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의 민주화 투쟁 - 소웨토(Soweto) 폭동
종종 아파르테이트의 끝을 알리는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1976년6월 16일 아프리칸스를 학교에서 교육매체로 사용되어지는 데 대한 백인정부의 조치에 반발하여 남부 요하네스버그의 소웨토 거주지역의 학생들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헥터 피터슨(Hecter Petersen)은 혁명의 첫 번째 희생자였고, 이는 소웨토로부터 전국으로 곧바로 전해졌다. 아프리카 국민 의회는 이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나, 이를 기회 삼으려고 노력을 했다. 흑인들의 자각은 더 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었고, 이들의 저항은 불같았고, 또한 널리 퍼져갔다. 혁명이 멈추기 전에는 비밀 경찰에 의해 총을 맞은 사람이 적어도 600명의 사람, 아마도 그 이상 일 것이고, 대부분이 10대였다. 수천의 사람들은 외국으로 흩어졌고, 해방을 위한 투쟁을 했다. 폭동에 대한 잔인한 조치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불러 일으켰고, 아파테이트 정책에 대한 합법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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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중앙 아프리카의 모든 전략적 상황은 포르투갈에서의 혁명과 독재권력의 붕괴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혁명은 포르투칼 자체에서부터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포르투칼령 중앙 아프리카 지역의 아프리카 자유화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오래되고 쓸모 없는 노력으로 인해 야기되는 경제적 피로, 혼란, 그리고 환멸은 혁명의 촉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루투칼의 혁명은 모잠비크, 앙골라 그리고 기니 비소의 아프리카 자유 운동에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혁명이후 모잠비크는 1975년 6월 사모라 마첼(Samora Machel)이 주도하는 플레리모에 의해 독립을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의 와해는 3개의 경쟁적인 자유운동 단체에 오래 지속된 권력투쟁을 야기시켰다. 앙골라의 북쪽은 주로 바콩고(Bakongo)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로버트 홀든(Robert Holden)이 이끄는 FNLA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수도 루안다(Luanda)와 중부지역은 음분두(Mbundu)사람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는데 급진적인 막시스트주의자들로 MPLA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남부에는 벵겔라 고원지대(Benguella Plateau)를 중심으로 오빔분두(Ovimbundu)사람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는데 죠나스 사빔비(Jonas Savimbi)가 이끄는 UNITA 조직이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74년 포루투칼인들의 퇴거와 함께 내전은 FNLA 의해 남쪽의 수도를 향한 진군으로 촉발되었다. FNLA는 구 자이르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아프리카에 막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우려한 미국정부로부터 많은 물질적인 원조를 받았다. 미국의 지원과 앙골라에서의 남아공의 지위에 대한 우려로 남아공은 UNITA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고 국경을 넘어 UNITA의 북진정책에 군사력을 원조하였다. MPLA는 구 소련으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았으며 쿠바는 군사력을 직접 앙골라에 파병하였다. 1975년 12월에 아프리카에서 베트남과 같은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을 우려한 미국의회가 앙골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함에 따란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쿠바인들의 도움으로 MPLA는 빠르게 FNLA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북쪽으로 빠르게 진격하고 있던 UNITA와 남아공 동맹군을 향하여 전선을 이동시켰다. UNITA는 급속히 붕괴되고 남아공 군은 국경을 넘어 철수하였다.
모잠비크와 앙골라의 급진적 아프리카 정부의 설립은 이 지역의 전략적 상황을 변화시켰다. 로데지아의 스미스 정권의 지위는 치명적으로 약화되었고, 남아공의 영향력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도록 하였다. 나미비아에서의 남아공의 위치는 타협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SWAPO는 그곳에서 무장 투쟁을 확대시킬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결국 남부 모잠비크를 통해 아프리카 게릴라들이 남아공에 직접 침투하기가 용이해졌다.
남아공 정부는 외부상황의 극적인 변화에 따라 내부적으로 즉각적이고 본격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백인 도시거주지의 외부에 있는 분리된 아프리카인 거주지들은 기나긴 좌절과 함께 분노가 증폭되어 있었다. 어떤 곳도 소웨토(Soweto)라고 알려진 정부주도로 만들어진 요하네스버그의 남서 지역(South West of Johannesburg)의 아프리카인 거주지만큼 심각한 긴장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은 없었다. 흑인 고등학교 학생들은 극도의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함에 따라 자질과 수적으로 부족한 교사와 교육시설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아프리칸스어를 교육의 매개체로서 영어와 함께 받아들어야 한다는 정부의 강제규정은 그들의 발전에 인위적인 장벽으로 생각되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실로 인식하게 되었다.
1976년 6월 소웨토의 학생들은 교육의 매개체로써 아프리칸스의 사용을 반대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경찰은 시위운동을 해산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고 그것은 더 심한 폭동으로 발전했다. 소웨토와 인접한 비트바터르스란드와 프레토리아는 물론이고 나탈과 케이프에까지 퍼져나갔다. 폭력이 확산됨에 따라 흑인뿐만 아니라 칼라드와 인도인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폭동은 인종폭력으로 발전해갔으며 1952년 폭동과 1960년 샤프빌 사건을 넘어서고 있었다. 더구나 초기의 폭동과는 달리 폭동인 빠르게 진압되지 못하고 모든 힘을 기울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비무장상태의 청년들은 그들의 고통과 좌절과 함께 무모한 용기로 총탄을 향해 돌진해 갔다. 얼마 안가 이들의 투쟁소식은 전세계로 알려졌고 그 해 말까지 계속되었다.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안군은 많은 젊은 흑인을 살해하였다. 수백명이 체포되었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의혹속에 ‘자살’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경찰에 잡혀가서 죽었던 사람들은 설명되어지지 않았다. 많은 흑인 젊은이들이 보츠와나나 스와질랜드로 탈출하였는데 이들은 자유투쟁을 위한 게릴라로 합류했다.
비록 ANC의 투쟁과 선전 그리고 흑인의식의 물결이 소웨토 폭동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하기는 하였지만 망명한 민족주의자 운동단체나 흑인의식조직에 의해 계획되거나 조직되지는 않았다. 소웨토 폭동은 분노와 좌절감이 빠져있는 알려지지 않은 젊은 지도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경찰들로부터 받은 대우나 반응은 게릴라전을 선호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해방운동이 아주 많은 구성원들의 새로운 가입을 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제 아프리카인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78년에 이르자 남아공 국경 지역의 게릴라 활동은 상당한 규모로 나타나게 되었다. 1980년에 ANC 게릴라들은 그들의 군사력에 맞추어 첨단 기술과 전략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남아공의 핵심적인 두 곳 의 석탄으로부터 오일을 추출하는 시설인 오렌지 자유 주에 있는 사솔버그(Sasolberg)와 트랜스발에 있는 세쿤다(Secunda)를 동시에 성공적으로 폭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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