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 요약
식민지 획득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는 영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러한 태도는 일련의 굴욕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200년전 영국에 의해 카나다와 인도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그들은 이후 1871년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서 또다른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였다. 영국은 1882년 이집트문제에 관한 그들의 행동에서도 전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는 어디에서건 이에 보상하려는 열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실들이 서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이 불모지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정복은 그 지역의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행해진 것이었다. 정복은 종종 파리로부터 지시나 허가없이 즉석에서 군대나 프랑스인에 의해 행해졌다.
한편 영국은 상업적인 이유때문에 서아프리카에 이미 진출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영토획득에 관심이 있었다면, 영국정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도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간의 지원을 하였다. 종종 정부 자체도 정복에 있어서 효과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정복은 단지 정부자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지역내의 경제적 잠재성의 평가의 결과였다.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제외하고는 사막이나 오지보다는 상업성이 있는 해안을 점령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서아프리카 정복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원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한 해결방안에 대한 프랑스의 혐오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국내에서도 평화로운 항복이 없었던 것처럼, 정복하는데 있어서도 잔인함과 무례함을 보였다. 군대에서도 진급은 그들의 업적의 결과였고, 그 업적은 사용한 방법이 아니라 전리품의 규모에 의해 평가되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태도는 아프리카국가들의 생존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낳게하는 데에도 나타났다. 잔인한 정복방법은 잔인한 저항방법을 야기시켰다.
한편, 영국은 협정체결이라는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우선 족장들의 신임을 얻고 그리고 나서 아랍인들에게 낙타를 주는 것과 같은 대우를 줌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점차 빼앗으며, 만약 그가 완전히 비협력적이 되면 그때 폭력에 의존한다.
게다가 영국의 정복은 그들이 관심을 가진 국가대부분의 불완전한 속성에 의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이들 국가들은 대부분 비회교도국가들이며, 그들의 지도자는 이데올로기적 또는 종교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비신도들에 의한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코란(Quran)에 의해 움직이는 거의 광신도적인 회교지도자들을 상대했다. 사모리(Samory), 알하즈 우마르(Alhajj Umar) 그리고 아마도우 세코우(Ahmadou Sekou)와 같은 회교지도자들에게 있어 프랑스에 대한 저항은 외부의 이교도에 대한 성전'jihad'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전쟁이었다. 따라서 외부인에 대한 저항은 강력했으며 아이보리코스트같은 작은 국가들도 프랑스에 27년간이나 저항하였다.
영국에 의해 점령된 왕국은 대부분 규모면에서 작았을뿐만 아니라 아주 견고한 국경을 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영국이 각 국가들을 잇달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앙집중화되고 광신도적인 이슬람왕국뿐만 아니라 사모리와 알하즈 우마르의 왕국처럼 고도로 기동성있고 팽창주의적인 제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불운을 겪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그들의 목표조차 계획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목표물들이 영구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서아프리카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불만에 가득찬 종족적 집단때문이었다. 예를들어 거대한 수단제국의 대부분은 주로 최근에 나타난 소코토(Sokoto), 라베(Rabeh), 토콜로(Tokolor) 그리고 만딘카(Mandinka)로 구성되었다. 그런 국가들은 불가피하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신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이슬람 정복자들, 소코토 칼리페이트(Sokoto Caliphate)의 그와시(Gwasi), 라베의 카누리(Kanuri), 아마도우 세코우(Ahmadou Sekou)의 티자니(Tijani) 그리고 토콜로의 밤바라(Bambara)에게 충성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러한 불만을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적 약세는 또한 많은 국가에 있어 후계자 승계의 부재에 의해서도 야기되었다. 대부분의 왕실가족들은 가장 높은 지위에 누가 오르든지 간에 잠재적인 반대자가 되었다. 게다가 민족주의, 인종적 단결 또는 공통의 대의명분과 같은 정서가 발전되지 못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이교도를 몰아내기위해 사모리와 연합군을 형성하는것을 아마도우가 거절한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또한 생계농업에 토대를 둔 국가와 유럽의 산업화된 국가간의 경쟁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이 처음부터 싸움을 불공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군사적 약세는 아프리카인이 패배하게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아프리카국가들은 현대식 무기가 없었고, 무기도 부족하였으며, 전통적인 전투방법은 잘 훈련된 유럽군과 현대식 무기를 상대할 수 없었다. 사모리와 아이보리코스트의 해안국가들과 같이 이러한 약세를 적절히 재검토한 사람들은 게릴라전법의 사용으로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머지 국가들은 정면대결하지 않고 적에게서 도망하는 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용감한 원칙에 따라 매우 값비싼 댓가를 치루었다.
