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아프리카 탐사단

룩소르

africa club 2013. 9. 14. 21:14

 

룩소르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나일 강을 따라가면 아주 먼 옛날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훑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긴 나일 강처럼 긴 이집트의 역사를 가진 그 곳, 룩소르. 룩소르가 바로 이집트의 오래된 사진첩이다. 룩소르는 이집트 역사 중에서도 신왕국시대의 중심무대였다. 룩소르는 이 시기에 ‘테베’라고 불리었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많은 자취를 남겼다.

 

이집트의 왕을 뜻하는 ‘파라오’라는 명칭도 테베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가 시작될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를 태양신 ‘라’의 후손이라 믿었고 신처럼 존중되었다. 신과 같다고 여겨지는 파라오야말로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었고 종교상의 주체였다. 파라오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눈으로 드러나는 어떤 실체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파라오는 건축물들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지었다. 자신의 권력이 강할수록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이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의미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들은 파라오의 명성을 드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자부심을 북돋아 주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이집트라는 국가는 아주 강하고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집트 건축물들의 도드라지는 특징으로 제일 먼저 손에 꼽히는 점이 엄청난 규모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해버리는 그 거대한 규모를 실제로 맞닥뜨린다면 ‘억’소리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룩소르 동쪽 지역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인데, 이 신전은 역사상 가장 넓은 종교건축물이다. 유럽의 어떤 종교건축물이라도 카르나크 신전의 중앙홀에 쏙 들어갈 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가 감히 상상이 되는가?

 


입이 떡 벌어지게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집트 건축물들은 대부분 종교 건축물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연현상이나 여러 동물을 신으로 숭배했고,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이의 장례를 매우 중요시했다. 이러한 그들의 종교관은 건축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원한 삶을 원했던 이집트인들은 그러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돌처럼 단단한 재료를 이용해서 건축물을 지었다. 특히 이 특징은 파라오의 장제전에서 알 수 있다.

 

룩소르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주변 경관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호평 받고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깎아 내지른듯한 돌산의 절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뒤쪽 돌산과 비슷한 돌을 재료로 사용해서 배경과 건축물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돌을 쌓아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커다란 돌을 깎아서 만든 하나의 거석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계 없이도 돌을 조각할 수 있는 기묘한 방법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능통했기에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을 건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제전이란 파라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영혼을 제사하던 곳이다. 하트셉수트 여왕 역시 돌로 장제전을 건축함으로써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상징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크기도 엄청나다. 왕도 아닌 여왕의 장제전을 왜 이렇게 크게 지었나 생각할 수 있지만 하트셉수트 여왕은 엄연히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였다. 우리가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마지막 여성 파라오라면 하트셉수트는 이집트의 최초 여성 파라오이다.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죽고 그녀는 이복 오빠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1)남편인 투트모세 2세가 죽은 후 아이가 없었던 하트셉수트는 왕위를 잇지 못했고 후궁이 낳은 아들 투트모세 3세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22년간 투트모스 3세 대신 나라를 다스렸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강한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 수염을 붙이고 파라오 옷을 입는 등 남성 파라오처럼 보이게 했다.

 

남성 파라오의 모습을 한 채 파라오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의 장제전에 있는 많은 동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녀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내용의 벽화들이 주로 새겨져 있는 것을 통해서도 하트셉수트가 그녀의 위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비록 공동정치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을 빼앗긴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가 파라오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20여년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나중에 하트셉수트 여왕이 죽고나서야 왕위를 되찾은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그녀의 장제전에 있는 벽화와 조각을 훼손시켰다. 벽화나 조각상에서 얼굴을 없애고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 때문인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에는 얼굴을 잃은(?) 스핑크스와 인물들이 줄을 잇는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있는 룩소르의 서쪽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고 불린다. 반면 동쪽은 ‘산 자들의 도시’라고 불리고 있다. 동쪽과 서쪽의 기준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나뉘어진다. 우리 옛말에 죽은 사람을 일컬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강을 건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강 한줄기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불리다니 신기한 사실이다. 룩소르의 동쪽과 서쪽이 다른 별명을 갖고 있는 이유는 해가 뜨고 지는 방향 때문이다.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에는 주로 카르나크 신전이나 룩소르 신전과 같이 업적이나 신을 기리는 신전이 있지만,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에는 역대 왕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왕가의 계곡이나 영혼을 제사하는 장제전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왕가의 계곡은 신왕국시대 왕들의 묘가 자리해 있는 곳이다. 일종의 파라오들의 공동묘지라고나 할까. 그런데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들의 묘는 이전의 왕들과는 조금 다르다.

 

신왕국시대 이전의 왕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해서 그 곳을 묘지로 삼았지만 신왕국시대에는 피라미드의 건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의 무덤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이전의 피라미드형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한 신왕국시대의 왕들은 자신의 묘가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 피라미드 양식과 다른 암굴을 파서 분묘로 만들었다. 자신의 무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골짜기에 동굴을 파서 그 속에 미라와 부장품을 함께 매장한 것이다. 땅 속에 길게 이어진 동굴을 팠기 때문에 왕가의 계곡에 가보면 얼핏 보기에는 그냥 허허벌판 돌산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석구석 어딘가에는 왕의 무덤이 있다.

 


암굴 형태의 묘는 제 18왕조의 투트모세 1세를 시작으로 제 20왕조의 람세스 11세까지 계속해서 건설되었다. 왕들은 도굴꾼의 눈을 피해 암굴묘라는 다른 형식의 무덤을 선택했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많은 묘소들이 대부분 매장 직후에 도굴 당했다. 금은보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미라까지 훔쳐갔기 때문에 무덤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하워드 카터가 1922년에 발굴한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원상태로 남아있다.

 

발견된 총 62기의 무덤 중 유일하게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도굴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도굴하는 과정에 파헤친 다른 무덤의 돌 더미에 투탕카멘 왕 무덤의 입구가 막혔기 때문이다. 투탕카멘의 묘 위에 람세스 6세의 묘가 만들어졌는데, 람세스 6세의 무덤은 파헤쳐 도굴 당했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투탕카멘은 왕위에 10년도 채 있지 못하고 19살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요절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왕이었지만 하워드 카터가 찾아낸 온전한 그의 무덤만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부장품들은 이집트 왕의 화려했던 과거를 보여준다. 재위 기간이 채 10년이 되지 못하지만 3000여 점의 부장품이 나온 것으로 추정했을 때 번성했던 시기를 통치하던 왕의 묘에 얼마나 많은 부장품이 잠들어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고대 이집트 왕들은 왕으로서 직무의 대부분을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왕릉에서 도굴해갔을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볼 수조차 없다니…. 휑한 왕릉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짐은 어쩔 수 없다.

 

왕가의 계곡은 지금까지 총 62기의 묘가 발굴되었지만 투탕카멘의 묘 이후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남은 왕의 미라는 13구에 이른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13구의 미라도 왕가의 계곡 근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땅 속에 묻혀있는 묘들도 세상의 빛을 볼 시기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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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당시 이집트는 왕족간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