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영국의 점령과 반발 - 1874년의 영-아산테전쟁

africa club 2001. 11. 21. 14:37
1874년의 영-아산테전쟁
    1874년의 아산테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엘미나(Elmina)항구문제였다.  1872년 케이프 코스트(Cape Coast)에서 영국과 화란간에 항구의 교환이 있었다.  이러한 거래는 자부심 강한 아산테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엘미나가 그들과 관계가 좋지않은 영국에 넘겨졌기 때문이었다.  엘미나는 오세이 투투(Osei Tutu)가 덴키라(Denkyira)를 정복하고 획득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분노는 감정적, 정치적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화란으로부터 엘미나항 사용료로 연간 80파운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사용료 지불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곳이 바다로 향하는 유일한 출구였던 아산테와의 통로도 봉쇄해 버렸다.
    동시에 크와시 가니사건도 잊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산테주권을 손상시키는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869년 아산테-엘미나전쟁에서 두명의 선교사인 맨세이어(Manseyer:스위스인),키네(Kiihne:독일인) 그리고 보난(Bonnat:프랑스상인)이 아산테의 코피 카리카리(Kofi Karikari)에 의해 쿠마시에서 투옥되었다.  헤네시(Hennessy)총독은 그들의 석방조건으로 1,000파운드를 제시하였다.  코피는 그 가격을 두배로 올려 제시하였다.  결국 이돈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지불되지 않고 판테국에 지불되었다.  이러한 무례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사건과 함께 엘미나문제는  아산테동맹으로 하여금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가속화시켰다.
    영국은 1863년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동원해 보복하였다.  증원부대가 케이프 코스트로 파견되었다.  가넷 울슬리(Garnet Wolseley)대령은 아산테를 평정시키기 위하여 2,000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아산테의 저항은 패배하였고, 포메나(Fomena)협정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포메나협정은 아산테가 손해배상으로 금 5만온스를 지불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들은 또한 엘미나와 함께 남부 국가들에 대한 권리도 포기하였다.
    영국과의 평화에도 불구하고 아산테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다섯개의 중요부족이 쿠마시로부터 분리해 나갔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들은 연방의 중앙권력을 상당히 약화시키면서 그들의 독립을 재주장하였다.
    쿠마시 내부에서도 혼란이 나타났다.  카리카리는 여왕에 의해 반타마(Bantama)묘지에서 도난당한 금장식품 사용혐의로 기소되었다.  주아벤스(Juabens)가 1875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1883년까지 통치한 멘사 본수(Mensa Bonsu)에 의해 진압되었다.  멘사 본수는 1874년의 패배를 보복하겠다는 열의가 부족했고, 결과적으로 폐위되어, 마마로 죽기전까지 40년간 통치한 크와쿠 두아(Kwaku Dua)가 그의 뒤를 계승하였다.  그 후계자 크와시 키시(Kwasi Kyisi)는 그후 곧 사망하고, 내전이 발생하였다.  1888년 3월 아게만 프렘프 1세(Agyeman Prempeh I)가 Asantehene가 되었다.
    프렘프 1세는 아산테의 손상된 주권을 성공적으로 재건한 사람이었다.  그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서 그를 꼭둑각시로 만들려던 영국은 그에게 영국의 보호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  그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총독대리 허즈슨은 아산테점령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은 이로 인해 발생할 부담때문에 요청을 거부하였다.  1895년 식민지장관이 된 챔버린(Chamberlain)은 아산테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정을 계획하였다.  쿠마시는 약탈당했고, 왕실의 보물들이 1896년 영국으로 실려갔다.  17만 5천 파운드의 손해배상이 청구되자, 이를 갚을 수 없었던 프렘페1세는 시에라레온으로 추방되었고, 아산테는 영국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통제는 곧이어 있은 1900년의 영-아산테전쟁으로 동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