 1894년이었다. 그는 이런 운동임이 그와 I.B.E.A. 회사의 맥키논(Mackinnon)간의 협정의 도움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얼마동안, 자유당 수상인 로즈베리(Rosebery)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영국의 희망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프랑스도 같은 방향에서의 야망을 갖게되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자 로즈베리는 콩고 자유국가를 프랑스와 영국 영토의 완충국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그는 레오폴드2세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1894년 5월 12일의 협정에서 레오폴드는 영국의 영토가 1886년과 1890년의 영-독 협정에 의해 자신에게 할당되었다고 생각했다. 영국 영토와 콩고자유국가간의 경계는 동위 30번째 자오선에 고정되었고 독일 영토의 북부에서 부터 콩고-나일강 유역까지 연결되었다. 그 대신에 영국은 레오폴드에게 나일 서쪽에 있는 긴땅을 레오폴드 생전에 임대하였는데 그 땅은 알베트 호수에서 수단의 파쇼다(Fashoda) 까지 뻗어있었다.
영국은 이제 이전 보다 더 많이 우간다에 관여하게 되었다. 1894년 8월 27일 영국은 부간다를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다음해인 1895년 초대 총독으로 어니스트 버클리(Ernest Berkely)가 임명되었다. 1896년 그는 분요로,토로,안콜레(Ankole) 그리고 부소가(Busoga)를 보호령으로 삼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영향력은 초기에 토로에 대한 분요로의 위협에 대한 도전을 받았었다. 1897-9년의 무왕가의 폭동과 수단군의 반란이라는 두 폭동에 의해 거의 제거되었다.
ii) 무왕가의 폭동, 1897
이전 3년간은 무왕가가 영국의 통치에 복종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 기간에 영국의 새로운 체계에서 참을 수 없는 정치적 좌절을 겪었다고 느꼈으며 이것은 그에게 단지 진정한 권위는 두 기독교 카티키로스(Katikiros)가 쥐고있고 재판장, 회계국장이라는 명칭을 갖게했다. 그는 이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1897년 7월 6일 그는 새로운 영국의 행정에 저항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수도를 탈출하였다. 그는 부간다 남서부에 있는, 영국의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못한 부두(Buddu)지방으로 피신하였고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놀랍게도 캄팔라(Kampala)와 다른 지역에서 만약 누군가 무왕가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열광적으로 표시하지 않았다. 두명의 기독교 카티키로스는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영국의 통치가 시작하면서 카바카와 그 부하들이 권력을 잃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과는 달리 기회주의적인 움직임으로 영국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부두에서 무왕가는 패배하였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탈출하였다.
총독대리 트레버 터난(Trevor Ternan) 대령은 공식적으로 카바카를 폐위시키고 전통에 따라 무왕가의 어린 아들 다우디 츠와(Daudi chwa)의 계승을 선포하기 위해 주요 족장들을 캄팔라로 소집하였다. 새로운 카바카를 돕기위해 세명의 섭정관이 임명되었다 : Apolo Kaggwa(원로 Katikiro), Stamislaus Mugwanya(원로 카톨릭 족장), Zachary Kisingiri(원로 개신교 족장)
무왕가가 그의 새로운 피신처인 안칼레(Ankale)에서 지지를 얻게되자 영국은 경쟁자 중 한명을 지원하였고 이에 따라 그 지역에서 영국의 통제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1899년 분요로의 망명자인 무왕가와 외부인에 대한 반대가 가장 지속적이었던 카발레가는 체포되어 키스마유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카발레가는 기독교인이 되어 존(John)이라는 세례를 받았고 1923년 분요로로 돌아오는 길에 진자(Jinja)에서 사망하였다. 무앙가는 망명중 세이셜(인도양 서부에 위치하는 공화국)에서 사망하였다.
iii) 수단군에 의한 폭동, 1897
이것은 카발레가와 무왕가가 했던 것 처럼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만은 아니라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받은 대우에 대한 군인들의 반발이었다. 관계된 군인들은 무왕가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가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군대는 프랑스군이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던 지역의 방어를 위해 맥도날드(Macdonald) 소령의 지휘로 엘다마 라빈(Eldama Ravine)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반란 중이던 부소가(Busoga)의 루바요새로 철수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다른 수단 군대와 함께 포위되었지만 1898년 분요로와 나일 북부쪽으로 탈출하였다.
군대의 불만
수단 군대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이유로 폭동을 일으켰다.
(i) 그들의 봉급이 연체되었다. 이것은 충분한 의복의 공급을 받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에 의해 야기되었는데 의복은 동아프리카에서 일상작인 화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ii) 그들은 장거리 작전에서 일상적인 관행이 되었던 부인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iii) 그들은 맥도날드 소령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는데 맥도날드 소령은 그들을 경멸하였고 그들의 지도자인 세림 베이(Selim Bey)를 학대하였다.
(iv) 그들은 불필요하게 과도한 업무를 담당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분요로에서 전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난디와 협곡(Rift Valley)의 터겐(Turgen)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후 또다시 무왕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철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맥도날드 소령을 어떤 장소까지 호위하기 위해 엘다마 라빈(Eldama Ravine)으로 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무왕가와 수단군인들의 폭동은 우간다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두번의 폭동이 모두 실패하였지만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폭동의 결과와 의의
영국은 막대한 액수의 자금을 폭동 진압에 지출해야 했고 이것은 영국 정부로 하여금 보호령에서 좀 더 명확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이에따라 1899년 해리 존스톤(Harry Johnston)경은 특별총독을 임명하여 우간다에 파견함으로써 영국에 재정적 부담을 주는 보호령을 어떻게하면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검토케 하였다. 바간다(Baganda)족장들과의 치밀한 협의끝에 1900년 부간다협정이 체결되었다.