식민지 획득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는 영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러한 태도는 일련의 굴욕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200년전 영국에 의해 카나다와 인도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그들은 이후 1871년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서 또다른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였다. 영국은 1882년 이집트문제에 관한 그들의 행동에서도 전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는 어디에서건 이에 보상하려는 열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실들이 서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이 불모지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정복은 그 지역의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행해진 것이었다. 정복은 종종 파리로부터 지시나 허가없이 즉석에서 군대나 프랑스인에 의해 행해졌다.
한편 영국은 상업적인 이유때문에 서아프리카에 이미 진출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영토획득에 관심이 있었다면, 영국정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도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간의 지원을 하였다. 종종 정부 자체도 정복에 있어서 효과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정복은 단지 정부자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지역내의 경제적 잠재성의 평가의 결과였다.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제외하고는 사막이나 오지보다는 상업성이 있는 해안을 점령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서아프리카 정복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원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한 해결방안에 대한 프랑스의 혐오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국내에서도 평화로운 항복이 없었던 것처럼, 정복하는데 있어서도 잔인함과 무례함을 보였다. 군대에서도 진급은 그들의 업적의 결과였고, 그 업적은 사용한 방법이 아니라 전리품의 규모에 의해 평가되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태도는 아프리카국가들의 생존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낳게하는 데에도 나타났다. 잔인한 정복방법은 잔인한 저항방법을 야기시켰다.
한편, 영국은 협정체결이라는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우선 족장들의 신임을 얻고 그리고 나서 아랍인들에게 낙타를 주는 것과 같은 대우를 줌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점차 빼앗으며, 만약 그가 완전히 비협력적이 되면 그때 폭력에 의존한다.
게다가 영국의 정복은 그들이 관심을 가진 국가대부분의 불완전한 속성에 의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이들 국가들은 대부분 비회교도국가들이며, 그들의 지도자는 이데올로기적 또는 종교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비신도들에 의한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코란(Quran)에 의해 움직이는 거의 광신도적인 회교지도자들을 상대했다. 사모리(Samory), 알하즈 우마르(Alhajj Umar) 그리고 아마도우 세코우(Ahmadou Sekou)와 같은 회교지도자들에게 있어 프랑스에 대한 저항은 외부의 이교도에 대한 성전'jihad'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전쟁이었다. 따라서 외부인에 대한 저항은 강력했으며 아이보리코스트같은 작은 국가들도 프랑스에 27년간이나 저항하였다.
영국에 의해 점령된 왕국은 대부분 규모면에서 작았을뿐만 아니라 아주 견고한 국경을 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영국이 각 국가들을 잇달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앙집중화되고 광신도적인 이슬람왕국뿐만 아니라 사모리와 알하즈 우마르의 왕국처럼 고도로 기동성있고 팽창주의적인 제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불운을 겪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그들의 목표조차 계획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목표물들이 영구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서아프리카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불만에 가득찬 종족적 집단때문이었다. 예를들어 거대한 수단제국의 대부분은 주로 최근에 나타난 소코토(Sokoto), 라베(Rabeh), 토콜로(Tokolor) 그리고 만딘카(Mandinka)로 구성되었다. 그런 국가들은 불가피하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신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이슬람 정복자들, 소코토 칼리페이트(Sokoto Caliphate)의 그와시(Gwasi), 라베의 카누리(Kanuri), 아마도우 세코우(Ahmadou Sekou)의 티자니(Tijani) 그리고 토콜로의 밤바라(Bambara)에게 충성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러한 불만을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적 약세는 또한 많은 국가에 있어 후계자 승계의 부재에 의해서도 야기되었다. 대부분의 왕실가족들은 가장 높은 지위에 누가 오르든지 간에 잠재적인 반대자가 되었다. 게다가 민족주의, 인종적 단결 또는 공통의 대의명분과 같은 정서가 발전되지 못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이교도를 몰아내기위해 사모리와 연합군을 형성하는것을 아마도우가 거절한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또한 생계농업에 토대를 둔 국가와 유럽의 산업화된 국가간의 경쟁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이 처음부터 싸움을 불공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군사적 약세는 아프리카인이 패배하게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아프리카국가들은 현대식 무기가 없었고, 무기도 부족하였으며, 전통적인 전투방법은 잘 훈련된 유럽군과 현대식 무기를 상대할 수 없었다. 사모리와 아이보리코스트의 해안국가들과 같이 이러한 약세를 적절히 재검토한 사람들은 게릴라전법의 사용으로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머지 국가들은 정면대결하지 않고 적에게서 도망하는 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용감한 원칙에 따라 매우 값비싼 댓가를 치루었다.
'역사 > 침략과 저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1 (0) | 2001.11.21 |
---|---|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우간다의 반발 (0) | 2001.11.21 |
영국의 점령과 반발 - 감비아의 점령과 반발 (0) | 2001.11.21 |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시에라레온의 점령과 반발 (0) | 2001.11.21 |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영국에 대한 판테인의 반발 (0) | 2001.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