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령과 케냐의 반발
1894년 우간다에 대한 보호령의 선포는 케동계곡(Kedong)과 해안지역 사이에 위치한 회사의 영토에 무슨 변화가 생기느냐하는 논쟁이 뒤따랐다. 1895년 7월 1일, 영국정부는 우간다와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안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의 통제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점령은 또한 우간다와 나일계곡의 전략적 통제를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이 지역은 이제 영국의 동아프리카 보호령이 되었다.
그러나 점령은 우간다에서와 같은 어떠한 합의도 없이, 협상할 족장들이 없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구실로 실행되었다.
영국의 점령에 대한 잔지바리(Zanzibari) 아랍인들의 반발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잔지바리섬의 술탄 하메드 빈 트와인(Hamed bin Thwain)은 회사통치의 종식은 본토의 군주로서 그의 부상을 입증하는 것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더우기, 회사의 통치가 해안의 아랍인들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고, 아랍인의 우위가 언젠가는 확보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영국정부의 점령은 따라서 잔지바리와 해안의 아랍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분노는 잔지바르섬에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영국의 통치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i)음바락 빈 라쉬드(Mbarak bin Rashid)의 반발,1895-6
이 지역은 타카웅구(Takaungu),마즈루이(Mazrui) 왕조시대의 북부지역이다. 살림 빈 하미스엘 마즈루이(Salim bin Hamis-el Mazrui)가 사망하자, I.B.E.A. 회사의 말린디(Malindi) 대표인 맥도걸(K.Macdougal)은 그 후계자로 좀 더 다루기 쉬운 라쉬드 빈 살림(Rashid bin Salim)을 임명하였다. 이것은 이슬람법률에 따르면 중대한 실책이었고, 오히려 음바락 빈 라쉬드(Mbarak bin Rashid)가 총독으로 더 적임자였다. 그는 영국의 간섭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회사의 통치가 1895년에 종결된 것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기간 동안이었다. 잔지바르의 술탄이나 회사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마즈루이는 잔지바르에 토대를 둔 하딩게(Hadinge)가 영국정부의 이름으로 그 지역의 행정을 장악했다는 소식에 기뻐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폭동을 결정하였다.
북쪽의 카피니(Kapini)에서부터 남쪽의 방가(Vanga)에 이르는 전 해안지역이 마즈루이편에 가담하였다. 심지어 은고뇨(Ngonyo)의 기리아마(Giriama)족같은 해안의 종족들도 영국에 대한 폭동에 가담하였다. 동아프리카에서 약세였던 영국은 인도로부터 하딩게의 지방군을 돕기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음바락과 그 추종자들은 패배하였다.
이 봉기는 충분한 군사력의 부족과 아랍-스와힐리(Arab-Swahili)인들의 지원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영국의 우위성은 피할 수 없고, 이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1896년에는 방가에서 키스마유(Kismayu)까지의 아랍-스와힐리인들은 영국의 보호아래에 들어가야만 했다. 해안에서의 저항이 진압됨에 따라, 영국은 이제 내륙을 좀더 효과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갖게 되었다.
(ii)오가덴 소말리의 반발,1895-1901
이 지역 반발의 원인은 외부인들이 오가덴의 쥬바랜드(Jubaland), 소말리(Somali)의 초원과 수자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데 있었다. 1897년 오가덴 소말리의 족장이 사망하자, 이 지역에서 아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했던 영국은 오가덴에서의 그들의 권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가덴은 새로운 질서에 반항하며 더 많은 수자원과 초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주변지역을 계속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격 가운데에는 욘테(Yonte)에 있는 영국의 전초기지에 대한 공격도 있었다. 영국은 오가덴을 응징하기 위하여 원정대를 파견하였고, 벌금으로 500마리의 소를 지불하여야 했다.
1900년에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소말리는 쥬바랜드의 부판무관인 제너(Jenner)를 살해하였다. 이에 두번째 원정대가 트레버 터넌(Trevor Ternan)대령의 지휘로 파견되었다. 소말리는 이 전투에서 150명의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오가덴은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고, 얼마간 평정을 찾았으며, 정부통제는 쥬바랜드가 이태리에 양도된 1925년까지 설립되지 못했다.
