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해안(가나)의 점령과 반발
아산테(Asante)동맹은 영국의 가나점령에 주요 장애요인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프라(Pra)강 남부에 위치한 국가들이 동맹의 소속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속국들은 친영국가인 판테(Fante)의 뒷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해안 민족에 대한 영국의 보호는 아산테 동맹에 계속적인 자극원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친영국가는 해안에 이르는 통로를 막았고, 따라서 그들의 노예수출을 방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친영국가는 아산테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아산테동맹은 1863년, 1874년, 1900년 세 차레의 전쟁을 일으켰다.
(a) 1863년의 영-아산테 전쟁
1863년 아산테전쟁의 원인은 식민지 간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특히 1844년의 '계약Bond'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계약(Bond)에 따르면, 해안국가들과 판테국에 대한 영국의 권력과 사법권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아산테동맹(Asante Confederation)의 소속국들이었고, 이들을 동맹의 영향력아래 끌어들이자 영국은 아산테의 주권을 침해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좀더 직접적인 원인은 금괴를 발견하고도 법에따라 아산테헤네(Asantehene)에 그것을 인도하기를 거부한 크와시 가니(Kwasi Gyani)에 관련되었다. 그는 황금해안 식민지로 탈출하였고, 영국의 총독은 아산테재판에 회부하도록 쿠마시(Kumasi)로 그를 되돌려 보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파인(Pine)총독의 이러한 행위는 아산테로 하여금 1863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자극하게 되었다.
영국은 무참하게 패배하였다. 이것은 서아프리카에서의 영국정부의 팽창정책에 대한 의회의 비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정부는 이 문제에 있어서 거의 패배하였고, 영국령 서아프리카 정착지의 사정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1865년 특별위원회는 3가지 권고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상업용을 제외한 영국의 권력과 사법권의 더 이상의 확장도 더 이상 효과가 없으며, 둘째, 아프리카 국가의 보호에 대한 더 이상의 협약도 제시하지 말것이며, 세째, 현재 영국 통치하에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자치를 준비하여야하며 영국도 시에라레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의 철수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결코 철수를 준비하지 않았으며 10년 후 제2차 아산테전쟁이 발생하였다.
아산테(Asante)동맹은 영국의 가나점령에 주요 장애요인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프라(Pra)강 남부에 위치한 국가들이 동맹의 소속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속국들은 친영국가인 판테(Fante)의 뒷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해안 민족에 대한 영국의 보호는 아산테 동맹에 계속적인 자극원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친영국가는 해안에 이르는 통로를 막았고, 따라서 그들의 노예수출을 방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친영국가는 아산테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아산테동맹은 1863년, 1874년, 1900년 세 차레의 전쟁을 일으켰다.
(a) 1863년의 영-아산테 전쟁
1863년 아산테전쟁의 원인은 식민지 간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특히 1844년의 '계약Bond'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계약(Bond)에 따르면, 해안국가들과 판테국에 대한 영국의 권력과 사법권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아산테동맹(Asante Confederation)의 소속국들이었고, 이들을 동맹의 영향력아래 끌어들이자 영국은 아산테의 주권을 침해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좀더 직접적인 원인은 금괴를 발견하고도 법에따라 아산테헤네(Asantehene)에 그것을 인도하기를 거부한 크와시 가니(Kwasi Gyani)에 관련되었다. 그는 황금해안 식민지로 탈출하였고, 영국의 총독은 아산테재판에 회부하도록 쿠마시(Kumasi)로 그를 되돌려 보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파인(Pine)총독의 이러한 행위는 아산테로 하여금 1863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자극하게 되었다.
영국은 무참하게 패배하였다. 이것은 서아프리카에서의 영국정부의 팽창정책에 대한 의회의 비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정부는 이 문제에 있어서 거의 패배하였고, 영국령 서아프리카 정착지의 사정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1865년 특별위원회는 3가지 권고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상업용을 제외한 영국의 권력과 사법권의 더 이상의 확장도 더 이상 효과가 없으며, 둘째, 아프리카 국가의 보호에 대한 더 이상의 협약도 제시하지 말것이며, 세째, 현재 영국 통치하에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자치를 준비하여야하며 영국도 시에라레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의 철수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결코 철수를 준비하지 않았으며 10년 후 제2차 아산테전쟁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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