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대한 판테인의 반발
아산테의 남쪽에 위치한 판테왕국은 만케심(Mankessim)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18세기에 판테왕국은 프라강 어귀에서부터 가(Ga)왕국까지에 이르는 가나 해안지방까지 팽창했었다. 1840년대 이래 판테왕국은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영국은 아산테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 사람들로서 환영받았다. 그러니 그 이후 그들은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이 저항은 교육받은 엘리트와 족장들로서 판테연합(1868-73)을 형성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판테연합(Fante Confederacy)
맥클린(Macclean) 행정부 시기 이후로 판테인들이 아산테로부터 획득한 독립을 어느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당시 유럽인의 간섭은 늘어가고 있었고, 판테인들은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판테연합 결성의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첫째, 1863년의 영-아산테전쟁은 영국이 판테를 보호하는데 있어 불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만약 아산테가 영국에게 그러한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면 어떻게 영국에게 장래의 안보를 의존할 수 있을 것인가? 판테왕국이 아산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존의식(self-reliance)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영국의 보호에 의존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안한 일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865년 영국의회 특별위원회는 골드코스트와 판테에서의 영국의 철수를 결의하였다. 판테는 영국의 철수를 신속히 처리하고 곧 있게 될 자치정부를 준비하기 위하여 동맹을 결성하였다. 결국, 판테는 그들의 동맹국인 영국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기 시작한 셈이었다. 예를 들면, 1866년 케이프 코스트의 아그레이(Aggrey)왕이 판테인들에게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영국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판테인들에게는 영국의 배신적인 모습을 강조한 것이었고, 그들의 움직임은 집단적으로 감시되었다.
동맹을 형성함으로써 해안의 주민들은 헌법과 자치적인 조세체제와 같은 근대적인 방식으로 그들 자신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1868년 맨케심을 만났고, 헌법이 선포되었다. 계획은 두개의 주요 실체 - 족장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회의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장관을 이들이 선출하는 것 - 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영국이 결국 골드코스트를 포기하지 않으므로해서 성공하지 못했다.
연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73년 연합은 에두(Edu)와 오투(Otu)왕간의 권력경쟁과 연합에 대한 영국의 적의때문에 해체되고 말았다. 행정가인 우셔(Ussher)와 살리먼(Salimon)은 족장들과 지식인들의 이러한 동맹을 위협적인 도전이라고 간주하였고 연합으로부터 족장들을 탈퇴시키기위해 공격과 위협을 가하였다. 살리먼은 새 대표위원회의 집행위원들을 1871년 더치(Dutch)요새의 구매를 인가하는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역혐의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판테의 저항은 시작되지 않았거나 연합의 결성과 함께 끝났다. 그들의 반대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52년 식민주의자들이 족장들에게 학교, 도로, 병원을 건설함으로써 식민지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했으며, 세금부과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1854년 사람들은 그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납세를 거부하였다. 1860년에서 1862년까지 정부가 돈을 거두어들이지만 그 돈을 가지고 실질적인 발전계획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족장들과 지식인들의 동맹에 의해 조세저항이 발생하였다.
