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에 의한 점령
왕립 니제르 회사(Royal Niger Company)는 북부나이지리아에 대한 영국의 보호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 전부터 수년간 니제르강과 베뉴(Benue)강을 따라 활동하고 있었다. 그 활동은 본질적으로 상업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회사는 많은 토후국들과 조약을 맺고 진출하였다. 이 조약들 중 일부는 토후국에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1884-5년에 걸친 베를린회담에서 북부나이지리아를 영국의 영향력하에 있는 지역으로 인정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조약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적 승인을 확보하기에 불충분하였다. 프랑스는 이미 현 니제르 공화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한편, 독일도 카메룬에서 그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북부 나이지리아 지역은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영국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절한 행정체계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회사는 그 지역에 적절한 행정을 펼 수 없었다. 1899년 회사의 면허가 취소되고 영국의 식민성 관리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1900년 1월1일 오전 7시, 루가드는 로코자(Lokoja)에 영국기를 게양하였다 - 이는북부 나이지리아에 영국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영국 보호령이 선포되었다. 루가드는 초대 고등 판무관이 되었다.
그러나 북부 나이지리아 주민들은 영국에 통치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영국의 '권리' 승인을 확고하게 거부하였다. 그들의 독립유지에 대한 열망과는 별도로 그들의 거부는 그들의 신념에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이슬람교도들로써 그들은 코란에 따라 이교도들의 통치를 허용하지 않았는데, 유럽인들은 비 이슬람교도들이며 그러므로 이교도들이라고 믿었다. 영국의 서신에 답신하는 칼리프의 입장은 북부에 있는 모든 회교 통치자들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
[나는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들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와 당신 사이에는 이슬람교도와 이교도들 사이의 전쟁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알마이티(Almighty)신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높은 곳에 계시는 신이 우리를 구제할 것이다]
따라서 1900년 부터 1906년까지 전쟁이 발생하였다. 욜라(Yola), 비다(Bida), 콘타고라(Kontagora), 카노(Kaano), 소코타(Sokota), 보르누(Bornu), 카트시나(Katsina) 자리아(Zaria) 그리고 다른 부족들이 영국통치에 굴복하기 보다는 그들의 믿음과 자유를 위해 싸우기로 선택했다.
회교 통치자들 중 몇몇은 싸움을 피해 달아났다. 그 상황에서의 도망은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비겁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가 모하메드 자신도 유명한 '헤지라(Hijra)'의 망명처럼 탈출했다. 이슬람은 이교도의 통치를 받는 대신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교도의 위협을 받았을 때, 싸우거나 도망갈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그중 가장 극적인 탈출은 영국 정복 시기에 칼리프였던 아타히루 1세(Attahiru I)의 탈출이었다.
소코토(Sokoto)가 영국에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아타히루는 그의 관리들, 가족 그리고 재산을 가지고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영국군은 그를 추격했다. 5개월간의 추격끝에 루가드군은 1903년 7월에 부르미(Burmi)에서 칼리프를 체포하였다. 이곳에서의 격렬한 전투로 690명에 이르는 아타히루군인들이 사망하였다. 다시 한번 외부인들의 우세한 무기의 승리였다. 칼리페이트(Caliphate)의 정복과 함께 나이지리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영국의 점령이 완성되었다.
왕립 니제르 회사(Royal Niger Company)는 북부나이지리아에 대한 영국의 보호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 전부터 수년간 니제르강과 베뉴(Benue)강을 따라 활동하고 있었다. 그 활동은 본질적으로 상업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회사는 많은 토후국들과 조약을 맺고 진출하였다. 이 조약들 중 일부는 토후국에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1884-5년에 걸친 베를린회담에서 북부나이지리아를 영국의 영향력하에 있는 지역으로 인정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조약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적 승인을 확보하기에 불충분하였다. 프랑스는 이미 현 니제르 공화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한편, 독일도 카메룬에서 그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북부 나이지리아 지역은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영국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절한 행정체계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회사는 그 지역에 적절한 행정을 펼 수 없었다. 1899년 회사의 면허가 취소되고 영국의 식민성 관리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1900년 1월1일 오전 7시, 루가드는 로코자(Lokoja)에 영국기를 게양하였다 - 이는북부 나이지리아에 영국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영국 보호령이 선포되었다. 루가드는 초대 고등 판무관이 되었다.
그러나 북부 나이지리아 주민들은 영국에 통치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영국의 '권리' 승인을 확고하게 거부하였다. 그들의 독립유지에 대한 열망과는 별도로 그들의 거부는 그들의 신념에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이슬람교도들로써 그들은 코란에 따라 이교도들의 통치를 허용하지 않았는데, 유럽인들은 비 이슬람교도들이며 그러므로 이교도들이라고 믿었다. 영국의 서신에 답신하는 칼리프의 입장은 북부에 있는 모든 회교 통치자들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
[나는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들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와 당신 사이에는 이슬람교도와 이교도들 사이의 전쟁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알마이티(Almighty)신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높은 곳에 계시는 신이 우리를 구제할 것이다]
따라서 1900년 부터 1906년까지 전쟁이 발생하였다. 욜라(Yola), 비다(Bida), 콘타고라(Kontagora), 카노(Kaano), 소코타(Sokota), 보르누(Bornu), 카트시나(Katsina) 자리아(Zaria) 그리고 다른 부족들이 영국통치에 굴복하기 보다는 그들의 믿음과 자유를 위해 싸우기로 선택했다.
회교 통치자들 중 몇몇은 싸움을 피해 달아났다. 그 상황에서의 도망은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비겁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가 모하메드 자신도 유명한 '헤지라(Hijra)'의 망명처럼 탈출했다. 이슬람은 이교도의 통치를 받는 대신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교도의 위협을 받았을 때, 싸우거나 도망갈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그중 가장 극적인 탈출은 영국 정복 시기에 칼리프였던 아타히루 1세(Attahiru I)의 탈출이었다.
소코토(Sokoto)가 영국에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아타히루는 그의 관리들, 가족 그리고 재산을 가지고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영국군은 그를 추격했다. 5개월간의 추격끝에 루가드군은 1903년 7월에 부르미(Burmi)에서 칼리프를 체포하였다. 이곳에서의 격렬한 전투로 690명에 이르는 아타히루군인들이 사망하였다. 다시 한번 외부인들의 우세한 무기의 승리였다. 칼리페이트(Caliphate)의 정복과 함께 나이지리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영국의 점령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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