부간다 협정,1900
부간다협정은 외부인이 아프리카인들과 제휴하여 작성한 문서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네가지 주요 문제를 다루고 있다.
(a) 재정
바간다는 영국정부에 대해 3루피(인도,파키스탄, 스리랑카의 화폐단위)의 가구세를 지불토록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사자saza'추장들과 장관들에 의해 징수되며, 그들은 이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카바카(Kabaka)와 루키코(Lukiko)의 동의없이 바간다에 대한 더 이상의 과세는 없었다.
(b)국경
부간다 영토의 두배확장과 예전의 10개에서 20개로의 saza숫자의 증가가 승인되었다. 새로운 경계는 최근에 분요로(Bunyoro)로부터 합병된 지역도 포함되었다.
(c)정부체계
정부의 간다(Ganda)체계는 조지 윌슨(George Wilson)에 의해 제안된 방향에 따라 수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유지된다. 카바카는 '전하 HisHighness'라는 칭호가 붙여지며, 나이가 들면 국민을 직접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카바카는 세명의 장관, 즉 전통적인 카티키로(Katikiro), 새로만들어진 대법원장, 그리고 새로 신설된 재무장관의 도움을 받는다. 루키코는 이제 최고법정일뿐만 아니라 부족의 입법부로 법률화된다. 처음으로 그 인원이 고정되었다. 20명의 saza족장, 3명의 장관, 60명의 명사 그리고 카바카가 임명한 6명의 사람들이다. 이것은 카바카가 이전에 행사했던 권력을 상당히 축소시킨 것이다.
(d)토지분쟁의 해결
토지는 중요한 문제였고, 협정은 토지소유를 안정시켜 토지사용의 개선을 유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전체토지의 절반은 왕실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나머지는 카바카, 그의 가족, 장관, saza 족장 그리고 1,000명의 소부족 족장에게 분배되었다. 이것은 세가지 면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카바카와 족장들은 자유보유의 명칭이 허용되었고, 반면 전통적으로 부간다의 임명된 족장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고 다만 카바카를 대신하여 토지를 돌봐야 했다. 둘째로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들은 과거처럼 집단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토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세째로 'mailo'소유자들은 그들 토지에 있는 가구마다 2루피의 임대료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무단점유체계의 배경이 되었다.
부간다 협정의 중요성
1900년의 협정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보호령내에서 부간다에 수혜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었지만 카바카는 부간다내에서 더 이상 군주로 군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단지 보호령정부와 바간다간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더욱이 이 협정은 루키코에게 거의 의회와 같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루키코는 부간다의 법률을 제정하였고 최고법원이었다. 이것은 후에 보호령을 대표하는 입법부의 설치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부간다협정은 또한 초기의 기독교정당들과 그들의 회교도 동맹들의 지도력을 승인하였다. 비록 소수이지만 그들이 부간다의 정치무대를 지배하였다. 예를 들면, 복원된 루키코의 모든 구성원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신자들이었다. 협정에따라 토지는 기독교나 회교도들에게만 분배되었다. 토지정리는 후에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교환경제가 생존경제를 대체하게되자, 토지분배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은 질투심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일부사람들에게 유포되었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루키코 구성원에 부여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쪽은 협정을 수용할 만 했고, 존스톤은 유사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토로(Toro) 와 앙콜레(Ankole)로 갔다.
토로협정,1900
이것은 부간다협정보다 짧고 단순한 것이었다. 모든 미경작토지는 왕실소유가 되었지만 무카마(Mukama)와 일부 족장들에게 토지소유권이 허용되었다. 무카마는 그가 영국에 충성하는 한 루웬조리(Ruwenzori)밑에서 많은 공국의 통치자로서 인정받았다. 주택세와 gun taxes 가 또한 제정되었다.
토로협정은 군주국의 장래에 매우 중요하였고,무카마 카사가마(Mukama Kasagama)의 지위도 확실해졌다. 음왕가와 카발레가(Kabalega)와는 달리 카사가마는 결코 영국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았고, 그의 연방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얻었다. 따라서 이 협정은 분요로(Bunyoro)로부터 토로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부간다로부터는 가능케하였다.
안콜레(Ankole)협정,1901
1900년에 영국은 안콜레의 통치자인 무가베(Mugabe)가 주변국가들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는 것을 지원하였다. 1901년의 안콜레협정에 의해 주변국은 무가베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왕국의 규모는 두배가 되었다.
분요로(Bunyoro)
1933년까지 분요로협정은 없었다. 이 지방의 정복은 기정사실로 간주되었고, 존스톤은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0년, 죠지윌슨(George Wilson)이 그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새인물, 그러나 전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통치자를 취임시켰는데, 왜냐하면 카발레가(Kabaldega)가 망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카발레가의 아들인 두하가(Duhaga)였다. 곧 그에 대한 족장들의 충성심의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1901년 영국과 우간다영토의 왕국간에 실질적인 해결책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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