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시에라레온의 점령과 반발

africa club 2001. 11. 21. 14:40
시에라레온의 점령과 반발
    시에라레온은 해방된 노예들을 위한 식민지로서 1787년에 세워진 나라였다.  박애주의자들을 기독교와 합법적인 무역이 언젠가는 템네(Temne)와 멘데(Mende)족들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있는 내부에까지 이르기를 희망하였다.  1896년, 시에라레온 오지에 보호령이 선포되었고, 이러한 부족들은 그들의 권력이 무너지는 비애를 당하였다.  그들의 불만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은 1898년 폭동을 일으켰다.

     (a)템네-멘데족의 폭동.1898
    1898년의 폭동은 세가지-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호 연계된 원인을 갖고 있었다.

     사회적 원인
    처음부터 크레올(Creole)로 알려진 해안의 반카스트사회는 외국문화의 독점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선교활동의 지대한 영향력을 경험하였고, 교육부문을 통제하였으며, 이런 혜택으로부터 토착주민들을 배제시켰다.  그들은 토착주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크리오(Krio)'를 구사하였으며, 전통적인 것은 모두 야만적이라는 오명을 씌웠으며, 오지에서는 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병적우월감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문화적 침략은 템네와 멘데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크레올인들은 또한 다른 종류의 강박관념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1890년 국경경찰부대가 창설되었고 크레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계급사회적 배경은 오지에서 그들이 쉽게 적응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들은 모욕을 받고 상심하였다.  그들의 거부감때문에 그들은 복수와 위협을 하고, 내륙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경제적 원인
    1896년 토지 분할에 대한 포고령과 주택세는 주민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이 포고령에 의하면 모든 광물에 대한 권리는 황실에게 주어지고 쓸모없거나 거주할 수 없는 땅은 주민들에게 분배되었다.  토지정책은 아프리카인들이 이주 경작을 한다는 사실과 외부인에 의한 배정은 그들의 땅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들 토지로 부터의 소외는 주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주택세에 의한 것이었다.  카듀(Cardew)행정부는 방 세개이상의 주택에는 10실링, 그 이하의 주택에는 5실링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주민들은 이것을 앞으로 그들이 더이상 자신들이 건축한 주택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왜냐하면 주택을 소유하지 않으면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금은 그들 주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98년에 발생한 폭동은 그들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전쟁이었다.
    크레올인들의 활동은 상황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중간상인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착취자로서 내륙의 족장들에게서 중간상인의 지위를 빼앗아 갔다.

    정치적 원인
   카듀총독이 인정했듯이, 템네와 멘데족이 폭동을 일으킨 것은,
    ['독립과 옛 질서로의 복귀에 대한 욕망때문이었다.  그들은 지방관리들과 국경경찰들이 주장한 것처럼 백인의 패권에 싫증이 난 것이다.']
    영국이 임명한 지방관리들은 족장들의 전통적인 권위를 침해하였다.  족장들은 점차 족장지위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임명되었으며 사실상 그들의 지위도 점차 저하되었다.  영국인 또는 크레올인 상급자에 불경하다는 의심이 가는 족장은 약식재판을 받고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였으며 투옥되었다.  국경경찰은 법률을 자의적으로 집행하였다.
    게다가 족장들은 재판이나 시민행정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지방행정가들이 관습법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영국인들의 사법적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행정은 사실상 비능률과 부패로 가득차게 되었다.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경경찰이 행정을 장악했으며, 국경경찰은 대부분 미움을 받고 있던 크레올인들이었다.

     전쟁의 경과
   시에라레온 오지 아프리카인들의 불만은 1898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북부에서는, 템네족 족장인 바이 부레(Bai Bure)가 체포되어 투옥되기 전까지 9개월간 영국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유럽인으로서는 포래 베이 칼리지(Fourah Bay College)의 교장이었던 험프리(W.J.Humphrey)라는 사람만이 살해되었다.
    남부에서의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멘데족은 전면전을 벌여, 크레올인과 백인 또는 유럽의 문화를 모방하려는 멘데족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사망한 크레올인들이 1,000명에 이르렀다.  폭동은 결국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호령 정부에게 두가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첫째,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사이의 중재인으로서의 크레올인들의 역할이 당시 상황에서는 현실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며, 둘째, 아프리카인들은 외부인의 통치를 묵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전쟁의 결과, 내륙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었던 '크레올인화(Creolisation)'의 속도가 그들의 통합을 지키려는 아프리카인들의 의지에 의해 속도가 느려졌다.  크레올인들이 그들에게 할당된 오지에서 무참하게 실패하게 되자, 영국은 영국인 관리들을 통해 오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따라서, 1914년에 이르러서는 서아프리카 어느곳에서도 크레올인들의 영향력은 발휘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