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라 –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
세계 4대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이자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는 그 이름만으로도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나에게는 또한 이집트 장군과 속국 누비아 공주의 사랑을 다룬 오페라 ‘아이다’의 배경이었던 아련한 로맨스의 나라이다. 그렇지만 역시 이집트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나일강변 너머 사막에 펼쳐진 피라미드 유적이다.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불리며 고도의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수많은 미스테리에 쌓여있는 구조물이다. 이러한 피라미드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과연 언제일까? 그 해답은 ‘죽은자들을 위한 도시’인 사카라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일강변에 위치한 사카라는 드넓은 피라미드 단지가 있는 곳이다. Saqqara라는 지명이 죽음의 신 Sokar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오랫동안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였다. 파라오 제1 왕조 시대부터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약 3000년 동안 왕과 귀족들의 무덤을 건설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피라미드 단지와 세라피움 신전등 으로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이끄는 곳이니 그 이름에 걸맞는다고 할 수 있다.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전통적인 무덤양식이었던 한 층의 마스타바를 6층으로 쌓아올려 처음으로 피라미드의 형태를 보였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사각뿔형태의 피라미드는 이것이 발전한 형태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최초의 피라미드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석조 건축물이다. 기원전 27세기에 세워진 건축물이 4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오늘날 까지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파라오의 절대권력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요즘의 이집트는 민주화 혁명의 물결이 거세지만 이집트 고대문명의 정수이자 파라오 권력의 표상인 피라미드는 꿋꿋이 남아 현대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인간사의 무상함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엄청난 건축물을 만든 당시 사람들의 노고가 떠오른다.
반만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은 파라오 조세르와 그의 재상 임호테프였다. 조세르는 고왕국 제 3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조세르의 세기’라고도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빛나던 시기를 이끌었던 파라오이다. 재상 임호테프는 파라오의 옥새를 담당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고위관료이자 천재적인 건축가였으며 의술과 문학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건축가이자 주술가·예언자이면서 의술과 천문학에도 뛰어났던 그를 이집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평가하는 것은, 수천 년을 앞선 임호테프에게 오히려 실례가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임호테프라는 이름을 어디에선가 들어보았다면 아마 그것은 바로 영화 미라에서였을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후대에 길이 존경받는 명재상이었던 임호테프를 영화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추악한 괴물 ‘이모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마치 헐리우드/일본이 한국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에서 이순신장군을 탐욕스러운 망령으로 묘사한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모텝이라는 인물의 설정이 서구인들의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오만에서 나온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파라오 조제르 하의 고대 이집트는 통일이 굳건해지고 사회의 진보가 이루어 졌으며, 종교와 예술분야에서도 전환점이라 할 만한 시기였다. 피라미드와 같이 거대한 건축물은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집중된 권력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왕조의 흥망이 결정되는데, 이집트의 고왕국들과 중국의 진나라와 같은 거대한 왕조는 권력과 자원의 많은 부분을 왕의 무덤을 건설하는데 사용하곤 했다.
조세르왕의 계단식피라미드만 하더라도 한 층의 높이가 10여 미터로 총 높이가 65미터에 달한다. 이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의 정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진시황릉 사례-피라미드를 거대한 건축물로 정의한다면 진시황릉도 이에 해당하는 고대의 건축물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비합리적이고 전제적인 정치의 표상으로 보이는 이러한 대규모의 무덤 건설이 고대왕조에서는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고대인들의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고에서 파라오는 곧 태양신이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태양이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은 파라오의 영혼이 머물 장소를 만들어 태양신 파라오의 영원불멸을 돕는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불멸로 가는 위대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무덤을 건설하는 것은 왕의 궁전을 세우는 일만큼이나 혹은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피라미드는 죽은 자가 영원히 안식을 취하는 공간인 동시에 부활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피라미드는 별과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밑변의 방향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고도의 건축학적, 천문학적 지식에 기반하여 건설된 또다른 세계였다.
피라미드는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을 이집트로 불러오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시계바늘을 앞으로 돌려보면 바로 이렇게 찬란한 문화유산이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불러일으키는 기제가 되기도 했다. (이집트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정도로 이집트에 대한 세계 여러사람의 관심이 컸지만 이는 한편 이집트로의 침략을 가속화하기도 했다)피라미드의 도굴과 유물의 해외반출은 힘을 잃은 국가권력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때 이집트 유물의 해외반출을 제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이집트 인이 아닌 프랑스 인 오귀스트 마리에트였다. 프랑스에서 이집트학을 공부한 그는 사카라의 세라피움 신전을 발굴하였는데 발굴한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유물의 해외반출을 금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문화재의 해외반출은 식민지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제 식민지시기는 물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는 수만점에 이른다.
문화재의 유출은 정부 관리나 군인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에 의해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이들은 문화재를 보존해주겠다는 명목으로 타국의 문화재를 자신의 나라로 가져간 사례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집트의 문화재를 현지에서 보호하려했던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노력은 선구적인 것이었다. 이 이름이 어디에선가 들어보았다고 생각하던 중, 오페라 ‘아이다’가 그가 쓴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깊은 감명을 받았던 오페라는 바로 이 오귀스트가 이집트에서 남녀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쓴 소설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 운명처럼 느껴졌던 저녁, 이집트의 석양은 피라미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하늘로 상승하는 수직의 피라미드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수평선과 대비되며 우리의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게 하였다. 사카라는 망자를 위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관념 속에서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기에 피라미드는 무덤인 동시에 영혼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피라미드와 그 이야기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설레임을 때로는 슬픔을 심어준다. 사카라에서는 죽은자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숨쉬고 있었다.
참고문헌
정규영, <<문명의 안식처, 이집트로 가는 길>>, 르네상스, 2004.
크리스티앙 자크 지음, 임헌 옮김,<<위대한 파라오의 이집트>>, 예술시대,
인터넷 사이트
http://www.cyworld.com/theegypt/3661890
http://travfotos.tistory.com/124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145
다큐멘터리
-윤기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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