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루바 지역
영국이 요루바지역을 보호령으로 선포하게 된데에는 세가지 요소가 작용하였다. 첫째는 보호에 대한 선교사의 압력과 요루바 지역의 '평화'였다. 둘째는 영국의 선점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빈번한 무역의 중단 그리고 라고스(Lagos)식민지의 수입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라고스 식민지는 1861년에 설립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선교사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과 형제애에 대한 주장도 내륙 국가까지 의심을 하는 선교활동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새로운 식민지의 첫번째 총독인 브랜드(Brand)조차 1862년에 공포감을 나타내고 있다 :
[이 정부는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불신과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두려움은 라고스의 영토가 모든 나라들을 집어삼킬 때까지 점차적으로 확장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1867년 아베오쿠타(Abeokuta)로 부터 추방당했을 때 오지에 있던 주민들은 실질적 의미에서 그들의 공포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같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회담 시기까지 선교사들은 요루바 지역에 확고한 발판을 세웠다.
1840년 이래 요루바 지역은 두가지 선교사 유형의 출현을 경험하였다 : 백인 선교사 - 영국 C.M.S.와 감리교(Methodists) 그리고 미국 침례교 선교 ; 그리고 흑인 선교사들 - 이들은 '사로(Saro)'라고 알려진 시에라레온인들이었는데, 프리타운(Freetown)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은 후 조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었다. 1884-5년까지 양 단체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요루바 지역에 이익을 가져왔다. 그들은 현대적 경향을 지닌 실질적인 엘리트 교육을 제공하였으며 분쟁으로 얼룩진 요루바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단기적인 외부의 개입이 이러한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 졌는데, 왜냐하면 요루바 뿐만 아니라 북부의 강력한 풀라니(Fulani), 그리고 서부의 다호메이(Dahomey)가 개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육받은 아프리카인 기독교도들과 영국 선교사들의 마음속에는 단지 영국만이 이 역할을 수행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양 단체는 다호메이에 있는 프랑스의 위협에 불안해 했으며, 소코토(Sokoto)로부터의 이슬람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영국은 요루바 지역 점령에 대한 그들의 압력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라고스가 내륙으로의 제국주의적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내륙주민들의 두려움은 1886년에 현실화되었다. 라고스 정부는 전쟁중인 두 세력의 정전을 조정하기 위해 두 명의 요루바 기독교인인 사무엘 존슨(Rev.Samuel Johnson)과 필립스(Rev.C.Phillips)를 이용하였다. 가장 강한 이슬람 도시인 일로린(Llorin)에서 정전이 실패하자, 카터(Carter)총독은 개인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1893년에 카터총독은 내륙으로의 멀고 힘든 여행을 감행했다. 그는 요루바 전지역-이바단(Ibadan), 이제부(Ijebu) 그리고 일로린 -을 영국의 보호하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다른 지역들과 비교하여 영국은 세가지 주요 이유로 요루바 지역을 그들의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선교사들은 외국인 개입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초작업을 하였다. 게다가 나이지리아의 분할된 상태와 그 나라의 전쟁에 지친 특성 때문에 그것은 쉬운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의 최초의 정복이었다. 1892년 5월 이제부에 대한 토벌대에 의해 이제부는 정복되었다.
당시 이제부는 많은 공격을 가한 '죄'를 지고 있었다. 그곳은 라고스로 가는 무역로를 가로 막는 국가 중의 하나였다. 동시에 이제부는 선교사들의 침투에 저항하였다. 또한 그곳은 영국'문명'의 확장에 방해가 되었다. 카터는 영국점령을 위한 구실을 재빨리 발견했다. 그것은 1891년에 그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대리총독 덴톤(Denton)에 대한 모욕의 주장이었다. 갖가지 방법의 저항에 부딪힌 단기간의 정벌에서 이제부-오데(Ode)는 황폐해졌다.