1894년 우간다에 대한 보호령의 선포는 케동계곡(Kedong)과 해안지역 사이에 위치한 회사의 영토에 무슨 변화가 생기느냐하는 논쟁이 뒤따랐다. 1895년 7월 1일, 영국정부는 우간다와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안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의 통제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점령은 또한 우간다와 나일계곡의 전략적 통제를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이 지역은 이제 영국의 동아프리카 보호령이 되었다.
그러나 점령은 우간다에서와 같은 어떠한 합의도 없이, 협상할 족장들이 없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구실로 실행되었다.
영국의 점령에 대한 잔지바리(Zanzibari) 아랍인들의 반발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잔지바리섬의 술탄 하메드 빈 트와인(Hamed bin Thwain)은 회사통치의 종식은 본토의 군주로서 그의 부상을 입증하는 것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더우기, 회사의 통치가 해안의 아랍인들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고, 아랍인의 우위가 언젠가는 확보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영국정부의 점령은 따라서 잔지바리와 해안의 아랍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분노는 잔지바르섬에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영국의 통치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i)음바락 빈 라쉬드(Mbarak bin Rashid)의 반발,1895-6
이 지역은 타카웅구(Takaungu),마즈루이(Mazrui) 왕조시대의 북부지역이다. 살림 빈 하미스엘 마즈루이(Salim bin Hamis-el Mazrui)가 사망하자, I.B.E.A. 회사의 말린디(Malindi) 대표인 맥도걸(K.Macdougal)은 그 후계자로 좀 더 다루기 쉬운 라쉬드 빈 살림(Rashid bin Salim)을 임명하였다. 이것은 이슬람법률에 따르면 중대한 실책이었고, 오히려 음바락 빈 라쉬드(Mbarak bin Rashid)가 총독으로 더 적임자였다. 그는 영국의 간섭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회사의 통치가 1895년에 종결된 것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기간 동안이었다. 잔지바르의 술탄이나 회사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마즈루이는 잔지바르에 토대를 둔 하딩게(Hadinge)가 영국정부의 이름으로 그 지역의 행정을 장악했다는 소식에 기뻐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폭동을 결정하였다.
북쪽의 카피니(Kapini)에서부터 남쪽의 방가(Vanga)에 이르는 전 해안지역이 마즈루이편에 가담하였다. 심지어 은고뇨(Ngonyo)의 기리아마(Giriama)족같은 해안의 종족들도 영국에 대한 폭동에 가담하였다. 동아프리카에서 약세였던 영국은 인도로부터 하딩게의 지방군을 돕기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음바락과 그 추종자들은 패배하였다.
이 봉기는 충분한 군사력의 부족과 아랍-스와힐리(Arab-Swahili)인들의 지원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영국의 우위성은 피할 수 없고, 이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1896년에는 방가에서 키스마유(Kismayu)까지의 아랍-스와힐리인들은 영국의 보호아래에 들어가야만 했다. 해안에서의 저항이 진압됨에 따라, 영국은 이제 내륙을 좀더 효과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갖게 되었다.
(ii)오가덴 소말리의 반발,1895-1901
이 지역 반발의 원인은 외부인들이 오가덴의 쥬바랜드(Jubaland), 소말리(Somali)의 초원과 수자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데 있었다. 1897년 오가덴 소말리의 족장이 사망하자, 이 지역에서 아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했던 영국은 오가덴에서의 그들의 권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가덴은 새로운 질서에 반항하며 더 많은 수자원과 초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주변지역을 계속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격 가운데에는 욘테(Yonte)에 있는 영국의 전초기지에 대한 공격도 있었다. 영국은 오가덴을 응징하기 위하여 원정대를 파견하였고, 벌금으로 500마리의 소를 지불하여야 했다.
1900년에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소말리는 쥬바랜드의 부판무관인 제너(Jenner)를 살해하였다. 이에 두번째 원정대가 트레버 터넌(Trevor Ternan)대령의 지휘로 파견되었다. 소말리는 이 전투에서 150명의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오가덴은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고, 얼마간 평정을 찾았으며, 정부통제는 쥬바랜드가 이태리에 양도된 1925년까지 설립되지 못했다.
'역사 > 침략과 저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3 (0) | 2001.11.21 |
---|---|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2 (0) | 2001.11.21 |
영국의 점령과 반발 - 우간다의 반발 (0) | 2001.11.21 |
외국의 점령과 서아프리카에서의 저항 형태 (0) | 2001.11.21 |
영국의 점령과 반발 - 감비아의 점령과 반발 (0) | 2001.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