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이보 지역

africa club 2001. 11. 21. 14:34
이보 지역
1900년 서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이 설립되었을때, 그곳은 이보와 이비비오(Ibibio)같은 동부의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고, 외국 통치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부족들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에게 적의를 가졌으며 영국에게 있어서 그들을 정복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정복 정책은 영국에서 찬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1895년 조셉 챔벌린(Joseph Chamberlain)이 식민지 장관(Colonial Secretary)이 되었으며 무력 사용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명백했다 :
[" 계란을 깨지않고 오물렛을 만들 수는 없다.  야만주의, 노예, 수세기 동안 아  프리카 내부를 황폐화시킨 미신을 무력없이는 파괴시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보지역의 아로(Aro)족에 대한 무력의 사용은 그들의 영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와 '야만적'이라고 불리우는 제도의 존속에 의해 필수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아로(Aro)족은 '츄쿠의 목소리(the voice of Chukwu)'인 아로츄쿠(Arochwuku) 제사장의 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니제르강에서 상업적, 정치적 권력를 행사하고 있었다.  아로 이보족의 후원과 제사장의 종교적 허가를 이용하여 아로족과 비아로족들은 이보지역을 통해 해안까지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은 그들의 정신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무기구매에 충당되었다.  제사장의 존재와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무기의 소유는 이보지역의 주민들로 하여금 유럽인들의 필요를 거의 느끼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외국인들에게 무역을 금지시켰다.  영국은 공격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1901년 12월 24일 아로족에 대한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아로족 용병들에 의해 격퇴당했다. 그러나 아로족은 마침내 1902년에 패배하였다.  그들의 '반란적인' 추장들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제사장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제사장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믿는 아로 이보족은 소규모의 저항이 발생하여 분쇄되었던 1920년대까지 오키그위(Okigwi)동굴에서 제사를 지냈다.  아로 이보족의 패배는 서부 나이지리아의 영국정복이 완성됨을 의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