이제부는 요루바 지역의 가장 강력한 국가 중의 하나였으며 외국인에게 지속적으로 적의를 나타낸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1892년 그곳의 정벌은 1893년 요루바 전지역에 대한 영국의 정복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영국이 요루바지역을 보호령으로 선포하게 된데에는 세가지 요소가 작용하였다. 첫째는 보호에 대한 선교사의 압력과 요루바 지역의 '평화'였다. 둘째는 영국의 선점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빈번한 무역의 중단 그리고 라고스(Lagos)식민지의 수입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라고스 식민지는 1861년에 설립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선교사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과 형제애에 대한 주장도 내륙 국가까지 의심을 하는 선교활동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새로운 식민지의 첫번째 총독인 브랜드(Brand)조차 1862년에 공포감을 나타내고 있다 :
[이 정부는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불신과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두려움은 라고스의 영토가 모든 나라들을 집어삼킬 때까지 점차적으로 확장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1867년 아베오쿠타(Abeokuta)로 부터 추방당했을 때 오지에 있던 주민들은 실질적 의미에서 그들의 공포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같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회담 시기까지 선교사들은 요루바 지역에 확고한 발판을 세웠다.
1840년 이래 요루바 지역은 두가지 선교사 유형의 출현을 경험하였다 : 백인 선교사 - 영국 C.M.S.와 감리교(Methodists) 그리고 미국 침례교 선교 ; 그리고 흑인 선교사들 - 이들은 '사로(Saro)'라고 알려진 시에라레온인들이었는데, 프리타운(Freetown)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은 후 조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었다. 1884-5년까지 양 단체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요루바 지역에 이익을 가져왔다. 그들은 현대적 경향을 지닌 실질적인 엘리트 교육을 제공하였으며 분쟁으로 얼룩진 요루바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단기적인 외부의 개입이 이러한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 졌는데, 왜냐하면 요루바 뿐만 아니라 북부의 강력한 풀라니(Fulani), 그리고 서부의 다호메이(Dahomey)가 개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육받은 아프리카인 기독교도들과 영국 선교사들의 마음속에는 단지 영국만이 이 역할을 수행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양 단체는 다호메이에 있는 프랑스의 위협에 불안해 했으며, 소코토(Sokoto)로부터의 이슬람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영국은 요루바 지역 점령에 대한 그들의 압력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라고스가 내륙으로의 제국주의적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내륙주민들의 두려움은 1886년에 현실화되었다. 라고스 정부는 전쟁중인 두 세력의 정전을 조정하기 위해 두 명의 요루바 기독교인인 사무엘 존슨(Rev.Samuel Johnson)과 필립스(Rev.C.Phillips)를 이용하였다. 가장 강한 이슬람 도시인 일로린(Llorin)에서 정전이 실패하자, 카터(Carter)총독은 개인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1893년에 카터총독은 내륙으로의 멀고 힘든 여행을 감행했다. 그는 요루바 전지역-이바단(Ibadan), 이제부(Ijebu) 그리고 일로린 -을 영국의 보호하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다른 지역들과 비교하여 영국은 세가지 주요 이유로 요루바 지역을 그들의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선교사들은 외국인 개입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초작업을 하였다. 게다가 나이지리아의 분할된 상태와 그 나라의 전쟁에 지친 특성 때문에 그것은 쉬운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의 최초의 정복이었다. 1892년 5월 이제부에 대한 토벌대에 의해 이제부는 정복되었다.
당시 이제부는 많은 공격을 가한 '죄'를 지고 있었다. 그곳은 라고스로 가는 무역로를 가로 막는 국가 중의 하나였다. 동시에 이제부는 선교사들의 침투에 저항하였다. 또한 그곳은 영국'문명'의 확장에 방해가 되었다. 카터는 영국점령을 위한 구실을 재빨리 발견했다. 그것은 1891년에 그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대리총독 덴톤(Denton)에 대한 모욕의 주장이었다. 갖가지 방법의 저항에 부딪힌 단기간의 정벌에서 이제부-오데(Ode)는 황폐해졌다.
이제부는 요루바 지역의 가장 강력한 국가 중의 하나였으며 외국인에게 지속적으로 적의를 나타낸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1892년 그곳의 정벌은 1893년 요루바 전지역에 대한 영국의 정복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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