연합의 붕괴 이후 거의 30년간 판테는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그들의 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1897년 그들의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들은 이에 대항하기위해 원주민권리보호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무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사용된 방법은 1852년 세금위기시에 족장들이 사용하였던 가나인의 권리에 대한 호소였다. 1898년 협회는 런던에 대표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식민장관에게 토지법을 철회하도록 설득시켰다. 이것은 협회의 위상을 대단히 강화시키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판테는 협력적인 사회라 하더라도 외국의 침입에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는 좋은 예를 만들었다. 그들은 외국인에 대한 호의 때문에 협력한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이유때문에 협력한 것이었고, 이러한 이유들이 충족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아산테에 대한 두려움과 영국이 가져오는 물질적인 이익때문에 영국에 협력한 것이었지 그들이 식민지화되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의 안보의 벽이 1863년 아산테의 승리로 심각한 정도로 흔들리게 되고, 영국이 판테의 주권을 계속해서 간섭하게 되자, 판테는 비록 평화적인 방법이었지만 독립국으로 남으려는 그들의 욕망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산테의 남쪽에 위치한 판테왕국은 만케심(Mankessim)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18세기에 판테왕국은 프라강 어귀에서부터 가(Ga)왕국까지에 이르는 가나 해안지방까지 팽창했었다. 1840년대 이래 판테왕국은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영국은 아산테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 사람들로서 환영받았다. 그러니 그 이후 그들은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이 저항은 교육받은 엘리트와 족장들로서 판테연합(1868-73)을 형성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판테연합(Fante Confederacy)
맥클린(Macclean) 행정부 시기 이후로 판테인들이 아산테로부터 획득한 독립을 어느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당시 유럽인의 간섭은 늘어가고 있었고, 판테인들은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판테연합 결성의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첫째, 1863년의 영-아산테전쟁은 영국이 판테를 보호하는데 있어 불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만약 아산테가 영국에게 그러한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면 어떻게 영국에게 장래의 안보를 의존할 수 있을 것인가? 판테왕국이 아산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존의식(self-reliance)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영국의 보호에 의존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안한 일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865년 영국의회 특별위원회는 골드코스트와 판테에서의 영국의 철수를 결의하였다. 판테는 영국의 철수를 신속히 처리하고 곧 있게 될 자치정부를 준비하기 위하여 동맹을 결성하였다. 결국, 판테는 그들의 동맹국인 영국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기 시작한 셈이었다. 예를 들면, 1866년 케이프 코스트의 아그레이(Aggrey)왕이 판테인들에게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영국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판테인들에게는 영국의 배신적인 모습을 강조한 것이었고, 그들의 움직임은 집단적으로 감시되었다.
동맹을 형성함으로써 해안의 주민들은 헌법과 자치적인 조세체제와 같은 근대적인 방식으로 그들 자신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1868년 맨케심을 만났고, 헌법이 선포되었다. 계획은 두개의 주요 실체 - 족장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회의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장관을 이들이 선출하는 것 - 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영국이 결국 골드코스트를 포기하지 않으므로해서 성공하지 못했다.
연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73년 연합은 에두(Edu)와 오투(Otu)왕간의 권력경쟁과 연합에 대한 영국의 적의때문에 해체되고 말았다. 행정가인 우셔(Ussher)와 살리먼(Salimon)은 족장들과 지식인들의 이러한 동맹을 위협적인 도전이라고 간주하였고 연합으로부터 족장들을 탈퇴시키기위해 공격과 위협을 가하였다. 살리먼은 새 대표위원회의 집행위원들을 1871년 더치(Dutch)요새의 구매를 인가하는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역혐의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판테의 저항은 시작되지 않았거나 연합의 결성과 함께 끝났다. 그들의 반대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52년 식민주의자들이 족장들에게 학교, 도로, 병원을 건설함으로써 식민지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했으며, 세금부과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1854년 사람들은 그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납세를 거부하였다. 1860년에서 1862년까지 정부가 돈을 거두어들이지만 그 돈을 가지고 실질적인 발전계획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족장들과 지식인들의 동맹에 의해 조세저항이 발생하였다.
연합의 붕괴 이후 거의 30년간 판테는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그들의 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1897년 그들의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들은 이에 대항하기위해 원주민권리보호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무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사용된 방법은 1852년 세금위기시에 족장들이 사용하였던 가나인의 권리에 대한 호소였다. 1898년 협회는 런던에 대표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식민장관에게 토지법을 철회하도록 설득시켰다. 이것은 협회의 위상을 대단히 강화시키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판테는 협력적인 사회라 하더라도 외국의 침입에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는 좋은 예를 만들었다. 그들은 외국인에 대한 호의 때문에 협력한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이유때문에 협력한 것이었고, 이러한 이유들이 충족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아산테에 대한 두려움과 영국이 가져오는 물질적인 이익때문에 영국에 협력한 것이었지 그들이 식민지화되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의 안보의 벽이 1863년 아산테의 승리로 심각한 정도로 흔들리게 되고, 영국이 판테의 주권을 계속해서 간섭하게 되자, 판테는 비록 평화적인 방법이었지만 독립국으로 남으려는 그들의 욕망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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